한국 이주노동자 출신 미얀마 ‘도시게릴라부대’ 지휘관 꼬마웅의 호소
평화 시위에서 무장 저항으로…“국제사회, 미얀마와 함께 해달라” 촉구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 6개월이 지나고 있다. 미얀마 내부에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 데다 군부는 장기집권 절차를 밟고 있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쏠린 만큼 국제적으로도 소외된 분위기다. 하지만 미얀마 시민들은 군부의 쿠데타에 맞서서 물러서지 않고 목숨을 건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이 글은 한국 이주노동자 출신의 미얀마인이자 현재 미얀마 ‘도시게릴라부대’ 지휘관을 맡고 있는 꼬마웅(가명)의 이야기를 아시아인권문화연대의 이란주 대표가 정리한 내용이다. 꼬마웅이 소개하는 도시게릴라부대의 여성 소대장 메이모 역시 가명이다. 군부의 유혈 진압에 대항하는 미얀마 시민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연대와 관심을 촉구하며 [제주의소리]에 보내온 글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임무처로 떠나는 대원들과 함께. ⓒ제주의소리
신병 훈련을 마치고 임무처로 떠나는 대원들과 함께. ⓒ제주의소리

시민방위군(PDF, People’s Defense Forces)과 도시게릴라에 참여해서 미얀마 봄혁명*의 무장투쟁을 벌이는 이들 대부분이 20대 젊은이들이지만, 이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만 맡겨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환갑 전후의 나이가 된 88세대(1988년에 일어난 88민중항쟁의 주력 세대), 쉰 살 가까운 96세대(1996년 양곤 학생 시위의 주요 참여 세대), 지금은 서른 중후반에 이른 2007세대(2007년 일어났던 샤프란 혁명의 주력 세대) 등 일일이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세대가 무장 혁명에 참여하고 있다. 메이모는 그중 한 사람이다. 

*미얀마 봄혁명 : 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미얀마 시민들은 군부에 맞서 시민불복종운동과 무장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를 ‘봄혁명’이라 칭한다.

여전사 메이모의 혁명

쉰 중반 여성인 메이모는 PDF와 도시게릴라를 훈련하는 군관이자 보급과 전투를 지원하는 지원부대의 소대장이다. 미얀마에서 여성 나이 50이면 이미 할머니 소리를 듣고도 남는다. 메이모 역시 딸 다섯 중에 둘은 이미 결혼시키고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쿠데타가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현장에서 투쟁을 이끄는 그의 모습은 힘차고 열렬하다. 나는 그가 자랑스럽다. 그와 같은 전사가 함께 하고 있으니 우리의 혁명이 이토록 뜨거운 것이다! 언젠가 동지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터, 이번 기회에 작은 실천을 해 보고자 한다. ‘메이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여러 PDF와 연합작전을 할 때 메이모를 처음 만났다. 활기차고 포용력 있는 여전사에게 매료당한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청하고 귀담아들었다. 드문드문 빠졌던 이야기는 이 글을 쓰면서 전화 통화를 하며 채웠다.

“나는 다섯 딸을 둔 엄마예요. 남편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죠. 나 혼자 아이들을 키워 큰아이들은 결혼도 시켰어요. 우리는 군인 가족이에요. 내 아버지는 영국 점령기에 독립군이었고, 남편은 돌아가시기 전에 고위급 군인이었어요. 큰아이들은 쿠데타 전에 대위급 군인들과 결혼해서 잘살고 있었죠. 이모, 삼촌 여럿이 군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고요.”

몇 세대에 걸쳐 군과 가깝게 살아온 나이든 여성이 대체 어떻게 무장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인가! 

“내 가족 중에 군인이 많긴 하지만 군인이 무력으로 통치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죠. 지난 몇 년간 미얀마가 민주적인 나라로 발전해 가는 것이 나는 정말 기뻤어요. 그런데 군부가 또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인 세상을 만들다니 믿을 수 없었어요. 하늘이 무너지면 이런 느낌일까요?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끔찍하게도 현실이었죠.

2021년 2월 1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며칠 뒤였어요. 양곤의 중심인 흘레단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반대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이들을 데리고 구경 갔죠. 무척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왔어요. 가슴이 찡하고 뜨거워졌어요. 아이들에게 차에서 기다리라 이르고 나 혼자 시위대 앞쪽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깃발을 들었어요. 다음날부터는 어느 지역에서도 다 시위가 일어났어요. 나도 뛰어다니며 여러 지역에서 시위대를 조직했어요. 

3월 3일은 정말 참혹했어요. 양곤 노스오깔라빠 깐따야 공원에서 우리가 행진하고 있을 때 군인들이 도로를 막았어요. 우리가 해산 명령에 따르지 않자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쐈어요. 앞쪽에 섰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졌어요. 군인들은 흩어지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 총을 쐈어요. 골목으로 도망쳐서 숨었다가 빠져나오면서 보니 피가 흥건한 바닥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 자리에서 수십 명이 죽고 백여 명이 크게 다쳤대요. 다친 사람들은 숨어서 치료받았어요.”

시민불복종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CDM) 참여 가족들에게 식량과 생필품 지원 업무 수행 중에. ⓒ제주의소리
시민불복종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CDM) 참여 가족들에게 식량과 생필품 지원 업무 수행 중에. ⓒ제주의소리

무장 저항은 민주주의 본능

많은 이들이 평화적인 시위에 참여했다가 군인들에게 총격과 구타를 당하고 무장 저항으로 돌아섰다. 더는 짓밟히고 살 수 없다는 자각과 함께 민주주의에 대한 본능이 깨어난 것이리라.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에서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 떼로 죽어가니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내가 어미 된 도리에서 집에 박혀 있을 수는 없었어요.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저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는데 우리가 맨손으로 맞설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갈 길은 무장 저항밖에 없다. 나는 결단했고 그 길을 향해 뛰었어요.”

사위들이며 가족들이 군에 있는데 어떻게 군부에 맞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질문은 접어두기 바란다. 많은 이들이 군부에 속한 부모 형제와 갈라져 무장투쟁에 임하고 있으니 말이다. 훗날 역사는 이 아픔을 어떻게 기록하고 평가할까!

“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많았어요. 아이들은 더 빨리 내달렸어요. 카렌반군 지역으로 들어가 일주일간 군사훈련을 받고 양곤으로 돌아와서 할 일을 찾는 아이들이 상당했죠. 아이들은 훈련받으러 가고 오는 길에 쓸 차비도 없었어요. 아이들이 걸어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돈을 모아 차비를 지원했어요. 카렌반군은 아이들을 받아들여 훈련시켜 줬고요. 직접 무장투쟁에 나서지 않은 사람들도 뒤에서 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이들을 연결하고 모아서 외곽지역으로 이동해서 군사훈련을 더 했어요. 무기를 구할 수 없어서 우리가 직접 배우고 만들며 자체 훈련을 했어요. 당시 함께하고 있던 아이들이 16명이었어요. 스무 살 안팎의 어린 친구들이었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는 차와 오토바이를 팔았어요. 그 돈으로 아이들 먹이고 훈련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작전을 수행했어요. 그러다 발각되어 군부의 습격을 받고 대원 하나를 잃기도 했어요. 가까스로 도망쳐 양곤시내로 들어왔는데, 미국 CNN 취재진이 군부의 초대로 양곤에 왔다지 뭐예요. 군부는 취재진을 끌고 평온한 지역으로만 데리고 다녔어요. 우리는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도로에 타이어를 쌓고 불태웠어요. 양곤에서 지내면서도 나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젊은이들이 싸우고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나요. 양곤에 군부가 검문을 강화하면서 나는 정신 나간 사람 행세를 하며 위기를 넘겼어요. 점점 그 연기에 익숙해지면서 아예 거리에서 지냈죠.”

자신이 미친 사람으로 살았노라 말하는 대목에서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웃었다. 우리는 여러 모습으로 변장해서 위기를 넘기곤 했는데 그중에 ‘미친 사람’은 단골 메뉴였다. 실로 제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는 세상이니까. 

“미친 사람, 명상하는 할머니, 늙은 농부, 못된 남편한테 매 맞고 집 나온 여자, 거지 노릇을 하며 버틴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예요.”

새 군복을 지급받았다. ⓒ제주의소리
새 군복을 지급받았다. ⓒ제주의소리

미얀마가 평화의 땅이 될 때까지

물론 그게 다가 아니다. 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명상하며 지혜로운 길을 선택해 왔다는 말을 나는 여럿에게 들었다. PDF 활동 초기에 그는 가족이 체포되고 협박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딸들이 걱정할까 봐 엄마가 뭘 하고 다니는지 전혀 알리지 않았어요. 어쩌다 내 신원이 노출됐는지 군인들이 집에 쳐들어와서 물건을 싹 쓸어가고 열다섯 살짜리 막내딸, 그리고 같이 있던 딸 친구까지 잡아갔어요. 나를 유인하려고 막내딸을 시켜 내게 전화를 걸었어요. 내가 전화를 받자 부대장이 낚아채서, 딸을 살리려면 당신이 직접 오라고 하더군요. 눈앞이 깜깜했어요. 몸이 부들부들 떨렸죠. 그 짧은 순간 결정을 내려야 했어요. 내가 가든 안 가든 너는 나와 내 가족을 모두 잡아들일 것이니 내가 자진해서 갈 이유가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린 동료들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어요. 어린 동료들은 말했어요. “이모, 우리 걱정은 말고 집에 돌아가세요.” 그런데 이 어린 목숨들이 내 딸 목숨과 다르지 않잖아요. 아직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들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지 뻔한데 내가 떠날 수 없잖아요. 부처님도 내 마음과 같으시겠지. 하지만 얼마나 떨렸는지, 딸에게 얼마나 죄스러웠는지 말도 못해요. 다행히 딸이 내 행적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다 군대에 있는 친척들이 도와준 덕분에 무사히 풀려났어요.”

그는 목소리에 밴 울음을 애써 털어냈다. 그 일만이 아니다. 그는 군인 가족이라는 점 때문에 스파이로 오해받기도 하고, 군부에 밀고 당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저격 훈련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저격 훈련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어도 이 혁명에서 도망칠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억울함을 벗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요.”

그의 PDF는 다른 PDF와 결합하며 조직력을 키워갔다.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조직한 PDF들 다수가 민족통합정부(NUG, National Unity Government) 산하로 모여들었다. 신병훈련과 후방지원이 주 업무이지만 그는 미션에도 직접 참여한다.

“우리는 여러 미션을 성공시켰어요. 기차를 공격해서 군인의 이동을 차단했고, 이동로에 지뢰를 매설해서 적을 전멸시키기도 했어요. 한번은 사령관급이 부대를 이끌고 이동한다는 첩보를 받고 도로 전체에 지뢰를 매설하고 잠복하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타나는 거예요. 허위 첩보인 것 같으니 지뢰를 거두고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내가 반대했어요. 우리는 하수구에 매복한 채 이틀을 버틴 끝에 결국 그 미션을 완료했어요. 대단한 성공이었어요.”

그는 슬픔에 침착하고 성공에 초연했다. 먼저 하늘에 간 동료들의 영이 자신을 지켜주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내 눈에는 그가 확고한 투쟁 목적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군인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어릴 적 자주 들었던 아버지 말씀이죠. 아버지는 영웅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독립군이었어요. 아버지 가르침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거 같아요. 나는 이 혁명에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군부를 쫓아내고 싶어요. 꼭 성공해서 하늘에 있는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이제 안심하시라, 우리나라가 평화의 땅이 되었다라고.”

딸 다섯의 엄마인 그는 이제 부모를 떠나온 모든 대원의 엄마가 되었다. 젊은 대원들은 그가 해준 밥을 먹고 그를 엄마라 부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힘을 얻는다. 메이모의 혁명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해방구의 주민 지원 활동 중에. ⓒ제주의소리
해방구의 주민 지원 활동 중에. ⓒ제주의소리

PDF와 마을을 향해 퍼붓는 군부의 폭격은 갈수록 잦고 포악하다. 동시에 군부는 간교한 전략도 구사한다. 지난 5월초 부처님오신날에 맞춰 군부는 정치범들을 특별사면하고 석방한다며 요란을 떨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하나씩 다시 잡아들이고 있다. 군부는 소수민족들에게 NUG와 PDF를 배제하고 군부 중심의 연방국을 세우자고 제안하는 중이다. 그 일환으로 중국의 압박이 통하는 일부 소수민족을 먼저 끌어내 협상을 시도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정치범을 석방하는 척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부가 북부 소수민족 무장조직 3단체를 초청해서 6월 초에 시도했던 협상은 단체들의 반발로 결렬되었다. 폭격과 살인, 방화, 자기들끼리의 연방국이라는 교활한 청사진과 회유, 이처럼 사나운 군부의 전략에 맞서기 위해 우리는 더욱 예민해지고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민주와 평화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 2년 반을 거치는 동안 우리 혁명이 아마추어 단계를 넘어섰다고 나는 판단한다. 무력으로 군부를 압박하는 한편 시민을 결집하고 새로운 사회를 함께 구상하며 실현하기 위해 힘을 쏟으려 한다. 이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 가면 우리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자신 있다. 국제사회가 냉정함을 풀고 우리 곁에 설 때가 되었다. / 꼬마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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