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4) 서문공설시장 고군자 어르신 ①

서문공설시장의 한 점포. 시장을 둘러보면 이 시장에는 유독 순대를 파는 곳이 많다. 그중 몇 년 전부터 내 눈에 들어온 한 순댓집. 끊임없이 단골처럼 보이는 손님들이 순대를 사는 것도 그렇거니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어르신에게 눈길이 갔다.

관광객처럼 보이는 20대 여성의 손님이 순대를 사고 있어서 나는 그 손님 분께 여행하러 오신 김에 오신 것인지 물었다.

“아뇨, 여긴 저희 부모님 때부터 좋아했던 곳이에요.”

반전처럼 돌아온 대답. 나는 그 여성분과 얼굴에 연신 미소를 잃지 않고 순대를 썰어서 포장하는 순댓집 어르신을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이 작은 순댓집에 유독 눈길이 갔던 것은 손님을 대하시는 어르신의 미소였다. 순대를 사러 온 손님에게 진심으로 지어주는 미소. 가식이 있거나 영업하기 위한 미소가 아니었다. 옅은 미소로 늘 손님에게 순대를 내어주시는 이 어르신의 순대를 사실 나도 예전부터 먹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맛있는 순대라며 서문시장에서 사 왔다는 순대를 전부터 줄곧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막상 이 순대가 어르신의 순대라는 사실은 작년에야 알았다.

올해 7월 더운 여름, 에어컨 하나 돌아가지 않는 시장통이지만 어르신의 순대를 사러 오는 손님들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어르신께 순댓집을 얼마나 하셨는지 여쭈었다.

“나 여기 순댓집은 1983년 시작했어. 하지만 스물다섯 살 때부터 이 식당하면서 순대를 만들기 시작했지. 왜 순댓집 하냐고? 내가 순대를 좋아하니까.”

친정엄마가 맛있는 순대라며 서문시장에서 사 왔다는 순대를 전부터 줄곧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막상 이 순대가 어르신의 순대라는 사실은 작년에야 알았다. / 사진=김진경
친정엄마가 맛있는 순대라며 서문시장에서 사 왔다는 순대를 전부터 줄곧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막상 이 순대가 어르신의 순대라는 사실은 작년에야 알았다. / 사진=김진경

1940년생이신 고군자 어르신은 구좌읍 평대리 출신이다. 5남 3녀 중 막내딸. 당시 평대리는 지금처럼 도로 포장도 되지 않았던 정말 ‘촌 중에 촌’이었다 했다. 어르신의 어머니는 해녀셨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여자 아이들은 해녀를 하는 것이 당연했단다. 어린 아이들도 ‘포래좀녀’라도 해야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어르신은 왠지 그렇게 일만 해야 하는 삶이 싫었다고 한다. 

“엿날 어머님들은 촌에서 넌 물질만 해라, 넌 검질만 해라. 이렇게 고라서. 그럼 당시에 나 생각에 그렇게 살면 그런 스타일밖에 안 돼. 어머니 해녀였으니까 바닷가 곁에는 아이들도 해녀를 해야 했어요. 왜 포래좀녀라고 하냐면 바닷가에서 퍼런거 먼저 좁으멍 물질 시작한다고 해서. 그런데 구좌읍 행동하고 시내 행동하고 차원이 틀려. 평대서는 우리가 클 때 일만하고 생활이 어려우니까 어머니가 영 일허라, 정 일허라 지시를 내렸지. ‘너 학교라도 해야 한다.’ 그런 말이 없어. 없는 부모에서 나민 부모 허란 하는 데서 해야지. 내가 당시에 공부를 못 배웠지게. 그렇다고 촌에서 물질이영 밭일이영 이것만 하멍 살기 싫은 거라. 그래서 촌 말고 시내로 왔어. 일하면서 기술 배우려고.”

어렸을 때 글 공부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 어르신은 바다건 밭이건 죽어라 농사만 해야 하는 촌의 생활보다는 시내에서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었던 갈망이 더 컸다. 다른 친구들은 숙명처럼 해녀 일을 했지만 어르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지만 15살에는 제주 시내로 와서 일을 다녔다고 한다. 처음 남문통의 바농질(바느질)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거의 한복을 입고 다녔던 시대였다. 

“내가 옷에 취미가 있어서 동문시장 백화점(지금의 주식회사 동문시장 건물) 있잖아. 그때는 호떡 대신 옷 진열했었던 곳이었주게. 천막 지서 노코 옷 팔아서. 봄 나면 참 예뻐. 그때 내가 19살일 거라. 봄인데 노란 카라 골덴에다가 장미꽃 리본이 가슴에 딱 도라매진게 얼마나 곱던지. 또 항아리치마 있어. 자주색 골덴기지로 해서 항아리. 그땐 다 단발로 해서 다녔던 때라. 그땐 다 양품집이었는데 지금은 호떡 팔아. 내 첫 직장은 남문통에 있었어. 근처에 병원 좀 나오면 사거리에는 다 빵집이 있었고 밀집되었어. 방송국까지.”

그렇게 제주 시내에서 일하다 동네의 갑장 친구들을 보니 3월에 몇 달 먹을 곡식들을 짊어지고 육지로 출가 물질을 다니고 있었다. 다녀온 친구들이 돈을 벌어와 시집 갈 돈도 벌고 집에도 보태는 것을 보았단다. 친구들이 돈을 벌어왔다고 자랑하니 막상 어르신도 출가 물질이란 것을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평대로 들어와 물질을 배웠다. 그렇게 친구들과 울산에서 2년, 구룡포 쪽에서 4년 정도 출가 물질을 하기는 했단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질하는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시내 나가서 기술이라도 하나 배우면 늙어서라도 써먹을 수 있을 건데.’

“1964년까지 출가 물질을 다니다 그만뒀어. 시내 나와 그네 본격적으로 바농질 기술 배우고 미싱 했지. 그렇게 내 생활 터전은 제주 시내였지. 스물다섯에 결혼하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이랑 나도 기술이 딱히 없으니까 조천에서 세탁소를 했어. 세탁소 왜 했냐고? 남편이 조천사름이라 조천에 시집을 오니까 세탁소가 하나밖에 없어서 내가 바농질 좀 배웠으니까 그렇게 했지. 그런데 잘 안됐어. 그래서 바로 식당을 하기로 했어. 엿날은 지금 막 식당 차림처럼 안되니까 판잣집 같은 곳에서 했지. 식당도 하고 옷도 줄여주기도 하고. 그런데 잘 안됐어. 그곳(조천)에서 내 생활 영업은 안 됐지.”

첫 가게였던 세탁소가 잘 안되고 어르신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물질을 다시 할 수도 없고 기술은 없고 고민하던 찰나에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이 워낙 좋아했던 순대 생각이 났다. 마을 잔치가 있을 때나 마을 사람들이 돗추렴을 할 때 어렸을 때부터 보기도 하고 만들기도 했던 순대. 그런 옛날부터 만들어왔던 제주식의 순대를 어르신은 참 좋아했단다. 좋아하는 순대를 해 보기로 결심하고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순대를 함께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고군자 어르신이 기억하는 나이 1965년 26살, 지금으로부터 58년 전 진경순대의 시작이었다.

좋아하는 순대를 해 보기로 결심하고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순대를 함께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고군자 어르신이 기억하는 나이 1965년 26살, 지금으로부터 58년 전 진경순대의 시작이었다. / 사진=김진경
좋아하는 순대를 해 보기로 결심하고 운영하시는 식당에서 순대를 함께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고군자 어르신이 기억하는 나이 1965년 26살, 지금으로부터 58년 전 진경순대의 시작이었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이 태어난 평대리는 메밀쌀이 좋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곤 쌀이라고도 말하는 산듸도 조금 갈았다 하셨다. 메밀 농사를 지을 때는 거름이 중요한데 평대에서 거름을 내는 방법은 돗거름보다는 멜거름을 좀 더 많이 사용했다. 메밀을 파종하는 시기는 평대에 멜들이 자주 들어오는 시기와도 겹쳤다. 

“걸름을 하젠 하민 역불(일부러)로 멜 싼 거를 빌레(너럭바위)에 말려. 멜 들어오면 족바지(뜰채)로 다 거러다가 멜이 넘치니까 웃듸다(윗 쪽) 빌레에 말려. 말린 멜에 불치, 음…, 곡식 캐당 나무에다 불 쏘망 때난 거. 불치랑 메밀쌀이영 섞어. 그렇게 혼합한 거를 촐바구니 방수거리멍 바티 떨어뜨려. 그렇게 우린 멜거름 섞으며 씨 뿌려서. 지금은 그냥 메밀씨만 밭에 착착 뿌리대? 우리는 그렇게 안 해나서. 보통 음력 7월에 메밀 심고 동지 섣달에 쌀 비어. 메밀이 아주 새까맣게 익을 때까지 둔 후에 비는데 지금은 메밀이 벌겅 해. 많이 익히지 않으니까. 게난 우리 때 메밀 맛하고 지금 메밀 맛이 달라. 안 구수해. 엿날 메밀가루 맛이 아니라. 바짝 익혀서 먹어야 메밀이 고소한 맛이 나.”

고군자 어르신이 전하는 옛날 평대리의 순대는 이 까맣게 바짝 익혀 수확한 메밀을 넣었기 때문에 지금의 맛과는 다르다고 하셨다. 육지는 어떻게 순대를 만드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 마을의 순대 만드는 방법은 정확히 알고 계시다며 메밀과 보리를 잘 갈아서 혼합을 한 후 돼지피에 섞어서 콥대산이(마늘)만 넣고 돼지 창자에 넣어서 끓는 물에 삶는다고 하셨다. 나중에야 양파, 대파, 생강도 넣어서 만들었지 어르신의 제주 순대는 오로지 마늘만 넣어서 냄새를 잡았다고 한다. 대파나 생강도 어르신께는 오늘날에 이르러 만난 채소였다. 돼지피도 마을에서 추렴을 하기 때문에 갓 나온 신선한 피로 바로 만든거라 지금 순대를 만들지만 옛날 맛이 안난단다. 어르신이 말씀하는 옛날 전통방식의 제주식 피순대. 이것이 바로 제주 전통 방식의 돗수애였다. 

“옛날 우리 마을에서 만든 순대는 지금 순대처럼 쫀득쫀득하지 않아도 맛있었어. 지금 별 거 다 놔도 엿날 그 맛 잘 찾아보지 못해. 우리 조카가 지금은 서울 사는데 나한테도 이야기 해. ‘이모님 옛날 순대 맛이 안 납니다.’ 암튼 엿날에는 검은 돼지 잡았잖아. 그 돼지가 그렇게 맛있었어. 순대도. 지금은 엿날 그런 식이 없으니까. 그런식이.”

돼지피도 마을에서 추렴을 하기 때문에 갓 나온 신선한 피로 바로 만든거라 지금 순대를 만들지만 옛날 맛이 안난단다. 어르신이 말씀하는 옛날 전통방식의 제주식 피순대. 이것이 바로 제주 전통 방식의 돗수애였다. / 사진=김진경
돼지피도 마을에서 추렴을 하기 때문에 갓 나온 신선한 피로 바로 만든거라 지금 순대를 만들지만 옛날 맛이 안난단다. 어르신이 말씀하는 옛날 전통방식의 제주식 피순대. 이것이 바로 제주 전통 방식의 돗수애였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께서는 조천에서부터 식당을 하며 알음알음 순대를 만들어 팔다가 1969년 서문시장으로 식당을 열며 본격적으로 시장에 터를 잡으셨다. 변변찮은 벌이도 없는데 시내 와서 살기로 결심했고 그래도 빚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 철학이자 가치관이었던 어르신은 시장에서 가게를 연 후 시장이 쉬는 명절 날만 빼고는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문을 여셨다. 그러다 어르신의 순대가 인기가 많아지고 순대를 찾는 단골손님들이 늘어나면서 1983년 순대집을 다시 개업하셨다. 

바로 ‘진경순대.’ 나와 이름이 같고 나이도 비슷한 순대집. 나는 어르신께 큰 딸 이름이 진경이냐고 물었다. 어르신이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시며 대답하셨다.

“아니 우리 큰아들 이름이 진경이야.”

또다시 반전처럼 돌아온 대답. 현재 진경순대는 영업 개시 후 40년이 됐다. 사실 진경순대의 전신이었던 식당에서부터 세어온다면 58년이 되는 곳이다. 지금 파는 이 순대의 비결은 누구의 도움도, 기술 값을 사지 않고 오로지 어르신의 세월과 손끝에서 만들어 내셨다. 인터뷰하는 내내 끊임없이 순대를 사러 오는 손님들. 20대 손님부터 70대 손님까지 대부분 단골손님인 듯했다. 

나는 어르신이 살아오신 83년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순대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께서 유독 좋아했던 음식인 순대로 시작한 인생. 현재는 자식들과 함께 운영하는 진경순대의 히스토리를 더 여쭸다. 어르신이 만드는 순대에는 어떤 특별한 비법이 있어서 손님들이 끊임없이 오시는 걸까?

충분히 고단했을 시간을 이야기해 주시는 왜 자꾸 반짝반짝 빛이 났을까요? 인터뷰 내내 삼촌 매력에 흠쩍 빠져버렸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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