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댁, 정지에書] (66) 제주동문시장 부옥자 어르신 ②

“여기 산지천이 옛날에는 4층, 5층 집이 저 아래 항까지 있었어. 지금의 산지천이 없었지. 중간에 뜯어가지고 복개천으로 만들었지. 복개천을 산지천으로 만들었었어. 내가 그것까지 다 봤으니까. 나는 50년은 채 안 되어도 오래오래 여기 국숫집 했지. 다른 일 뭐 해볼까 하고 생각할 뭣도 없었어. 다른 일 하지도 않고 나는 지금껏 쭉 이 일만 했어.”

1945년생 부옥자 어르신의 국숫집은 옛 제주 패션의 메카이자 동양극장이 있었던 동문시장(주)에 자리 잡고 있다. 1965년 동문시장(주)이 지금의 건물에서 문을 열었을 때 동진식당도 함께 역사를 시작했다. 나란히 마주 보며 영업을 하는 금복국수도 시장 개장 3년 후인 1968년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마치 자매처럼 서로 마주 보는 두 국숫집은 60년 가까이 이 동문시장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제주 사람들의 식당 중 하나다.

6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동진식당. / 이하 사진=김진경<br>
6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동진식당. / 이하 사진=김진경

전 편에서 언급했듯이 처음 동진식당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국수는 멸치국수였다. 한성국수공장의 소면을 삶아 말아주는 이곳의 멸치국수는 성산에서 찾아와서 국수를 먹고 가는 팬들이 있을 정도로 단골층이 두터웠다. 그런데 1990년대 삼성혈을 중심으로 국수거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거리의 식당들이 고기국수를 팔기 시작하며 고기국수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지며 동진국수를 찾는 손님들도 고기국수를 찾기 시작했다.

“국수거리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때부터 고기국수가 성했어. 거기서부터 고기국수들을 너도나도 팔았댄 하난. 삼성혈부터 고기국수 시작했어. 잔치 때 국수 솖아서 그렇게 줬다고 하는구나. 그 길에 국숫집들 없었을 때는 이 근처에서 국수 우리 시장에서만 팔았주. 우리는 기름기 있으면 옷가게 있고 하니까 (고기국수) 안 했는데 우리 식당에도 사람들이 와서 고기국수를 찾아. 이 고기국수를 안 한다니까 안 먹고 그냥 가더라고. 특별한 국수라고 해서 먹으러 왔는데, 없다면서. 그래서 우리도 고기국수는 큰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나랑 같이 국숫집에 오면서부터 했어. 아마 그렇게 고기국수 출시한 지 20년 조금 넘은 것 같아.”

동문시장(주) 건물 안 오픈 된 공간에서 음식을 파는 식당을 할 때 이웃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어르신은 고기국수를 하려고 할 때 얼마나 고민스러우실지 예상이 되었다. 특히 주로 포목과 이불, 한복, 의류, 수선을 주 업종으로 하는 이 시장에서 기름기가 있는 돼지고기로 육수를 낸다는 것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제주의 고기국수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동진국수도 고기국수를 팔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이 되었다.

동진국수의 고기국수, 한성국수공장의 소면을 쓰고 있다.<br>
동진국수의 고기국수, 한성국수공장의 소면을 쓰고 있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제주로 와 남수각에서 터를 잡은 지 60년. 어르신의 제주 인생에서 이 국숫집은 50여 년이 되었으니 사실 어르신의 삶의 궤적은 이 국숫집의 이야기나 다름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어르신은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나오고 밤에 돌아가니 내가 사는 집의 이웃은 잘 모른다고 하셨다. 오히려 시장 사람들이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얼굴 마주하며 지냈기 때문에 시장 사람들밖에 모른단다. 초반에 육지 상인들이 많았던 시장이지만 제주 사람들이 이용하는 시장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제주말이 입에 붙기 시작했다. 아마 시내가 아닌 촌에 살았으면 제주말을 더 잘 할 수 있었을 거라며 본인이 쓰는 제주말은 서툴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전라도 억양보다는 제주말의 억양이 더 깊게 깔려 있었다. 내가 만난 부옥자 어르신은 그랬다. 

“여기 시장 사람들? 그냥 가족이고 식구야. 치열하게 싸울 때는 싸우고 다툴 때는 치열하게 다퉈. 그러다가도 서로 조심하기도 하고 말도 함부로 서로 하지 못하게 돼. 정 많이 들었겠다. 정 많이 들었지. 여기 시장 사람들은 다 그렇게 40~50년 넘게 지내왔어. 그리고 저 앞에 한성국수공장 있었을 때 소면도 있고 중면도 있고 짜장면도 있었고 했지. 그 집이 좋았었는데 사장님이 가족과 같이하다가 동생들도 아프고 그다음 받아서 할 가족이 없어서 넘겼어. 근처 그릇집에서 사서 가게하고 떡집하고 그랬지. 우린 한성국수공장 소면을 썼는데 중면을 넣는 것보다 소면을 넣는 것이 훨씬 맛있고 해부난 소면을 썼다. 중면도 해 보면 육지에서 관광하러 온 사람들은 소면을 더 좋아하기도 했고.”

식당에 온 손님들이 어르신에게 ‘(국수) 여기가 맛있어요.’라는 이야기를 많이 건네면 그 말 때문에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금까지 국숫집을 열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동진식당 육수의 비법은 무조건 개운하고 깔끔하게 맛을 내는 것이라 하셨다. 

“육수를 낼 때 멸치든 고기든 무조건 뚜껑을 닫지 않고 육수를 우려내고 만들어. 무조건. 무수(무를 가리키는 전라도 말)도 넣고 파도 넣고 사골 삶아가며 육수를 최대한 깔끔하게 내려고 해. 냉면이랑 비빔국수에 들어가는 만년소스는 항상 전날 만들어 둬서 하룻밤 숙성시켜야 그 맛이 제대로 나. 새벽에 와서 돔베고기도 많이 불러서 삶아. 나는 제주 사람들이 하도 바쁘게 사니까 돼지고기 수육을 도마에 듬뿍듬뿍 썰어서 먹는 것 같아. 그렇게 제주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먹는 지 시장에서 배웠어. 나는 육지에서 태어나서 만년 육지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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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옥자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육수의 비법은 무조건 개운하고 깔끔하게 내는 것이라고 한다.

육수뿐 아니라 김치도 직접 만드시고 뭐 하나 도매로 받아서 하는 건 하나도 없는 동진식당의 음식들. 여름마다 하던 콩국수는 올해는 못 하셨다고 아쉬워하셨다. 질 좋은 햇과일로 만드는 만년소스라니, 비빔국수 한 그릇의 맛은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제주에 와서 아무것도 없이 와서 처음 살았을 때는 당시에 연세 7000원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전세 7만 원으로 옮겨갔다. 그 시절의 집세에 비해 지금은 정말 다른 세상인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신세계처럼 바뀌는 시대지만 어르신은 늘 같은 국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국수에 올리는 채소 고명은 집에서 식구들만 먹는 식으로 올리면 더 맛있지만, 양을 많이 해서 하루 팔 것들을 준비하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방법으로 준비한단다. 바로 볶아서 따뜻한 국수 위에 올려주고 싶지만, 식당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기에 삶아서 고명으로 올린다고 하셨다. 어르신의 말을 빌리자면 ‘기름기가 등간등간 하게 하면 안 되니까’라고 하셨다. 어르신이 정성을 쏟는 것 중 하나인 ‘만년소스’도 노하우가 중요하다고 했다.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많은 시도와 시간이 흘러 완성된 것이라 하셨다. 

“난 새벽 6시 40분에 늘 여기 와. 지금 여기는 3년 전에 딸이 맡아서 시작해서 나는 낮에는 잠깐 집에 가불잖아. 그래도 내가 새벽에 와서 직접 육수 내고 고기도 삶고 콩나물도 삶고 준비해야지. 우리는 종일 하니까 매일 만든 것은 그날 다 판다고 봐야지. 이렇게 한 번 채소를 손질하면 2~3일 쓰면 끝나. 다른 장사 했으면 돈 벌 건데 그래도 이제껏 했던 것이 이거라서 해.”

20년 전에 아들이 서울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어르신과 함께 국숫집을 도와 일한 후, 아들은 용담에서 동진식당 2호점을 하고 있단다. 국수는 물론 몸국과 고사리육개장을 팔고 있다고. 둘째 딸도 결혼하기 전에는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 후에는 함께 식당으로 나와 장사했고 본격적으로 동문시장의 동진국수를 맡은 지는 3년 가량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금은 손자까지 함께 나와 가게를 거들고 있다고 한다. 삼대가 함께 이 공간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부옥자 어르신의 시선에서 보는 국숫집의 딸과 손자는 어떤 의미일까?

“내 집이니까 내가 나오지. 그리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도 아들은 지네 냥으로 잘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난 그냥 여기서만 사는 거지. 아들 대학 서울로 고생하며 좋은 데 시켰는데 결국 제주 와서 국수 장사하는 게 처음엔 속상했는데 지금은 아들도 가깝게 보고 있으니까 좋지. 인제 보니 나는 좋던데. 아들 옆에 두고 사니까. 아들은 필히 있어야 하니까. 딸도 내 옆에 보고. 사위도 잘하고. 손주도 있고. 재산은 많지 않아도 벌어 먹고사니까 난 고생은 않았다고 봐. 다행히 팔 이런 데는 아직도 칼질하는 데 괜찮은데 이제 다리가 조금씩 저려. 여기 계속해야 하는데 이 건물이 오래되어서 언제 뜯길지 모르는 것만 빼고는 아마 난 계속 여기 있지 않을까?”

남편이 아프고 시작한 국숫집 일. 다행히 어렸을 때 아이들은 남편이 많이 돌봐주었기 때문에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르신이 일하지 않으면 남편이 해야 하니 아침부터 밤까지 어르신이 일하면서 살아왔던 것이 50여 년 동안 이어졌다. 그냥 이렇게 평범한 듯 평범하고 잔잔하게 이어진 어르신의 삶이 담긴 이 식당이 동진식당의 역사였다.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정말 천운인 것은 아프지 않고 지금껏 살아온 것이라 했다. 그래서 동진식당이 문을 닫지 않은 것이라 했다. 나는 지금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여쭸다. 

“나는 내가 낙천적인 것 같아. 내가 스트레스 받으면 나 뿐 아니라 가족도 못살지.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냥 그러려니 마음먹어. 내 인생이니까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달렸어. 살다 보니 그렇게 사는 거지 뭐. 국숫집 하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 손주들 나온 거. 아이들 결혼시킬 때가 가장 행복했지. 그냥 아무도 탈 안 나고 안 아프고 사는 거. 지금이 가장 행복하지. 나는 가족들과 함께 있잖아. 기분이 좋지. 지금 여기는 손지하고 딸하고 하니까 자동으로 아프지 않아. 여기에 나는 증손지까지 있어. 4살이었던가. 그리고 가게에 손님들이 국수 먹으러 와서 맛 좋댄 하면 우리 식구들 다들 막 좋아해. 이게 행복이지.”

부옥자 어르신의 대답에서 과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끈으로 이어진 이 식당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위기가 음식과 손님에 대한 진심 어린 응대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바빠 가족 간에도 안부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면 이번 팔월 멩질에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행복이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 나누며 찾아보면 어떨까? 행복은 분명 소소한 곳 우리 곁에 있다. 국수 한 그릇에 담긴 부옥자 어르신의 진정한 행복의 의미. 그 의미를 찾을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추석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특유의 따뜻함이 있어 음식을 한결 더 맛있게 해주는 매력이 있습니다.&nbsp;/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br>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특유의 따뜻함이 있어 음식을 한결 더 맛있게 해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 ⓒ일러스트=色色(이로이로)

#김진경

20대에 찾아온 성인아토피 때문에 밀가루와 인스턴트 음식을 끊고 전통음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떡과 한과에 대한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다. 결국 중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던 일도 그만두고 전통 병과점을 창업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제주전통음식으로 영역을 확장해 현재 베지근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제주음식 연구와 아카이빙, 제주로컬푸드 컨설팅, 레시피 개발과 쿠킹랩 등을 총괄기획하고 있다.

현재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과정을 밟으며 제주음식 공부에 열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어멍의 마음으로 제주음식을 대하고 있다.


#김윤영(이로이로)

육지것에게 들리는 제주의 진한 사투리는 화가 나신 것도 같고 꽤나 투박하기도 하여 인터뷰 때마다 어지간히 긴장을 하고 갔지만 이제는 제법 알아듣고 끄덕거릴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매번의 인터뷰가 제주어 듣기 평가이기에 삼춘들의 표정과 손짓에 더 집중하며 어르신들을 만나 뵙고 있다.

하도리에서 이로이로라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며 취향에 맞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관련된 여러 클래스들도 운영 중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제주의 콘텐츠들을 디자인하고 만들고 있다.

육지에서 제주로 이주한지 10년 차,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그림으로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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