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78) 아픔이란 무엇인가, 해비 카렐 지음, 박유진 옮김, 파이카, 2013.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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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규범주의

여러 해 동안 철학자들은 질병의 본질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어떤 철학자들은 질병이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구조나 기능의 이상일 뿐이며, 어떤 가치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폐렴이라는 질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이 폐에 침범하여 염증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기침과 가래, 발열 그리고 흉부 엑스선이나 혈액 검사에서 보이는 이상 소견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 이런 이상 소견은 우리가 통계적인 분석을 통해 미리 설정해 놓은 정상 범위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보통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이런 입장은 현대 의학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은 이렇게 되묻는다. 질병에 걸리면 괴롭고 고통스럽지 않은가? 질병에 걸리면 일상생활이 헝클어지고 주변 관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가? 또 어떤 질병에 걸리면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떻게 질병이 그저 생물학적 현상일 뿐인가? 이런 입장을 보통 ‘규범주의’라고 부른다. 규범주의자들은 질병을 가치 독립적인 자연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 질병에는 개인적, 사회·문화적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규범주의자들은 질병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문화적 관념 때문에 아픈 이들이 받게 되는 차별과 낙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둔다. 한센병이나 후천성 면역결핍증과 같은 감염병에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아픔 몸의 현상학이 중요한 이유

질병에는 가치가 담겨 있지 않다는 자연주의와 질병은 가치 함축적이라는 규범주의 사이에는 여전히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해비 카렐(Havi Carel)은 두 입장 모두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질병의 본질에 관해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로 질병을 앓는 사람의 목소리, 즉 질병에 관한 일인칭 관점이다. 카렐에 따르면 자연주의나 규범주의 모두 삼인칭 관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질병으로 인해 변화하는 신체적 경험이나 적응 과정 및 사회적 관계 변화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질병의 주관적인 측면이 소외되는 것이다.

따라서 카렐은 질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인칭 관점과 삼인칭 관점을 통합한 다른 입장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것은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철학적 접근법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현상학에서는 우리가 사물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경험 밖에 있는 것은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은 체험이나 감각으로 인식되는 대로의 사물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체험의 본질적 구조와 다양한 의미를 해명하는 것이 현상학의 목표이다. 

현상학에서는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바라보지 않는다. 특히 카렐은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생각을 빌어 인간 존재는 몸을 통해 지각되는 경험에 의해 구현되고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각을 통해 끊임없이 세계를 지각하는 몸이 있다는 뜻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육화된 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몸은 경험하는 동시에 경험되는 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체이자 객체인 독특한 존재이며, 주관적인 감정이나 생각, 감각의 원천이자 주관성과 의식이 깃든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질병에 걸리면 몸과 동떨어진 채로 질병을 경험할 수 없다. 아픈 몸이 곧 질병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인해 아픈 몸이 의식에 떠오르는 것은 생물학적인 몸과 체험되는 몸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는 끄떡없이 오를 수 있던 계단을 숨이 차서 못 오르게 될 때, 계단을 오르던 습관에 선(先)반성적으로 길들어 있는 체험되는 몸은 호흡 기능이 떨어진 폐라는 생물학적 몸과 충돌을 일으키고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균열로 인해 물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가 변화한다. 호흡곤란이 더 심해지면 언덕은 산이 되고 산책길은 마라톤 코스가 된다. 운동과 같은 취미 활동도 못 하고 친구들과 만나거나 직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조차 힘겨워진다. 아프게 되면 우리를 둘러싼 생활 세계가 변하고, 그 속에서 원활하게 활동하는 능력과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능력도 감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감소는 우리의 사회적 지위와 타인이 우리를 대우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제약에 노출시킨다. 

이처럼 질병은 우리의 신체적 존재로서의 본질과 세계 안에서 우리가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으로 체험되는 것이다. 현상학은 질병 체험의 본질과 다양한 의미를 포착함으로써, 질병의 자연적 사실과 규범적 사실 모두를 아우를 수 있게 하여 질병 이해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어떻게 아픔에 대처할 것인가?

카렐이 질병 체험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단지 철학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림프관평활근종증’이라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이기도 하다. 이 병은 신체 여러 기관을 침범할 수 있으며, 특히 폐를 침범하여 다수의 낭종을 형성하고 폐 기능 손상으로 호흡곤란과 객혈, 흉통 등이 나타날 수 있는 질환이다. 이 책에는 변해가는 아픈 몸으로 인해 그녀가 느끼게 되었던 괴로움, 곤란함, 두려움, 공포 및 좌절 등이 가득 담겨 있다. 그녀가 질병 앞에서 현상학이라는 무기를 꺼내 든 것은 질병이 초래하는 실존적 고통을 마주하고 철학적 성찰을 통해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부단히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찾은 해답은 이렇다. 첫째, ‘아픔 속의 건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픔 속의 건강’이란 1990년대에 만성 질환이나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에 대한 여러 현상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개념이다. 만성 질환이나 장애를 지닌 이들의 상당수가 자신의 건강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자신의 아픔을 불행이 아닌 자기 발견이나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는다고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강과 질병을 상호 배타적인 개념보다는 상호 얽혀있는 혼합체나 연속체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결과이다. 아프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통념을 뒤엎는 놀라운 발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긍정하는 것일까? 카렐에 의하면 그것은 아픔과 변화하는 몸에 대한 ‘적응력’과 ‘창조적인 반응’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 카렐은 점점 심해지는 호흡곤란에 적응하려고 오르막길을 피해 가게에 갈 수 있는 우회로를 찾았고, 계단을 오를 때는 적절하게 쉬었으며, 정원 가꾸기나 샤워처럼 일상적인 일을 할 때도 덜 서두르게 되었다. 또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을 만나고 아픔을 공유하는 새로운 활동에도 나서게 되었다. 질병으로 변화된 몸을 삶에 다시 통합하기 위해 변화된 몸을 인정하고 관용을 베풀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으려 한 것이다.

둘째, ‘현재를 살아가기’이다. 특히 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런 자세가 중요하다. 카렐은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에피쿠로스(Epicurus)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예로 든다. 두 철학자는 죽음에 관한 생각이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필멸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보았다. 죽음은 인간 존재를 결정짓는 본질이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죽음 이후의 삶을 경험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비존재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철학자 모두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감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질병 탓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카렐은 거기에 철학의 중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실존적 고통이라는 일인칭 관점에만 매몰되어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다. 그럴 때는 철학적 반성과 성찰이라는 삼인칭의 객관적 관점에서 질병과 죽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일인칭의 실존적 관점과 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아픈 몸의 현상학’의 역할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을 논리적 타당성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일로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철학은 삶을 살아 내는 방식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철학을 통해 현재를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질병을 앓는 모든 이에게 아픈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지혜를 건네기 위한 어느 환자-철학자의 가슴 따뜻한 말 걸기이자, 그런 아픈 이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에게 보내는 무거운 충고이기도 하다.  

지금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고민, 불안에 잠 못 드는 분들이 있다면 카렐의 이야기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길 기원한다. 

“생각이란 이리저리 흐르게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정신에 맞서 싸우는 것은 나쁜 전략이다. 그대로 흐르도록, 그대로 있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잠이 깨면 어둠 속에 조용히 누워 있다. 더 이상 겁먹지 않는다. 갖가지 생각이 마음속에서 맴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내 의식을 거쳐 쏟아지게 내버려 둔 다음, 마음속 공간을 비워 잠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사노라면 우리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 황임경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박사. 의철학, 의료인문학, 서사의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팬데믹,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공저), 《Body Talk in the Medical Humanities: Whose Language?》(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2》(공저), 《의학의 전환과 근대병원의 탄생》(공저), 《내러티브 연구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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