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3) 서귀포시 서귀동 김경자 어르신 ②

정옥제과가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 자리 잡은 지 50여 년. 그 가운데 김경자 삼춘의 손길이 닿은 지는 40년을 넘기고 있다. 

처음부터 삼춘이 빵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선 글에서 기술했듯이 빵 기술자였던 남편은 빵을 만들고 삼춘은 홀을 봤다. 그런데 술을 좋아했던 남편이 일찍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이 일의 특성상 늦잠을 자버려서 지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각을 하면 남편보다 김경자 삼춘이 되려 주인할머니의 눈치를 봤고 싫은 소리도 듣기 싫었다. 1988년, 삼춘은 본격적으로 남편에게 빵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주방에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정옥제과에서 빵을 어떻게 배웠냐면 애기 아빠가 술을 좋아해서 새벽에 주문만 받으면 술 때문에 못 일어나. 그래서 내가 애기 아빠가 찐빵에 뭐를 넣는지 어깨 너머로 배워. 주인 할머니한테 욕 안 들으려고. 오늘은 뭐 놤심고 하멍 슬쩍 보고 집에 와서 적어. 그리고 한 번 해 보고. 이렇게 어깨너머로 하나씩 배운거라. 그렇게 시작했다가 본격적으로 남편이 하나씩 고라줘서 배워주기도 하고. 고로케, 만두, 카스테라, 상외빵. 뭐 지금 여기서 만드는 빵은 다 애기아빠 기술이지.”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담낭암 선고를 받았다. 초기에 발견했고 병원에서도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으니 걱정 말라 했다. 실제로도 5년은 거뜬하게 사셨단다. 그런데 남편의 상태가 급속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암 선고를 받고 6~7년 정도 지나니 남편이 자포자기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심지어 다시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결국 간암으로 재발했다. 결국 남편 나이 마흔둘에 이별을 해야 했다. 젊어도 너무 젊은 나이였다. 

부부가 다시 정옥제과에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주인할머니가 삼춘네에게 빵집 경영권을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해 오는 것을 알아챘는지, 주인 할머니께 빵집을 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그런데 주인 할머니의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남편은 중환자실로 들어갔고, 김경자 삼춘 혼자서 경영권을 달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자 빵기술자였던 남편의 오랜 벗들이 삼춘과 함께 할머니께 찾아갔다.

“빵집을 준다준다 하면서도 확실히 대답도 딱 안하고, 애기아빠도 중환자실에 있으니까 안 준대. 그러니 아빠 친구들이 가서 주인한테 ‘줍써, 줍써. 야이네한테 한 약속 지킵써.’ 하고 같이 말해줬어. 나만 가면 안 주켄 하니까, 남편 친구들이 친구는 지금 아팡 누워있는데 먼저 준다고 했으니 약속 지키시라고. 주시라고. 2000년부터 내가 빵집 운영을 본격적으로 맡게 됐고. 내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 그러니까 개업식은 2006년에 애들 아빠 중환자실에 있을 때 했어. 개업식 날 중환자실에서 애들 아빠 외출 막 반대했는데도 링겔 꽂은 상태로 나와서 나 개업하는 거 가게 앞 멀리서 봤어. 할머니께 빵집 인수 받을 때 우리 아저씨가 말하더라고. 주인할머니 섭섭하게 하지 말고, 할머니가 달라고 하는 건 다 주고, 너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이야기 했지. 그렇게 아픈 우리 아저씨가 만두 하는거 알려주고 고로케 하는 거 알려주고 하고 갔어.” 

빵집 내부에는 오래 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한 장의 종이가 벽에 붙어있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 여쭈어 보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는 김경자 삼춘. 사진을 찍고 빵을 만드는 주방을 찬찬히 돌아보니 혼자 빵을 만들기에는 꽤 공간이 넓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따로 기술자들 들이지도 않았고 새로운 빵 기술도 배우지 않았다. 오롯이 남편에게 배운 기술로 지금껏 운영을 해 오고 계신단다. 둘째 딸이 살짝 귀띔해 주었는데, 엄마는 빵집 개업 날 아빠가 링거를 꽂은 채 서있던 곳을 몇 년 동안 지나가지 못하셨단다. 

남편의 오랜 암 투병과 빵집 새단장, 여기에 아이들이 한창 학교를 다녔던 시기라 집에 빚이 좀 있던 상황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큰딸은 대학을 포기했다. 아빠가 아파서 엄마 혼자 일하는데 어떻게 대학을 가냐고 말하는 큰 딸은 대학 대신 빵집으로 출근을 해 삼춘의 일을 도왔다. 둘째딸도 언니가 대학을 못갔으니 본인도 자연스레 대학진학을 포기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 마다 빵집 일을 거들었다. 

“큰딸하고 나하고 악착같이 일해서 그 빚을 다 갚은 날 둘이서 부둥켜안고 막 울었던 것이 기억나. 그때가 큰 딸이 24살이었는데 대학도 못가고. 남들은 대학 졸업할 나이인데 우리 큰딸은 그렇게 내 옆에 있었어요. 덩달아 둘째딸도 대학을 포기하고. 그렇게 큰 딸은 시집가서 본인도 사위와 식당하면서도 월요일만 되면 딱 아침 6시에 빵집을 와. 와서 두어 시간 와서 일하고 도와주고 가. 둘째딸도 애들 아침에 등원시키고 와서 내가 만든 빵, 홀 보면서 팔아주고. 그럼 난 잠깐 내 볼일 보러 밖에 나갔다 오고. 그렇게 딸들이 지금껏 도와줬어.”

남편과의 사별 후 외로움과 슬픔으로만 휩싸일 겨를도 없이 그렇게 딸들, 특히 큰딸과 의지하며 빵집을 이어나갔다. 특히 명절 대목이 되면 빵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혼자서 다 만들 수 없었기에 열흘 정도는 아저씨 두 분이 와서 빵 만드는 일을 도와주셨다. 그러다 떡 하는 날의 전 날부터는 아저씨들 몇 분에 삼춘 자녀들도 전부 와서 밤을 새며 찹쌀떡을 만들었다. 

특히 명절 대목이 되면 빵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혼자서 다 만들 수 없었기에 열흘 정도는 아저씨 두 분이 와서 빵 만드는 일을 도와주셨다. 그러다 떡 하는 날의 전 날부터는 아저씨들 몇 분에 김경자 삼춘 자녀들도 전부 와서 밤을 새며 찹쌀떡을 만들었다. / 사진=김진경
특히 명절 대목이 되면 빵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혼자서 다 만들 수 없었기에 열흘 정도는 아저씨 두 분이 와서 빵 만드는 일을 도와주셨다. 그러다 떡 하는 날의 전 날부터는 아저씨들 몇 분에 김경자 삼춘 자녀들도 전부 와서 밤을 새며 찹쌀떡을 만들었다. / 사진=김진경

“대목에 와서 밤새며 찹쌀떡 만들어 주는 아저씨들은 다 애기아빠 빵 기술자 친구들이야. 지금은 빵 안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일 년에 두 번 이렇게 우리 빵집으로 다 모여. 한 6명 정도가 매년 이렇게 와. 옛날에는 다 빵집 사장님들 이셨으니까. 아, 두 분은 지금 제주시오일장에 계시니까 대목이랑 장날이랑 겹치면 못 오시지. 찹쌀떡은 일일이 손으로 직접 싸니까 아저씨 친구들이 밤을 새면서 옛날이야기도 하면서 찹쌀떡을 만들어 줘. 아주머니 한 분 빌어서 떡도 쪄 주고 아저씨들이랑 우리 애들이랑 같이 만든 찹쌀떡을 박스에 차곡차곡 잘 정리해줘. 대목 때는 따로 주문도 예약도 받지 않아. 그럼 예약하지 않고 일부러 우리 빵집에 와 주시는 손님들에게 피해 가니까. 그럼 떡 하는 날 새벽부터 손님들이 오면서 찹쌀떡이 나가기 시작해요. 명절이라 친척들이랑 다 나눠먹는다고 몇 십 개부터 몇 백 개까지 사가. 그렇게 아침 9시 반이 되면 찹쌀떡이 동이 나. 몇 개나 만드는지는 세어보지 않았지만 추석에는 40키로짜리 찹쌀이 두 개, 설에는 세 개. 이렇게 만들어”

명절에 송편 대신 찹쌀떡을 올리는 집에 많아, 명절 대목에는 카스텔라나 롤 케이크보다도 찹쌀떡이 그렇게 많이 나간단다. 빵을 만들어서 파는 입장이었지만 사별한 남편의 벗들이 와서 빵집을 가득 메워주며 찹쌀떡을 만들어주는 떡 하는 날의 새벽은 정옥제과의 명절날이었다. 비록 남편은 없지만 남편의 친구 분들은 지금까지도 일 년에 두 번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모인다.

꼭 대목이 아니더라도 남편에게 배운 김경자 삼춘의 찹쌀떡은 맛이 좋기로 유명해서 사러 오는 단골이 많았다. 팥을 직접 삶아 앙금을 만드니 달지 않아 쉽게 물리지 않는 것이 비결이라 했다. 제주시에서도 사러 오는 단골이 있을 정도라 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3개에 천원을 받고 팔았다. 부지기수로 오르는 재료값 인상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었다. 그렇다고 더 싼 재료를 쓰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맛을 찾아 찹쌀떡을 사러 오시는 단골 어르신들이 많아서였단다. 오래 전부터 이 빵집에 다니시는 할머니들이 많고 그 며느리들도 시어머니를 따라 왔다 단골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오랜 단골들에게 빵 값을 올려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한 개에 500원으로 올렸다. 그 정도 올리는 것도 단골 어르신들에게는 미안하다 하셨다. 

삼춘이 처음 중학교를 졸업하고 갓 빵공장과 빵집을 다녔을 때, 제주의 빵집에서 만들었던 만두는 무, 돼지고기, 쪽파, 당면을 넣고 만들었다. 고로케는 감자와 숙주나물을 넣어 만들었다. 지금처럼 고로케에 카레와 햄을 넣어서 만드는 방식은 그 이후에 생긴 것이라고 말하셨다.

남편이 알려 준 상외떡도 지금까지 레시피를 하나도 안 바꾸고 그대로 만들고 있다. 중력분 3키로에 막걸리 한 병, 우유 큰 걸로 한 팩을 쓴다. 물가 생각하면 우유 대신 물을 넣어야 하지만 물을 넣어버리면 기존의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꼭 우유만 넣고 만든다. 갓 쪄서 나왔을 때에도 맛있지만 냉동시켰다 찌면 찔수록 맛있는 떡이 바로 이 상외떡이다. 가끔 상외떡을 냉동실에 얼려뒀다가 단골손님들이 오면 냉동 상외떡을 손에 들려 보낸다. 현충일 행사한다고 손님이 상외떡 천 개 주문했을 때는 출근보다 더 일찍 나와야 하지만 우리 집 떡을 찾아준다는 사실에 그마저도 좋았다고 한다.

남편이 알려 준 상외떡도 지금까지 레시피를 하나도 안 바꾸고 그대로 만들고 있다. / 사진=김진경
남편이 알려 준 상외떡도 지금까지 레시피를 하나도 안 바꾸고 그대로 만들고 있다. / 사진=김진경

삼춘에게 평소 몇 시에 출근하는 지 여쭤보았다.

“애들 아빠와 사별하고 나중에 그래도 좋은 분 만났지. 그 분과 함께 새벽 4시에 나와. 그때부터 시작해야 아침 5시 50분에 찐빵이 처음 나와요. 그 다음은 도나스, 식빵, 모찌 나오고 중간 중간마다 매대에 빵 떨어지는 거 확인하고 다음 빵 만들어. 보통 팥빵, 소보로빵, 앙금빵 같은 옛날 빵은 아침 9시에 나와. 그 사람이 9시에 밭에 일하러 가면 그 다음부터는 오후 1시까지 카스텔라, 밤만주를 나 혼자 만들어. 그럼 12시부터 4시까지 둘째딸이 와서 홀을 좀 봐주고. 여기는 시장이라서 새벽에도 사람들이 지나가다 빵도 찾고 해서 늘 그렇게 일찍 나왔죠. 아침에 빵집 와서 단돈 천원이라도 사러 왔는데 빵이 없으면 내가 섭섭해서 가는 걸 못 봐. 그래서 내가 더 일찍 오는 걸 수도 있어요. 팥은 아직도 내가 삶으니까 한 번에 두 말씩 삶는데, 아침 7시부터 삶으면 12시 반 돼서야 삶는 것이 끝나. 팥은 금방 쉬어서 한 번에 오래 해두지도 못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팥 삶는 작업을 해야죠. 옛날에는 연탄 위에서 팥 삶고 했는데 지금은 그때 비하면 낫지. 냉장고가 있다고 해도 팥은 일주일에 두 번은 삶아야해. 그리고 대목이나 명절빵 사러 오는 손님들 빼고는 평상시에는 모찌랑 팥빵이 제일 잘 나가니까. 자주해야 하고.”

정옥제과는 이제껏 정기 휴무일 없이 문을 열었다. 매주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휴무를 가진 지 이제야 3년이다. 왜 쉬지 않고 운영했냐고 여쭤보니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어르신들과 단골들이 헛걸음하면 안 되기에 그랬다 하셨다. 그래서 가격도 많이 올리지 못했던 거라고. 차라리 내가 덜 쓰고 덜 먹으면 된다고 하셨다. 심지어 제과협회에서 왜 빵 가격을 싸게 파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단다. 어쩔 수 없단다. 시장통에는 비싸게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삼춘의 이야기였다. 단골들이 오면 서비스 빵을 가득 안겨주는 이유도 하나였다. 빵은 내가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빵을 사러 멀리서 일부러 온 손님들이 고맙다 하셨다. 

빵집은 시장에 여름과일인 수박, 복숭아가 보이기 시작하면 비수기가 시작된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단감이 다시 시장에 보이기 시작하면 비수기가 끝나가는 거란다. 이 감철까지 지나가야 빵을 다시 먹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40년 넘게 시장통에 있으면서 체득한 삼춘 만의 방법이었다.

지금의 정옥제과는 김경자 삼춘에게 50여년 동안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자, 사별한 전 남편의 벗들이 모이는 곳이자, 명절이나 제사때 조상에게 정성을 다해 올릴 제물을 마련하러 오는 손님들의 공간이다. 두 딸들의 도움으로 정옥제과를 운영하고 지금의 남편과 함께 서귀포매일올레시장에 딱 하나 남은 빵집을 지켜가고 있다. 대목이 되면 15명의 손자들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손주들이 할머니네 빵집에 와서 빵을 포장한다고 여기 굴러다니고 저기 굴러다니며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며, 나이가 비슷한 손자들이 함께 여행도 가고 놀러가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단다.

손주들이 할머니네 빵집에 와서 빵을 포장한다고 여기 굴러다니고 저기 굴러다니며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며, 나이가 비슷한 손자들이 함께 여행도 가고 놀러가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단다. / 사진=김진경
손주들이 할머니네 빵집에 와서 빵을 포장한다고 여기 굴러다니고 저기 굴러다니며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며, 나이가 비슷한 손자들이 함께 여행도 가고 놀러가는 모습을 보니 행복하단다. / 사진=김진경
예술단활동은 삶의 활력소가 됐단다. 각종 대회도 나가고 상도 받으면서 지금껏 일만 하느라 빵집에서 갇혀 살았던 스트레스가 풀려 오히려 더 건강하고 즐겁게 빵집을 운영할 수 있다고. / 사진=김진경
예술단활동은 삶의 활력소가 됐단다. 각종 대회도 나가고 상도 받으면서 지금껏 일만 하느라 빵집에서 갇혀 살았던 스트레스가 풀려 오히려 더 건강하고 즐겁게 빵집을 운영할 수 있다고. / 사진=김진경

나이는 이제야 60대 초반이지만, 삼춘의 흔적은 빵집 안에 40여년이나 묻어있다. 사별한 전 남편의 빵 기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40년 째 특별한 기교나 변형 없이 그대로 빵을 만들고 있다. 삼춘에게도, 딸들에게도, 오래된 단골손님들께도 이 빵집은 특별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삼춘께 얼마나 더 빵집을 운영할거냐고 물었다.

“다행히 둘째 딸이 중간에 빵집을 봐 주고 있어서 난 그 시간에 서귀포문화원 소속으로 풍물도 배우고 무용도 배우다, 지금은 민속보존예술단 활동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밖에 잠깐 다녀오면 됐어. 그럼 다시 빵집으로 돌아와. 난 그럼 또 빵을 만들어서 채우면 되는 것이고. 지금부터 한 20년은 더 해야 하는데.”

십 여년 전부터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와 서귀포문화원 소속 예술단 활동을 시작했다. 빵집 문 밖에 시장 아케이드에 나와만 있어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데 예술단활동은 삶의 활력소가 됐단다. 각종 대회도 나가고 상도 받으면서 지금껏 일만 하느라 빵집에서 갇혀 살았던 스트레스가 풀려 오히려 더 건강하고 즐겁게 빵집을 운영할 수 있다고. 

나는 진심으로 김경자 삼춘이 정말 건강하게 오래오래 이 정옥제과를 운영해 주시길 바란다. 정옥제과는 삼춘만의 빵집이 아닌 이제 몇 안남은 서귀포 시내의 오래 된 빵집이자, 아직도 제주의 어르신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둘째 따님이 내게 말해주었다.

“저희 엄마는 이 일이 천직이에요. 빵이 다 팔리면 다시 또 빵을 만들 수 있다고 너무 행복해 하시거든요.”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였던 정옥제과, 온 가족에게 따뜻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nbsp;/&nbsp;&nbsp;ⓒ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명절이면 온 가족이 모였던 정옥제과, 온 가족에게 따뜻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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