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36) 바다올레

 

바다 올레

올레길 이정표엔 목적지가 따로 없어
구부정 화살표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면
돌아와 다시 그 자리 내가 길이 되는 길

바다 올레길에 떠밀려 와 마르는 것들
떠돌이 인연들이 떠돌다 만나듯이 
하얗게 빛바랜 언어가 조간대에 놓이고

갈 때 안 보이다가 돌아올 때 만나게 되는
머리 큰 형상석이 여기저기 일어서고
부러진 노 한 자루가 돌 위에서 마른다

한 발 두 발 쌓이다가 파도에 씻기고 마는
그 숱한 발자국이 길이 될까 바다가 될까 
애매한 화살표 하나가 섬 쪽을 향하고

섬을 바라보면 섬이 나를 바라보고
넌지시 말을 걸면 눈빛으로 대답하는
내 안의 초록섬 하나가 올레 끝에 놓인다.

/ 2013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문득 『외로우면 걸어라』 라는 어느 시인의 산문집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걷기’는 곧 ‘만남’을 위한 행위라 했을 때, 시는 연필심에 침을 바르며 쓰는 것이 아니라, 돌려세워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이든 사람이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외로운 자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로움이란 혼자여서가 아니라, 반쪽 형상일 때 나타나는 현상이이겠지요. 그 반쪽을 만나기 위해 시인은 길을 나섭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내가 찾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무수한 대상들을 만나게 되는 장소가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간절할 때,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사람의 형태로 다가와 시를 속사여주는 것입니다. 

‘올레’란 골목 다음으로 한 개인의 가정집으로 통하는 길의 최소단위를 말하는 제주사투리로서, 국도 지방도 등과는 상대적 의미를 지닙니다. 거기에다 일반도로는 공유물이지만, 올레는 주로 개인 명의로 등록돼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글쓰기란 이처럼 자기 내면에 있는 최소단위의 행로를 찾아 나서는 내면의 올레걷기와 같습니다. 막연하나마 그리움이 있는 곳, 돌담으로 가려진 그 어떤 신비로움이 있는 곳, 생각의 실핏줄이 닿을 듯 말 듯한 그곳, 더듬고 더듬어 찾아 들어간 골목 다음의 더 좁은 올레 끝에 누군가가 서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까맣게 잊고 살았던 당신의 반쪽이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한림 해안가를 걸으면서 만나는 초록섬 비양도가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어떤 반쪽의 형상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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