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6) 제주동문시장 부옥자 어르신

“나는 1964년에 가야호 타고 제주 왔어. 너희는 가야호 알아? 지금 애들은 모르지. 그때 제주 와서 나는 지금까지 쭉 남수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출처 : 가야호 취항(목포~제주도), 1963.8.25. 대한뉴스. / 사진=김진경.

전라남도 진도 출신인 부옥자 어르신은 호적상 1945년생이라 하셨지만, 이 시대 어르신들이 그러셨듯 실제 태어난 해보다 두 해 늦게 호적에 올라갔다. 어르신의 목소리는 전라도 억양이 옅게 깔려 있으면서도 그 위로 특유의 제주 억양이 짙게 눌려 있었다. 제주 사람이 아니면 쉽게 낼 수 없는 억양. 알고 봤더니 어르신의 친할아버지가 제주 출신이란다. 아 그래서 어르신의 제주말이 어색하지 않았구나.

부옥자 어르신께서 제주에 입도한 이유는 제주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시누이가 우리 고향 진도에 살았어. 시누이가 제주도로 가서 살 건데 제주에 자기 동생 이시난 결혼하고 같이 내려가자고 했어. 그때가 내가 20살인가? 아 실제 나이는 22살이겠지? 하지만 호적 나이로 말하니까. 난 제주도 남자랑 결혼한 거지. 사실 애기 아빠도 육지 사람인데 어렸을 때 부모가 제주 와서 정착한 사람이야. 그렇게 이 동네 남수각으로 와서 결혼해서 남편은 미장일하고 나는 애기들 낳고 키우고 10년 정도 그렇게 살았지. 그런데 원래 우리 할아버지가 제주도 사람이야. 구좌면 하도리였어. 그렇지만 난 남수각에서 딱 60년 살았어. 난 이제까지 한 번도 남수각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 하도가 너무 멀어서 두세 번밖에 가보지 못하고 그랬지.”

어르신은 초등학교까지는 다니셨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더 이상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셨다. 그때부터 22살 제주에 오기 전까지 어머니와 집에서 함께 농사지으며 자랐다고 하셨다. 진도에서는 주로 벼농사와 고추 같은 밭농사를 어머니와 함께하며 커왔고 고등어도 자주 해 먹었다. 어르신이 말씀하셨던 것 중의 하나 재밌었던 점은 진도에서는 일제의 영향을 받아 일본식 조리법으로 고등어를 많이 해 먹었다 하셨다. 마을에 제주 출신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언니가 본인은 이제 제주로 돌아가려 하는데 어르신에게 제주에 함께 가지 않겠냐 권유했다. 언니의 남동생과 혼사가 오갔고 꽃다운 나이 20살. 어르신은 그렇게 가야호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 뭍에 발을 내디뎠다.

제주에 정착해 1남 2녀를 낳고 10여 년 정도는 아이들을 키우는 데 전념하셨단다. 어르신이 말씀하길 우리 아이들은 제주도 아이들이라 하셨다. 본인은 육지 사람에서 온 사람이지만 반은 제주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다. 큰 아이를 낳고 10년 정도 있다 남편이 몸이 안 좋아져 당장 돈을 벌어야 하기에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1974년 어르신은 동진식당에 들어갔다. 동진식당에는 동서가 일하고 있었다.

“우리 동서의 동생 각시가 여기(시장)에서 국숫집을 하는데 본인이 여기서 일을 같이하니까 나를 또 끼어들게 했어. 일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같이 일했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쭉 여기 이 식당에 있었어.”

1964년 어르신이 가야호를 타고 제주에 오던 해는 동문시장(주) 완공되었던 해였다. 1945년 두 번의 화재로 제주동문시장이 재개발 대상이 된 이후에 1962년 주식회사 동문시장이 설립되었고 2년 후 1964년 완공이 되었다. 그다음 해 반년간의 막사생활을 마친 상인들이 시장건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시장이 운영되었다. 동문시장(주)은 동문로터리 버스정류장 앞에 자리한 흰색 건물이다, 제주 출신 건축가 고(故) 김한섭 씨(1920~1990)가 설계한 이 건물은 배 모양으로 설계하여 산지항과 제주 바다를 잇는 낭만적 성향과 모더니즘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 시장은 포목, 패션, 잡화, 동양극장까지 제주 사람들의 쇼핑 메카였었다. 명절이 되면 시장 안이 발 디딜 틈 없이 미어졌고 결혼 혼수는 모두 다 동문시장에서 마련했을 정도로 성업했던 시장이었고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였다.

2023년 9월 3일의 동문시장(주) 배 모양의 건물 외관이 뚜렷이 보인다. / 사진=김진경.

동진식당은 동문시장(주)이 완공되어 상인들이 입주했을 첫해, 부옥자 어르신이 제주에 입도한 다음 해인 1965년부터 운영하는 식당이다. 아울러 60년 가까이 된 제주에 몇 없는 오래된 국수 가게이기도 하다. 어르신의 기억에 이 건물 안에 식당이 많았을 때는 7곳이나 있었다고. 지금은 한둘씩 없어져 동진식당과 금복국수만이 이 건물 안에 나란히 마주해 있다.

“우리 형님이 돌아가시니까 이 국숫집을 내가(내 명의로) 하게 된 거지. 우리 형님 돌아가신 지 15년 정도 되었어. 그 전에 내가 맡아서 한 지는 30년 정도 됐을 거야. 처음에 동진식당은 멸치국수를 팔았어. 사람들이 우리 가게 잔치국수 맛있다고 했어. 저기 성산포 사람들까지 와서 ‘시내로 와서 동진국수 먹고 가게.’라고 할 정도로 우리 가게 와서 멸치국수 많이 먹으러 왔거든. 뭐 하나 하려면 전부 시내로, 시장으로 모여드니까 우리 국수 찾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

처음 식당에 들어왔을 때 어르신은 동진식당에서 내가 계속 일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린 자녀들은 엄마가 많이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일하기 시작한 것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나고 50년 가까운 지금까지 이어졌다.

동진식당은 한성국수공장의 소면을 사용하고 있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국수공장이 바로 앞 시장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가업을 이을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면서 공장이 사라지게 되었고 어르신은 무척 아쉬워하셨다. 누군가 대를 이어줄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오랜 이웃이었던 한성국수공장마저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며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어르신이 국수공장 사장님과의 오랜 세월 함께한 관계가 특별했을 거라 느껴졌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한성국수공장은 중면만 제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제주의 국수는 흔히 중면만 사용하는 줄 알고 있지만 어르신의 말을 빌리면 소면, 중면, 짜장면 등 다양한 국수를 제조해 팔아왔다. 그리고 많은 국수 가게들이 한성국수의 면을 사용했다고. 

50평생 동진식당의 국수와 함께한 어르신과 한성국수. / 사진=김진경.

어르신의 말씀을 들어보니 제주의 국숫집은 제주도 내의 국수 공장에서 제조한 면을 쓰는 곳이 많았다. 제주시의 한성국수공장, 서귀포시의 동남국수공장, 고산국수공장까지.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고산국수공장의 대면에 가까운 중면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제주 국수의 특징으로 중면국수만을 쓴다고 알고 있지만 동진식당의 부옥자 어르신은 소면을 쭉 사용해 왔다. 지금 판매하고 있는 고기국수의 면도 소면이다. 어르신이 한성국수공장의 소면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르신이 만드는 국수 육수에는 소면이 어울리고 맛있었다. 대조적으로 내가 종종 방문하는 골막식당의 고기국수는 고산국수공장의 굵은면을 이용해 국수를 내어주고 있다. 

좌. 동진식당의 고기국수, 우. 골막식당의 고기국수(출처 sbs백종원의 삼대천왕). / 사진=김진경.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 어르신은 사과와 배를 다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올해 처음 나온 햇 홍로 사과와 배였다. 과일 가격이 금값이라고 할 정도로 비싸 나도 최근 사과를 들었다 다시 놓은 경험이 있기에 수북이 쌓여있는 과일들을 보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르신께서 이것만 하고 이야기하자고 하시며 사과와 배를 잔뜩 깎고 계셔서 무엇에 쓰시려고 손질하는지 물었더니 우리 음식에 들어갈 ‘만년소스’에 들어가는 재료라 했다. 메뉴판의 국수 가격을 잠시 쳐다보고 다시 과일바구니를 바라봤다. 어르신은 식당 옆 바느질하시는 상인분 손에도, 내 손에도 배를 하나씩 쥐여주셨다. 단단한 과육과 시원한 단물이 쭉 나오는 것이 영락없는 햇 배였다. 

어르신의 만년소스에 들어가는 질 좋은 과일들. / 사진=김진경.

부옥자 어르신은 겨우 국수 한 그릇을 파는 식당이지만 한 그릇의 맛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오랫동안 잔치국수를 팔았지만 20~30여 년 전부터 삼성혈 쪽으로 시작해 식당들이 고기국수들을 팔았고 그 고기국수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지고 관광객들에게도 고기국수가 유명해졌다. 동진식당을 방문한 손님들이 점차 메뉴판에 없는 고기국수를 찾기 시작해 동진식당도 고기국수를 팔았다. 식당에서 고기국수를 판 지는 20여 년 정도 된 것 같다고 하셨다.

물론 제주 사람들이 이전에 고기국수를 안 먹은 것은 아니었단다.

“옛날엔 잔치하면 돼지 7~8마리씩은 잡았어. 내가 제주에 왔더니 통시는 있더라고. 그 돼지를 잡으면 몸국도 끓이고 뼈다구 삶아서 그추룩 하는 요리주게. 그걸로 국수도 해 먹고 몸국도 끓여서 먹고. 제주 사람들 몸국 좋아하잖아. 그런데 국수집에서 옛날부터 팔지는 않았던 거 같아. 물론 고기국수 파는 곳도 있었지만 요즘 같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들었고 몇몇 고기국수도 있었는데 고기도 막 귀했잖아. 잔치국수들을 더 많이 팔지 않았을까? 암튼 시장엔 대부분 잔치국수였어. 나? 나도 우리 애들 결혼시킬 때 돼지 잡았지. 사돈네도 제주 사람이었으니까. 또 우리 조상이 제주도 할아버지니까 저기 종달리 오조리에 우리 친정 선산이 거기에 있어. 나는 국수집에만 있다 보니 멀리에서만 지나가다 보고 우리 오빠들만 몇 번 보러 다녀왔지.”

사실 나는 인터뷰를 하기 전 두어 번 동진식당에서 국수를 먹으러 갔었다. 홀을 봐주시는 남자 사장님께서 너무 친절하고 응대가 좋으셨던 기억이 있어 부옥자 어르신께 혹시 아드님이냐고 물었다. 내 질문에 쓱 웃더니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

부지런한 삼춘의 스케줄에 맞추어 배추를 다듬으시는 동안 길거리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자리에서 맛을 유지하는 비결은 성실함이 답이 맞는 거 같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부지런한 삼춘의 스케줄에 맞추어 배추를 다듬으시는 동안 길거리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자리에서 맛을 유지하는 비결은 성실함이 답이 맞는 거 같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이 일은 혼자 못해. 잘되면 다섯 명, 네 명이 해야 해. 저기 턱이 있어서 혼자 못해. 홀에 있는 사람? 우리 사위야. 원래 고산 토박이고 관광 쪽 했던 사람이기도 하고. 신제주에서 고기 장사도 해났던 원래 장사꾼 사위야. 저기 주방에서 국수 만드는 사람은 우리 똘이고. 그리고 저기 젊은 남자 있지? 우리 손자. 심지어 난 증손지도 있어. 우리 증손지가 4살이야. 아이들이 다 옆에 있어서 나는 행복하지.” 

사람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성업했던 동문시장(주)의 찬란한 시대부터 지금까지 늘 같은 자리에서 시장을 지키고 있는 부옥자어르신. 20살 가야호를 타고 제주에 도착해 지금까지 동문시장(주) 배에 항해사로 이 시장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분 중 한 명이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르신의 오십 평생 제주에서 국수와 함께한 항해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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