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오류로 점철된 미군정, 4‧3에 대해선 정상? / 이규배 논설위원

‘소리시선’(視線) 코너는 말 그대로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입장과 지향점을 녹여낸 칼럼란입니다. 논설위원들이 집필하는 ‘사설(社說)’ 성격의 칼럼으로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주요 현안에 따라 수요일 외에도 비정기 게재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왼쪽)은 5.10선거가 무산된 직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을 임명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왼쪽)은 5.10선거가 무산된 직후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을 임명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모든 인간이 그러듯이,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력도 얼마나 많은 오해와 오인, 오류를 범할까? 그리고 그로 인해 치러야했던 막대한 손실과 희생들, 저울이 있다면 그 끔찍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해방 3년 남한사회에서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압도적이고 고도의 정보수집과 분석능력을 가졌지만, 그런 오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치러야 했던 무고한 희생은 적지 않았다. 그것도 미군이 남한으로 진주하는 첫날부터 발생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진주 초기 미군정의 오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첫날(1945.9.7), 당시의 풍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인들이 미군의 상륙을 축하하기 위하여 인천에서 환영 행렬을 했을 때, 일본인은 이에 대하여 발포했던 것이다. … 사실인 즉 당시 미군장교들은 이와 같은 일본인의 행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시가행진은 미군의 상륙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오해했었다.” 어느 미국 언론인이 전하는 이 사건은 미군정과 한국의 첫 만남에서 일어난 장면이기도 하다. 미군정의 ‘오해’는 이렇게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남한 진주로부터 한 달이 지나는 시점에서 미군정 사령관(하지)의 정치고문(베닝호프)은 소련이 남한에 공산주의 정치사상을 보급하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고, 서울에서 발생한 시가행진이나 시위는 “공산주의의 사주를 받았던 것임이 확인”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정작 하지 사령관은 “시가행진이나 시위도 거의 없었고 항의소동도 거의 없었습니다.”고 보고한다. 오히려 하지는 “이 나라는 … 미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편”이라고까지 보고하고 있으며, 게다가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의심이나 확신은 품고 있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보고한다. 남한 정세에 대해 분명 미군정 고위 관계자의 어느 한쪽은 오인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미군정의 오류는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한에 대한 미군정의 무지

당시 평범한 미국인들 중에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조금이나마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미군정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한 마디로 미군정은 남한사회에 무지했다. 미국은 주적이었던 독일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상세정보를 입수하고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으나, 한국은 그럴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미군정 관계자의 푸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 임무에 관한 보고서는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고 보고서의 기초 하에 이용할 만한 정보도 거의 없었다.” 때문에 미국의 한 언론인이 기록하고 있듯이, “해방한 정복자는 한국인의 역사와 성격에 무지하였다.”는 것이 진실이었다.

이처럼 미군정에게 남한은 어떤 지식이나 정보도 없고 준비도 없었던 매우 낯선 ‘걸리버 여행기’ 속의 나라였던 셈이다. 미군정 초기의 오해나 오인들은 필경에는 여기서 비롯된 것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오류들이 결코 초기에만 일어난 일시적이거나, 서울이라는 특정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제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4‧3 이전 미군정의 오인과 해프닝

1947년 6월, 제주여중에서 동맹휴교가 발생한다. 이에 접한 미군정 정보당국(971방첩대)은 화들짝 놀란 듯, “아직까지 정치적 의미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모호하게나마 ‘빨간’ 색채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념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일본에 있던 미극동군사령부 정보당국은 “어떠한 정치적인 연계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파시즘에 반대하는 익숙한 주장”이라며 더 노골적이다.

그러나 동맹휴교의 목적이 순수한 교육의 문제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빨간 색채’니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이니에 대한 의구심은 “다른 정치적 의도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거나 “어떠한 정치적인 관련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맥없이 마무리된다. 결국 과도한 의심에서 비롯된 이 오인사건은 해프닝으로 종결된다. 하마터면 제주의 여중생들이 그물로 잡혀가 무고한 희생을 치를 뻔한 사건이었다.

1947년 말에 발생했던 기자 간첩사건도 이와 유사한 해프닝이었다. 미 정보당국(971방첩대)은 모처의 교회 인사로부터 “좌익 선동가이며 간첩일 가능성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민중일보 기자(이수한)를 체포한다. 정보당국은 심문 결과, 그가 남로당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혐의를 잡게 되며, 심문은 꽤나 시간을 들여 해를 넘기면서까지 진행된다. 그러나 간첩이라는 제보의 단서는 서북청년단 제주도위원장으로부터 나왔음이 밝혀지고, 극좌인물이라는 혐의는 입증이 되지 않는다. 이 사건 또한 해프닝으로 종결되지만, 미 정보당국이 민간의 불확실한 제보에 얼마나 취약하게 휘둘림을 당했는지를 보여준다.

4‧3 이후 미군정의 오인과 오류

이런 미군정의 오인 해프닝은 4‧3 직후인 1948년 5월에도 발생한다. 그것도 민간인이 아닌 국방경비대원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이다. 미 정보당국이 입수한 내용은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장교가 탈영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정보보고서는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제5연대 장교 3명이 탈영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것은 무능하다는 이유로 대대장을 해임한 결과로 믿어진다.”는 내용이었다. 

꽤나 ‘객관적’인 듯한 ‘심증’을 토대로 하는 보고서였다. 4‧3이라는 급변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던 만큼, 이 정보보고의 파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보는 불과 이틀 뒤에 그 진실이 밝혀진다. 이들 장교는 탈영을 한 것이 아니라, 인사명령을 받고 육지로 떠난 것이었다. 결국 “장교 3명의 탈영사건에 대한 보고는 부정확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런 허술한 정보가 미 정보당국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군정의 오류가 다종다양한 경로를 거쳐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높은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4‧3과 관련된 숱한 미군정의 정보 중에도 이런 오류를 낳는 불량한 정보들이 꽤나 혼재되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미군정 관계자들의 제주사태에 대한 인식과 판단은 일관성 없이 시종 요동친다. 때로는 희극적이기도 하다.

일례로, 봉기 이후인 1948년 7월에 미 정보당국은 제주도 근방에서 “붉은기를 달고 있는 북한선박 1척”을 억류했는데, “실탄 2만3000발, 99식 소총 여러 정과 기관총 12정을 발견”했다는 위중한 보고를 올린다. 무장봉기 이후인 탓에 이 보고는 사안의 심각성에 비추어 요로의 주목을 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틀 후에 미 정보당국은 “지난번의 보고는 부정확했다.”고 실토한다. 이들이 단정한 “붉은기를 달고 있는 북한선박”은 실제로는 민간의 배였으며, 게다가 그들이 발견했다는 ‘어마어마한’ 무기들은 잠수부들이 바다에서 건져낸 ‘일본군 탄약’과 ‘시장에 내다 팔 놋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희극적인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미 정보당국이 퍼나른 북한‧소련의 괴선박‧괴잠수함과 관련된 정보들은 엄청난 사건인 듯이 신문에서도 보도되고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거창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를 확증하는 미 정보당국의 후속보고도 없고, 때로는 오보로 알려진다.

『주한미군사』(미군정의 공식 역사서)가 제주 연안에 출몰했던 소련 선박에 대해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러시아 선박에 승선한 사람들이 제주도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을 시도했을 가능성은 있다.”는 기록이나, 미 정보당국은 이런저런 의혹을 제기하고 있었지만 정작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이고, 오로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뿐이다.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이런 해프닝은 발생한다. 미 정보당국은 “정체불명의 전투기 유형의 항공기 6대”가 “제주도에 근접”하고 있다는 관측내용을 보고(1948.11)한다. 게다가 그 전에도 “4발 엔진 폭격기”가 “제주도를 선회”하다가 “동쪽 방향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미 정보당국은 친절하게도(?) “소련 비행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적인 논평까지 달아둔다.

괴비행체가 마치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제주 상공에 머물다 간 것 같은 ‘빨간 색채’ 뉘앙스의 정보보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비행기는 미군기였다. 이 괴비행체 소동도 결국은 해프닝으로 끝난 명백한 오인이었다.

가끔씩 제주의 바다에서나 하늘에서 일어난 일들은 이런 유형의 오보들이었다. 그렇다면 빈번하게 사건이 발생하던 지상에서는 이에 비해 얼마나 많은 오인들이 있었겠는가? 어느 언론인이 전하는 바처럼, 그 오인의 실상은 매우 포괄적이다.

“중공군이 잠입했느니 일본 공산당원이 들어 있느니 북조선 인민군 간부가 무전기로 지휘하고 있느니 한라산 폭도들에 대한 억측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정작 확인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들의 교묘한 전술만이 화제와 더불어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뿐.”

때문에 이런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북조선이니 팔로군의 원조와 지휘를 받느니 하던 초기의 풍문은 허설이 되어가고 있다. … 외부에서 무기공급을 받는다는 것도 소문이 되고 말았다.”

제주의 미군정을 되돌아보는 까닭

이처럼 대략만 보더라도 미군정이 범한 오류는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제주 섬의 누군가는 두려워하며 고통을 당하고, 누군가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 것이다. 과연 제주인이 치러야했던 과도한 죽음과 희생이 이런 미군정의 오류와 무관했겠는가? 

자연스레 미국의 책임문제에 생각이 미치는 이유이기도 하며, 새삼 제주 미군정을 되돌아보며 이 글을 쓰는 까닭이기도 하다. / 이규배 논설위원, 전 제주4.3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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