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5) 제주동문시장 박동례 어르신 ②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업고 동문시장에서 노점상을 시작한 박동례 어르신(1952년생).아무 연고 없이 제주로 내려와 장사하려니 수완도 없었고 어린 아들을 안고 다니며 장사해서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단다.

사실 고생하는 것은 그 시절 누구나 그렇게 살았던 세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유독 살을 베이는 것 같은 제주의 칼바람 추위는 어르신에게 고역이었다. 추위에 몇 년 동안 무방비로 있어 그런지 그때 골병이 든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몇 년 후 시장 안에 슈퍼마켓이 들어왔다. 슈퍼마켓에 진열된 과일은 어르신이 노점상에서 파는 과일의 종류보다 훨씬 많고 쾌적한 공간에서 가지런히 진열돼 손님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어르신의 과일을 찾는 손님들은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발만 동동 굴리며 걱정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마침 동문시장 안에 점포 자리가 하나 나왔다는 이야기를 남편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권리금 1500만원을 마련했고 드디어 노점 생활을 청산하고 점포 안으로 들어왔다. 1982년에 태어난 막내아들을 안고 노점 장사를 시작한 지 8년이 지난 후 마련한 내 점포였다. 

진생쌀상회와 진생가루공장은 같이 붙어있다. / 사진=김진경
진생쌀상회와 진생가루공장은 같이 붙어있다. / 사진=김진경

“처음엔 쌀장사했어. 쌀이 가장 기본으로 먹는 거니까 잘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쌀장사가 생각보다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은 몰랐지. 갓 문 열었을 때니까. 30년 전에는 쌀 40킬로에 6만5천원에 받아왔거든. 그런데 지금은 12만원이야. 지금 물가에 비하면 안 오른 거야. 사람들이 쌀 안 먹으니까. 쌀 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잡곡류) 안 먹어. 그리고 쌀 한 포대가 또 얼마나 무거운지 그거 들고 하면 골병들어. 손님들은 좋은 쌀 싸게 가지고 와도 비싸네, 싸네 이러니까 처음엔 어떻게 장사해야 할지 몰라 애먹었어.”

제주 사람들은 날이 더워지면 어르신의 가게에서 특히 누룩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남편 분께 누룩을 받아와달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누룩을 사간 후 누룩이 잘 안된다며 항의가 많이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누룩을 만드는 재료들은 진생쌀상회에 넘쳐났다. 재료도 있는데 내가 만들어 팔면 더 남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편은 왜 일을 만드냐고 그냥 받아서 팔자고 했지만 어렸을 적 기억에 친정어머니가 집에서 누룩을 만들었던 기억도 생생히 났다. 

“그때 처음에는 틀도 없고 주먹으로 꽉꽉 쥐어서 팔아봤어. 틀은 나중에 공장에 부탁해 맞춰서 2만 원에 맞췄고, 그때부터 누룩 만들었어. 친정엄마가 옛날에도 보리쌀, 찹쌀 물 담가서 찐 다음에 누룩 넣어서 막걸리를 담아서 짜 주면 그게 그렇게 맛있더라고. 끓이니까 요플레 돼서 더 맛있고. 아, 이게 그럼 제주 사람들이 먹는 쉰다리도 되겠구나 싶어서 누룩 만들어서 팔기로 했어. 우리 친정도 농사하니까 술을 자주 담더라고. 누룩을 어떻게 만들었더라? 밀로 만드는구나. 조그만 틀에다 밀 갈아놓은 거 넣고 발로 밟아서 짚에 띄워서 누룩 만드는 그것을 자주 봤었어. 그 누룩으로 만든 술 엄청 맛있었는데 중국산 밀로 나는 쓰기 싫었어. 엄마가 하던 방식대로 제주 밀로 누룩 만들어서 팔았어. 그때 누룩 하나에 다른 곳은 오백 원이었어. 그런데 나는 천 원에 팔았지.”

친정엄마가 누룩을 만들었던 기억을 떠올려봤더니 박동례 어르신이 만든 누룩은 좋은 밀이어야 했다. 그래서 처음 누룩을 만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제주 밀을 이용해 누룩을 만들어 팔고 계시다. 제주에 밀 농사를 하는 곳이 있어서 현재는 그 농가와 계약 재배를 하고 그 밀을 갈아 누룩을 만드신다. 누룩의 힘은 균일하고 술이나 쉰다리를 만들 때도 맛이 좋아 어르신의 누룩을 찾는 단골이 많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지만 여전히 누룩을 직접 만들고 계신다.

“이번에 만든 누룩은 찹쌀을 살짝 놔야 술이 더 맛있어지는 것 같아서 밀이랑 찹쌀 같이 불렸거든. 그런데 내가 눈이 나빠서인지 몰라도 찹쌀 불린 줄 알았는데 메밀쌀을 불린 거라. 찹쌀보다 더 비싼 쌀인데 어쩌겠어. 그렇다고 누룩값을 막 올릴 수도 없어. 여기에 팥 껍질 날리고 같이 넣어서 누룩 만들었어. 이렇게 만든 누룩은 손님들이 막 좋아해. 일 년에 삼백 개 정도 만드는 것 같은데 코로나 터지기 전에 일본 사람들이 누룩 많이 사 갔었어. 신기하지? 일본에도 누룩이 있을 텐데 꼭 와서 사 가는 거 보면. 저기 삼성혈에서도 한 해에 세 네 번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 꼭 오메기술을 빚어. 오메기술 할 때 매번 우리 누룩 사러 오더라고.”

처음엔 잡곡류만 갖다 놓고 팔았다 손님들이 고사리를 찾으니까 고사리를 갖다 뒀다. 고사리가 좌판에 깔리니 이어 톳을 찾았다. 그렇게 건 취나물, 우미. 청각. 하나하나 좌판에 깔리는 품목이 늘어났다. 좌판에 깔리는 상품들은 모두 어르신이 직접 보고 질이 좋은 것만 가지고 온다고 하셨다. 질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손님들은 금방 알고 그럼 다음에는 가게를 찾지 않는다고. 한 해 한 해 좌판에는 상품들이 늘어갈수록 그만큼 준비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늘어났다. 장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편하게 쉬어본 적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계신다고 했다. 

쌀집을 하다 보니 날이 더워지면 제주 사람들은 유독 미숫가루와 우미(건우뭇가사리), 누룩을 많이 찾고 날이 추워지면 날콩가루를 많이 찾는다고 했다. 날이 더워지면 보리 미숫가루는 시원하게 물에 타 먹고 우미와 콩미숫가루로 우미냉국을 해 먹으며 누룩으로는 쉰다리를 만든다. 날이 추워지면 날콩가루로 콩국이나 콩죽을 해 먹는 제주 사람들의 음식도 쌀집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제주 사람들은 들기름을 거의 쓰지 않고 참기름을 좋아하는 것도 알았다. 어쩌다 보니 제주 스타일의 우미냉국은 박동례 어르신도 여름철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고. 

우도 땅콩 철이 되면 팔아야 할 땅콩을 볶느라고 한시도 가만히 있을 틈이 없었다. 한꺼번에 많이 하면 금방 산패가 되어 버려 조금씩 자주 불 앞에서 볶아 최대한 손님들이 맛있는 상태에서 먹을 수 있게 만든다. 이렇게 볶은 땅콩은 본인이 직접 손으로 까야 한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땅콩 농사가 잘 안됐다고 하지만 내가 본 땅콩 포대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동문시장은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시장이라 이런 오래된 쌀집은 별로 장사가 안되는 곳일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우였다. 어르신은 지금까지도 단 하루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우리는 시장에 들어온 후 단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었어. 우리 갓 가게 열었을 때 큰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 큰아들 졸업식에도 못 갔었거든. 그 아들이 우리 생각한다고 고등학교 때부터 음대로 들어간다고 했어. 그때 음대 들어가면 학비가 면제되었거든. 음악을 좋아한 것 보다는 부모한테 부담주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색소폰 중고 하나 사줬어. 레슨 한번 해주려고 하니 25만원이래. 육지까지 가서 시험도 보고 그랬어. 남들 몇 년 걸리면서 하는 거 몇 개월 만에 하려니까 얼마나 고생 많았을 거야. 결국 남들 몇 년 걸려 하는 건데 아들은 그냥 기계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니까 기름을 묻히는 미술과를 다니대? 우리가 그때 차를 사줬거든. 아들 차 사주고 그 차에 기름 넣고 아들 밥 사먹이고. 그럼 돈 십만 원이 금방 나가. 나는 그걸 벌려고 고생을 그렇게 하는데 아들이랑 나랑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러다 큰아들이 용달차를 타더라고. 밤 2시 되면 나가서 새벽 종합시장 가. 밭에 가서 야채 매다 주면 그걸 차에 싣고 와서 도매로 넘기고. 그런 일을 했어. 도매하려고 한번 나가면 다 팔 때까지 안 들어왔어. 그러다 군대 다녀오고. 그래도 음악 배웠다고 군대는 좀 수월하게 다녀왔어. 그렇게 군대 다녀오니 저 앞에 무궁화슈퍼가 킹마트로 바뀌었을 때였고 우리 아들이 킹마트에 우리 꺼 납품시키려고 하니 다 소포장해서 보내야 하니까 그걸 했어. 큰아들이 진생공장 만들어서 킹마트 납품을 시작해서 우리 것들이 다 거기로 들어간 거야.”

부모님이 시장통에서 쌀장사하며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커서였을까? 군대를 다녀온 아들은 이렇게 쌀만 팔아서는 안 된다며 슈퍼마켓에 들어갈 수 있게 곡식이나 잡곡류를 소포장해야 한다고 했단다. 진생쌀상회의 이름을 따 진생공장을 만들었다. 도련과 한림에 하나씩 공장이 있는데 도련공장은 박동례 어르신의 작업장이 되기도 한단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껏 시장에서 장사해오면서 철저하게 지키는 철학이 있었다. 그건 바로 ‘질 좋은 물건만 판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당을 하는 사람들도 진생의 물건을 한번 써 보고는 바로 다음 날 대량으로 사들여 가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동문시장 안의 한 팥죽집도 어르신이 수매해 온 팥과 찹쌀, 아들의 공장에서 기름을 짠 참기름을 쓴다. 십 년 넘게 이 죽집이 어르신과 거래를 하는 이유는 친분 때문이 아닌 내가 취급하는 물건에 대한 상태와 정직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최대한 좋은 품질의 물건을 선별하고 꺼내 놓는 것. 박동례 어르신의 장사철학이었다. / 사진=김진경
최대한 좋은 품질의 물건을 선별하고 꺼내 놓는 것. 박동례 어르신의 장사철학이었다. / 사진=김진경

지금 제주도에는 몸(모자반)이 바닥을 보일 정도로 찾기 힘들어졌다. 추자도가 유일하게 남았는데 이 또한 귀해 시장에서는 너무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단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신안군의 몸을 찾았고 싸게 가져갈 수 있는 양식도 소개받았지만 일부러 자연산 몸을 가지고 오셨다. 제주산이 아니라면 최대한 좋은 물건으로 가지고 오고 싶다는 것이 어르신의 말씀이었다. 이렇게 가져온 몸은 근처 식당에서 매달 30kg 정도씩 거래해 갈 정도로 수요가 늘 있다. 이 손님은 처음 방문해서 어르신이 파는 몸을 조금 사가더니 다음날 바로 포대로 받고 싶다 찾아왔다. 내 물건이 인정받고 좋아해 주면 그렇게 신이 나고 좋을 수가 없단다. 이제껏 그 자부심으로 장사를 해오신 분이셨다. 어르신이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화려한 언변으로 손님을 끌어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좋은 제품으로 30년 동안 쌓아 온 신뢰였기 때문에 그 신뢰로 지금까지 장사하고 계신 것이었다.

어르신의 하루는 새벽 세 시 반에 시작된다. 화북에 직접 농사짓는 밭이 있어 새벽에 사라봉과 별도봉길을 따라 화북으로 걸어가 밭일을 한다. 농사지은 농산물을 가방에 담고 해가 뜨면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그렇게 가게 문을 열면 아침 7시. 가게 앞에 어르신이 밭에서 해 온 물건들로 좌판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장의 하루를 연다.

시장에 출근하기 전, 새벽에 집을 나서 밭에서 직접 해 온 물건들로 쌀집 한 켠에 좌판을 깐다. / 사진=김진경
시장에 출근하기 전, 새벽에 집을 나서 밭에서 직접 해 온 물건들로 쌀집 한 켠에 좌판을 깐다. / 사진=김진경

“우미도 원래는 추자도가 거래처였는데 우미양이 안 나온 댄 하는 거라. 손님들 우미 찾을 텐데 마음이 급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북촌에 몸도 나고 우미도 난다고 해서 북촌 계장님한테 연락해서 대여섯 푸대만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 우리 아들네 공장 직원이 ‘어머니 우미가 막 파랗고 빨개요’라고 말해서 내가 가서 볼란다 하고 직접 찾아갔어. 북촌 갔더니 우리 집만큼 한 푸대 하나가 보여. 조금 가지고 와서 한 주먹 널어봤어. 너무 좋은 거라. 얼른 주는 대로 다 받아서 몇 푸대 널으니 너무 좋은 거라. ‘아이고 너무 좋은 거 줬구나.’ 그런 좋은 물건 매대에 올리면 팔리고 또 올리면 팔리고 그래. 아이고 우리 우뭇가사리는 없어서 못 팔아.”

박동례 어르신은 밭일을 가지 않게 되면 우미 작업을 한다. 우미 작업은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매일 해야 한다. 이번 여름에도 우뭇가사리를 기본으로 세 포대 가지고 왔다. 우미 작업하는 날에는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택시를 잡아 도련으로 간다. 고무장갑 끼고 우미를 잘 빨아 시커먼 물을 뺀다.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우미를 삶은 후 탈탈 털어서 150평 되는 바닥에 널어 말린다. 다음날 다시 걷은 우미를 빨고 삶은 후 너는 것을 반복한다. 매일 그 작업을 열흘 동안 쉬지 않고 해야 해조류인 우미의 색이 빠지면서 뽀얀 크림색의 말린 우뭇가사리가 나오는 것이다. 

새벽에 우미 작업을 하다 동이 트면 버스를 타고 이번엔 사라봉에 있는 수영장에 가신단다. 일하는 노동과 운동은 다르다며 그렇게 매일매일 걷거나 수영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도 쌓이고 몸도 개운하지 않는다며 운동하는 삶이 습관이 되셨다.

뽀얗고 크림색의 우미를 얻으려면 열흘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사진=김진경
뽀얗고 크림색의 우미를 얻으려면 열흘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 사진=김진경

어르신 품에 안겨 갓난아기 때부터 시장에 나왔던 막내아들은 지금 시장과 인근의 큰 떡 공장에 쌀을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웬만한 제주도 내 큰 떡집의 쌀은 다 막내아들이 넣는 거라 했다. 그래도 각자 성인이 되어 자식 걱정 없이 제 밥벌이를 잘하고 있어 큰 근심은 없다 했다. 오히려 아들들이 부모님에게 이제 사서 고생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정도라고. 집도 창고 같은 집에서 살지 말고 우리와 같이 좀 더 편하게 살자고 한단다.

“남들은 이제 고생하지 말라며 많이 말하지만 안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누룩 만드는 거 힘들지만 내가 다른 공장에서 편하게 떼어 와서 팔지? 우리 오는 손님들이 싫어해. 어제도 너무 피곤한 거야. 덥고. 피곤해도 당장 누룩이 다 떨어져서 밤에 늦게까지 누룩 만들고 집에 갔어.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잖아. 배부르게 먹고 뜨끈뜨끈한 방에 있으면 살만 쪄. 나는 시장 명절날은 모두 하루 쉬지만, 명절날도 아침에 애들이랑 밥 먹으면 나와서 장사하러 와. 손님이 없어도 할 게 많아서 나와야 해.”

비록 제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70년 일생 중 50여 년 가까이 제주 사람으로 함께 살고 계시다. 전라도의 억양이 묻어나지만, 제주말을 섞어 쓰고 있고 제주 음식을 함께 만들어 드시는 어르신. 앞으로 십 년 정도는 더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동문시장은 박동례 어르신 내외와 아들들의 인생 전부였다.

"내가 장사만 42년 했어, 막내 업고 장사 시작했으니까.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장에 있을 거야." 삼촌의 손길이 안 간 물건이 없었습니다. 진생쌀슈퍼에는 제주의 맛있는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내가 장사만 42년 했어, 막내 업고 장사 시작했으니까.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장에 있을 거야." 삼촌의 손길이 안 간 물건이 없었습니다. 진생쌀슈퍼에는 제주의 맛있는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마지막으로 어르신은 나에게 맛있는 우무묵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우뭇가사리 한 팩 사서 세 번 정도 물에 바락바락 씻고 바구니에 건져놔. 라면 끓이듯이 냄비에 물 올려놓고 씻어 놓은 우미 넣어. 물 끓으면 우미 올라오거든? 주걱으로 꾹 눌러줘 그렇게 한 세 번 눌러주면 불 줄여서 한 시간 정도 은근하게 딸려. 우미가 되려고 하면 거품 같은 것들이 살짝 올라오니까 그럼 수저로 떨어뜨려 봐서 묵이 되는지 확인해. 묵 되면 틀에 넣고 굳히면 파는 우미(우무묵)는 정말 못 먹는다니까.”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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