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5) 제주동문시장 박동례 어르신 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에서 땀줄기가 흐르는 끈적끈적하고 무더운 여름, 한여름의 공기는 마치 한증막에 앉아 있는 것같이 숨이 턱 막힌다. 시원한 쉰다리 한 잔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계절, 나는 쉰다리에 쓸 누룩을 사러 4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다니던 단골집으로 향했다.

제주 최초 백화점식 시장인 주식회사 동문시장과 동천마트 사이로 호떡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너무 더운 시기라 그런지 잠시 문을 닫고 있는 포장마차가 훨씬 많았다. 과거에는 호떡이나 빙떡이 아닌 패션 잡화들을 파는 골목이었다. 

나의 단골 누룩 집 진생쌀상회. 동문시장에서 자리 잡은 지 30년 된 쌀집이다. / 사진=김진경<br>
나의 단골 누룩 집 진생쌀상회. 동문시장에서 자리 잡은 지 30년 된 쌀집이다. / 사진=김진경

동문재래시장으로 들어가는 1번 게이트. 소위 말하는 호떡 골목이라 불리는 곳으로 100m 남짓 들어가면 작은 네 갈래 길이 나오고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오래된 쌀집이 두어 개 있다. 내가 늘 가는 곳은 그 쌀집 중 하나. 4년 전 내 마음에 쏙 드는 누룩을 발견해서 지금껏 이곳 누룩만 쓴다.

그 이유는 쌀집 어머니가 직접 누룩 방에서 만드시는 누룩이 쉰다리를 만들 때 확실히 힘이 좋고 실패가 거의 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상인들이 파는 누룩보다는 가격이 훨씬 있는 편이지만 누룩의 향도 향긋하고 누룩의 힘도 균일하다. 

나의 단골 누룩 집 진생쌀상회. 동문시장에서 자리 잡은 지 30년 된 쌀집이다.

다른 상인들이 파는 누룩보다는 가격이 훨씬 있는 편이지만, 진생쌀상회 누룩은 향긋하고 힘도 균일하다. / 사진=김진경<br>
다른 상인들이 파는 누룩보다는 가격이 훨씬 있는 편이지만, 진생쌀상회 누룩은 향긋하고 힘도 균일하다. / 사진=김진경

진생쌀상회의 박동례 어르신은 1952년생으로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시다.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어르신은 둘째 딸이라 살림에 손을 보태며 어린 시절을 다 보냈다고 회상하셨다.

“나는 아들 둘 딸 다섯 중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그때는 우리 마을 사람들 대부분 다 농사지으셨어요. 검질 나무 해 그네 이어다가 나무 떼었잖아. 나무를 산에서 해 와 불 때고. 나무를 머리에 이어서 시장 가서 팔았지. 새벽에 일어나서 나가고, 그렇게 가족이 농사지은 걸로 밥 먹었어. 옛날엔 다 촌이어서 해남 마산면 사람들은 거의 보리밥으로 밥 먹었지. 쌀농사도 많이 짓는데 쌀농사는 많이 못 했어. 농사가 잘 안되고 힘들고 해서. 초등학교는 다들 잘 못 다니던 시기였지. 나는 둘째 딸이라 동생들을 봐야 부모님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그땐 부모 말 안 들으면 큰일이 나는 시기였어.”

그렇게 고향에서 살다 마을 어른들끼리 혼담 이야기가 오가고 22살, 1973년 중매로 마을분과 혼인했다. 남편은 제주에서 회사에 다니고 계셔 제주에 있었다. 당시 제주에서는 환금작물로 한창 감귤 산업이 발전해가고 있는 시기였다. 남편분은 과수원의 돌담과 산담 등을 쌓아주는 회사에 다녔다.

“아기 아빠가 여기서 일하니까, 과수원 돌담 쌓아주는 일이랑 산담도 쌓고. 그때 당시 제주에 과수원이 막 생기기 시작했을 때라고 했어. 과수원마다 돌담을 쌓아주면 주는 돈은 조금씩 달랐어. 집집마다 집안 사정에 따라 주는 돈이 조금씩 달랐다고 들었어. 내가 22살, 남편은 27살에 결혼했는데 그때 이것저것 서로 오가지도 않았어. 목걸이 반지 서 돈이나 해 준 것이 고작이지. 우리 땐 다 그랬어. 그때 나락(쌀)이 가마니로 하나 하면 2100원 할 때거든? 그때 금도 한 돈에 2100원이었어. 석 돈이면 6300원. 금 서 돈인가 해줬어. 옛날이 그랬어. 그렇게 결혼식 올리고 3일인가 5일 만에 바로 제주도 왔지. 그때 당시에 비행기가 어딨어? 완도에서 안성호 타고 제주 내려왔지.”

혼인하고 시부모님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다 같이 제주로 이주해오셨다 한다. 처음 제주 와서 정착한 곳은 삼양일동. 당시 삼양일동은 대부분 제주의 전통가옥 형식인 초가집이었다고. 남편분이 처음 얻어놓은 집은 그 마을에서 유일한 슬래브 지붕이 덮인 이층 나무집이었다. 그때는 애들 아빠가 돈을 좀 잘 벌었던 시기라 아래층은 동서와 시부모님이 살고 위층에서는 부부 내외가 살았다.

아들들을 낳고 키우느라 어르신은 일을 따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남편분이 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이었다. 제주에서의 정착은 쉽지 않았다. 남편의 벌이만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매번 편차가 다르다 보니 처음 내려왔을 때 살았던 집에서 얼마 있지 않아 이사했다. 그래도 고생고생하면서 번 돈으로 육지에 땅을 조금 사셨다. 도련에도 1500평(약 4,958.6㎡) 정도 되는 과수원을 사고 도련으로 다시 이사했다. 시부모님이 주로 과수원을 도맡아 하셨고 어르신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거들었다.

남편분은 돌담 쌓는 일을 하다가 일이 점점 줄자 과수원에서 사용하는 감귤 상자를 짜 주는 일도 하셨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노란 컨테이너가 아닌 나무로 상자를 짰다. 육지를 왔다 갔다 하며 열심히 사셨지만, 아이들도 커 가고 돈 나갈 일은 줄줄이 섰다. 사 둔 땅은 오를 생각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맡아서 하시는 과수원도 첫 해부터 바로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집에 현금이 돌지 않으니 어르신은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아기 아빠가 아는 선과장이 있어 파치 귤을 받을 수 있었어. 그럼 그걸 시외버스로 태워주면 나는 여기서 받아서 노점 장사했어. 옛날 조흥은행 김약국 앞에 있지. 지금은 편의점일 거야. 거기서 노점 장사했지. 리어카 끌어놓고. 그때 우리 막내가 태어나서 금방이니까. 아기 업고 다녔어. 추우면 담요 폭 덮어주고 업고 그렇게 팔았어. 여기 바닷바람이니까 겨울바람 막 불면 아기 양쪽 볼이 퍼래질 정도로 추웠어. 그렇게 막내아들 업어가며 파치 갖고 와서 팔면 하루에 그때 만 얼마 벌어갔어. 우리 막내가 82년생이니까 그때 일 관에 파치를 사천 원 정도 떼 와서 팔았거든. 애기 업고 장사를 계속하고 일해서 벌면 그걸로 식구들 먹고 애들 공부하는데 써야 하고. 그래도 육지에 사둔 땅이랑 도련 과수원 팔아서 화북에 집 사서 그래도 내 집은 마련할 수 있었어.”

집은 집이고 박동례 어르신은 장사를 접을 수 없었단다. 감귤 철이 지나고 딸기철이 돌아오면 딸기를 가져다가 팔았다. 자리 텃새가 있어 김약국 자리 말고 저기 나가서 팔라며 저울도 가져가 버리기도 했다. 지금 동문시장 안 제주은행과 농협 사이로 밀렸는데 당시에 그쪽이 가장 손님이 적게 오고 칼바람이 부는 곳이었단다. 생각해보니 그때 정말 추웠는데 막내까지 업고 같이 고생시킨 것이 너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단다. 딸기철은 한 사십 여일인데 그 밭에 나는 딸기를 책임지고 다 팔아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밥 한술 뜨고 시장에 나와 딸기가 다 팔릴 때까지 있었다. 밭주인과 한 약속은 꼭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사과, 배처럼 과일도 갖다 팔았어. 아침에 버스로 여기 오면 비나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나와야지. 손발이 다 아프고 붓고. 서 있으니까 손발이 너무 춥지. 진짜 제주은행 앞에 이상하게 제일 추웠어.”

그러다 지금의 진생쌀상회에 자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쌀장사를 하시게 됐다. 언제부터 쌀집을 시작하게 됐는지 여쭈었더니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안 하는데 확실한 것은 쌀집 하게 된 첫해가 큰아들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는 것이었다. 가게 문을 열어야 하니까 어르신 내외는 학교로 가지 못했고 큰아들이 꽃다발을 들고 가게로 와서 졸업식 잘 치르고 왔다고 한 것만 확실히 기억난다고 하셨다.

큰아들의 졸업식에 가 보지 못하는 상황의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큰아들에 대해 미안함이 어르신의 목소리의 떨림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큰아들이 1974년도 생이니까 아마도 1982년 동문시장에서 십여 년 가까이 노점 장사를 하시다가 1993년에 진생쌀상회를 하신 것 같았다. 어르신의 동문시장에서의 역사는 사십여 년이 넘었고, 진생쌀상회는 삼십여 년을 넘겼다.

어르신의 동문시장에서의 역사는 사십여 년이 넘었고, 진생쌀상회는 삼십여 년을 넘겼다. / 사진=김진경<br>
어르신의 동문시장에서의 역사는 사십여 년이 넘었고, 진생쌀상회는 삼십여 년을 넘겼다. / 사진=김진경

“제주에 와서 가장 신기했던 제주말은 제사 때 사람들이 ‘곤밥, 곤밥’ 이렇게 하는 거. 곤밥곤밥 저것이 무엇인고. 나중에 곤밥이 쌀밥인 걸 알았을 때 신기했어. 그때는 해남에서도 쌀밥보다 보리밥을 많이 먹었지. 우리도 하얀 쌀밥은 제사 때 먹으니까 쌀밥이 그냥 쌀밥인 거지 곤밥이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감수과? 고라분다? 이런 말도 처음엔 우리나라 말인가 싶을 정도로 신기했어.”

전라도 억양이 묻어있지만 박동례 어르신도 제주말을 쓰고 계시다. 22살에 제주로 와 50년 가까이 제주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자연스레 삶에서 체득한 언어이다. 인터뷰하던 그 날, 어르신께 오늘은 식사로 무엇을 드셨는지 여쭤보았다. 수줍게 웃으며 숟가락 하나 덩그러니 담긴 흰 사발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나 우미냉국. 내가 작업한 우미냉국은 냄새 안 나. 내가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흘 동안 직접 작업한 우미는 냄새가 안 나고 떼 와서 파는 것과는 맛이 완전 다르거든. 그래서 우리 가게 우미(말린 우뭇가사리)만 사러 오는 단골들이 많아. 한번 먹어볼래?”

어르신이 차려주는 근사한 밥상이 뚝딱 차려졌다. 좌판에는 깔리지 않는 어르신이 드시려고 갈았다는 검은깨와 검은콩, 잡곡이 가득 들어간 콩개역을 우무묵 위에 가득 올려주셨다. 너무 고소하고 맛있어 “이건 왜 안 파냐, 저 팔아달라” 했더니 검은깨 진짜 많이 들어가서 비싸서 안 팔린다고, 너무 비싸서 못판다 하셨다. 그냥 어르신이 식사대용으로 드시려고 만드신 거라 했다. 차가운 우무묵에 고소한 콩개역을 올린 한 끼. 이 제주식 우미냉국이 어르신의 식사였다. 칼로리가 없는 우무묵을 가득 넣고 콩개역 올려 먹으면 뜨거운 속이 시원하게 내려간다고.

차가운 우무묵에 고소한 콩개역을 올린 한 끼. 이 제주식 우미냉국이 어르신의 식사였다. / 사진=김진경<br>
차가운 우무묵에 고소한 콩개역을 올린 한 끼. 이 제주식 우미냉국이 어르신의 식사였다. / 사진=김진경

제주 사람들이 한 여름철에 먹는 우미냉국. 바다에 나는 해초인 생우뭇가사리도, 이 해초를 작업하며 말린 우뭇가사리도, 이 말린 우뭇가사리로 묵을 쑨 우무묵도 머두 제주에서는 모두 우미라 부른다. 우리가 아는 양갱을 만드는 재료인 한천의 재료가 바로 제주에서 우미라 불리는 우뭇가사리다. 간혹 한자어인 천초(天草)도 통용해서 부르기도 한다.

동문시장 안의 진생쌀상회는 아주 조그마한 상점이다. 요즘은 쾌적한 대형마트에 웬만한 식료품은 다 있어서 나는 어르신이 소일거리 정도로 시장에 나와 계실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너무 바쁘다고 했다. 특히 한여름에는 우미와 누룩이 많이 팔린단다.(쌀집이기 때문에 우무묵은 안 판다. 말린 우뭇가사리만 판다) 내가 누룩을 사러 가려고 한 날도 만들어 둔 누룩이 다 팔려 새롭게 누룩을 만드신다고 밑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마 제주의 제철 여름 음식인 우미냉국과 쉰다리를 만들기 위해 방문하는 손님들이 많아서 우미와 누룩을 많이 찾으시는 듯 했다. 나도 단골로 쓰는 어르신의 누룩은 이미 누룩의 질이 좋기로 입소문이 났는지 삼성혈 대제 때 올리는 오메기술도 어르신의 누룩을 쓰신다고 알려주셨다.

어르신은 건강하게 오랫동안 일하기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꼭 수영장을 아침에 다녀오신다. 군살 하나 없는 뱃살의 이유는 꾸준히 걷고 수영하고 단순하고 건강하게 먹는 식습관을 이야기하셨다. 어르신의 아침 기상 시간은 새벽 3시 반. 4시에는 반드시 집에서 나온다. 그러고 저녁까지 시장에 계신다. 수영하는 시간이 어르신에게 너무 소중하고 활력을 주는 시간이었다.

1993년에 시작한 진생쌀상회. 제주에서 두 개의 공장을 가진 제법 규모가 있는 기업과도 관련이 있다. 제주 토종 마트 중 규모가 있는 마트를 방문해 본다면 진생영농조합법인의 제품들이 진열대에 전시돼 있다. 더운 시장 안, 꿉꿉한 습도에 박동례 어르신이 만들어주신 우미냉국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다시 인터뷰를 이어갔다.

사우나는 운동이 안돼서 수영장이 좋다며 자유형과 배영 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운동이 삼촌의 긍정 에너지 비법이었나 봅니다.&nbsp;&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사우나는 운동이 안돼서 수영장이 좋다며 자유형과 배영 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운동이 삼촌의 긍정 에너지 비법이었나 봅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