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 읽기] (284) 낙타샹즈, 라오서(老舍) 지음, 심규호·유소영 번역, 황소자리, 2021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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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淸人과 기인旗人

가끔 잊는다. 고대 중국은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국가란 말은 원래 제후가 다스리는 영지인 국國과 경대부가 먹고 사는 식읍食邑인 가家가 합친 말이다. 국가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네이션(nation)이나 컨추리(country), 스테이트(state)도 사실 민족이나 지역의 의미가 강하다. 다만 국가를 영토와 주권을 보유한 사회조직이라고 정의한다면, 서양의 경우 그리스 도시국가가 이미 국가 형태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주권은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천하의 주인, 즉 천자 또는 황제가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고대 중국에서 총체적인 사회조직은 국가가 아니라 천하였다. 이런 점에서 건국이든 치국이든 국國을 사용하기는 했으되 이것이 지금의 국가 조직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청나라라고 부르는 청조淸朝(1616~1912년)는 청인淸人이 자칭 천하를 다스리던 나라였다. 다만 당조의 주체인 당인唐人이 한족인 데 반해 청인은 원조元朝나 위진남북조 시절 북조의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비한족, 지금은 소수민족이라고 불리는 만주족滿洲族(일명 만족)이다. 처음부터 국호가 청인 것은 아니고, 건주建州 여진의 수령인 누루하치가 여진족 여러 부를 통일시키고 국가를 세우면서 후금이라고 부르며 명조와 대치했다가 홍타이지(皇太極)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으며, 1636년 다시 대청大淸으로 개칭했다. 왜 굳이 ‘다칭(大淸)’이라고 정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나 필자는 지고무상한 상국上國, 싸움 잘하는 나라(善戰之國), 수덕水德의 나라라는 뜻보다 샤만(북방계 종교)을 신봉한다는 뜻인 만주滿洲처럼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그들을 청인이 아닌 기인旗人이라고 부르는가? 청인은 정체政體에 따른 것이고, 기인은 민족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중원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막강한 군대 조직이 한 몫을 했다. 만주족의 군대 조직은 여진족 시절의 맹안모국猛安謨克이라는 제도에서 유래한다. 누루하치는 휘하 부족을 사냥을 하면서 임시로 구성하던 우록牛綠으로 편성했다. 만주어로 니루인 우록은 사냥이나 전쟁에 동원하는 최소 단위인 10명으로 구성되는데, 이를 통솔하는 한 명을 일러 우록액진牛綠額真, 즉 십인총령十人總領이라고 부른다. 이후 우록액진은 한자어로 좌령佐領이라고 번역되고 정식 관명이 되었으며, 규모 또한 300명으로 크게 늘었다. 다섯 개의 우록을 묶어 갑라甲喇로 통합하고, 다시 갑라 다섯을 묶어 하나의 구사, 즉 기旗로 통합했다. 원래 황, 백, 홍, 남색의 4기였는데, 이후 네 가지 색깔의 깃발에 테두리를 둘러 양황鑲黄, 양백鑲白, 양홍鑲紅, 양람鑲藍 등으로 확대했다. 이것이 바로 팔기八旗이다. 팔기는 “출전하면 병사가 되고 돌아오면 백성이 되었다(出則爲兵, 入則爲民)”는 말대로 전시에는 군사조직이고, 평시에는 행정조직으로 활용되었다. 이렇듯 만주족 대부분이 바로 팔기에 속했기 때문에 만주족을 일러 기인旗人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후 팔기는 만주팔기滿洲八旗, 몽골팔기蒙古八旗, 한인팔기漢人八旗로 확대되면서 청조의 정규군으로 자리 잡았다. 

라오서의 삶과 죽음

쑨원(孫文)은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오족공화五族共和’론을 제시했다.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回族, 장족藏族(티베트족)이 하나로 뭉쳐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청조 말기 입헌운동가들이 주장한 ‘오족대동五族大同’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족 대통합 책략이었다. 하지만 그는 1905년 “달로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창립하고 토지 소유권을 균등하게 하자(驅除韃虜, 恢復中華, 創立民國, 平均地權).”는 이른바 16자 방침을 제시했다. 이는 ‘삼민주의’의 모태가 되는 발언이다. 여기서 ‘달로韃虜’는 북방 민족에 대한 한족의 멸칭으로 만주족을 지칭한다. 청조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건립했으니 당연한 정책 전환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족의 관념도 정책 변화처럼 쉽게 바뀌었을까? 

“청두成都의 만주인 중 자립이 불가능한 사람은 12,000여명이며 ……음독자살한 사람도 있고, 지급되는 돈을 받아 부모에게 주고 강에 투신해 죽는 사람도 있다.” “기인旗人들은 속수무책이고 호소할 곳도 없다. 아이들은 한쪽에서 울고, 아내는 방에서 목을 매었다. 심지어 백발의 부모는 자식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자살을 했다. 처참한 상황을 보자니 비통하고, 듣자니 코가 찡하다.”(김문현, ‘老舍小說의 空間硏究’, 석사학위논문(고대, 1995), 51쪽 재인용)

라오서老舍(1899~1966년)는 만주족 정홍기인正紅旗人 출신이다. 본명 수칭춘舒慶春, 입춘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9살 무렵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을 버린다(또는 자신을 잊는다)는 뜻에서 서사여舒舍予라는 이름을 썼다. 라오서라는 이름은 1926년 ‘소설월보’에 장편소설 ‘라오장의 철학老張的哲學’을 연재하면서 제2기부터 사용했다. 그는 부친이 호군護軍으로 8개국 연합군이 북경성을 공격할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빈곤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억척같은 모친과 몇몇 지인들의 도움으로 그는 1918년 북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시에 팡자후통方家胡同에 있는 제17소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3년 동안 교장을 역임한 후 권학원勸學員(일종의 장학사)으로 임명되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월급이 대략 100위안 정도로 ‘낙타샹즈’에 따르면, 인력거 한 대 가격이다) 이후 권학원을 사퇴하고 몇몇 학교를 전전하다 1924년 25세 때 런던대학 동방학원 중국어교사로 영국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1929년까지 만 5년간 생활하면서 ‘라오장의 철학’, ‘조자왈趙子曰’, ‘이마二馬’ 등 장편소설을 탈고하는 한편 ‘홍무몽’을 영역했다. 귀국 후 그는 이미 유명한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다. 1921년 ‘해외신성海外新聲’에 ‘그녀의 실패(她的失敗)’라는 제목으로 700자 정도의 짧은 백화 문장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가 발표한 최초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최초 단편소설은 1923년에 ‘남개계간南開季刊’에 발표한 ‘소령아小鈴兒’이다. 

라오서는 다작 작가이다. 이는 그가 말한 바대로 어떤 원고 청탁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보장하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전업작가로 나설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극했기 때문이다. 그는 ‘낙타샹즈’라는 대표작 이외에도 ‘황혹惶惑’, ‘투생偷生’, ‘기황饑荒’ 등 삼 부 장편이 포함된 ‘사세동당四世同堂’과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 연극 ‘다관茶館’,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쓴 연극 ‘용수구龍鬚溝’, 그리고 약간의 문학평론집과 시집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 

그 중에서 ‘낙타샹즈’는 베이징(당시는 베이핑北平)의 하층민들의 삶을 최초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첸리췬錢理群이 말한 것처럼 “구舊 중국의 도시 하층 시민들의 고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파산한 농민들이 어떻게 도시민이 되었으며, 사회에 의해 룸펜 프롤레타리아 행렬로 버려지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 격은 정신적 훼멸의 비극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라오서의 대표작으로 중시되고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첫 해, 그는 홍위병에게 학술권위라는 이유로 무차별 폭력과 모욕을 당한 후 그 이튿날 그가 즐겨 찾던 타이핑太平湖에 몸을 던지고 만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첫 번째 ‘인민예술가’ 호칭을 받은 그는 이렇게 세상을 떴다. 1962년부터 쓰기 시작한 미완의 유작, 만주족의 유산과 흔적을 묘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작품 ‘정홍기 아래에서(正紅旗下)’는 끝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은 이렇게 역사, 문학, 문화, 그리하여 삶의 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상실케 만들었다. 여전히 베이징 첸먼前門 인근에 라오서차관(老舍茶館)은 성업 중이지만.  

낙타 샹즈의 인생 굴곡

‘낙타샹즈’의 주인공은 샹즈祥子이다. 인력거꾼으로서 그의 삶을 조명한 소설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삼복삼기三伏三起’라고 말한다. 인력거를 매개로 샹즈의 세 번의 엎어짐과 일어섬이 소설 서사 구조의 얼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등장인물은 샹즈와 부부관계인 후뉴虎妞, 고용주인 류쓰예劉四爺葉, 연애 관계인 샤오푸즈小福子, 동업관계인 얼창즈二强子, 라오마老馬, 샹즈에게 호의적인 이웃인 가오마高媽와 손님인 차오曹선생, 그리고 샹즈를 등쳐먹는 쑨孫정탐(일명 쑨파이장孫排長)과 지식인으로 등장하는 롼밍阮明 등이다. 

‘낙타샹즈’의 내용은 건실한 농촌 출신 샹즈가 베이핑(당시 수도는 난징南京이기 때문에 개칭함)에 올라와 인력거꾼으로 생활상을 근간으로 한다. 이야기는 샹즈의 희망이 어떻게 절망으로 전도되는가를 보여주며, 당시 베이핑의 생활상, 건축물과 지형, 심지어 도로 이름까지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그의 첫 번째 희망은 대략 100원 남짓한 인력거를 소유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그는 다른 데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100원을 버는 데 열중한다. 마침내 인력거를 샀지만 군벌의 싸움터에서 빼앗기고, 대신 낙타 세 마리를 끌고 도망친다. 첫 번째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이다.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돈을 모은다. 오로지 인력거를 사기 위해 하지만 재기의 노력은 쑨 탐정의 협박과 사기로 물거품이 되고, 인화人和 인력거회사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그곳의 주인 류쓰예는 선심善心이라곤 하나 없는 데다 부정한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고용인들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감시하고 착취를 일삼는 악덕업자였으며, 그의 딸 후뉴는 생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씀씀이도 영 형편없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꼬임에 빠져 하룻밤을 지낸 후 덜컥 임신했다는 거짓말에 속은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후뉴는 진짜로 임신했으나 난산 끝에 죽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새로 구입한 인력거를 판다. 그의 희망이 속절없이 날아간 셈이다. 이렇게 세 번의 희망과 연이어 절망이 그를 점점 더 지옥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이제 하나 남은 희망 샤오푸즈마저 사창가에서 목을 매어 죽고 만다. 무엇 때문일까? 건강한 육신과 성실하고 근면함이 몸에 배인 젊은이. 매사에 긍정적이고 체면이 있는 샹즈가 어찌 야수로 돌변한 것일까?  

“샹즈는 문화의 도시 베이핑에서 살고 있지만 다시 짐승이 되고 말았다. 추호도 그의 잘못이 아니다.……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몽롱하게 아래로, 끝없이 심연으로 떨어져 간다.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하고, 나태하고……. 교활한 모든 모습은 그가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떼내갔기 때문이다. 그는 썩기를 기다려 연고 없는 무덤으로 향할 장대한 골격만 남아 있을 뿐이다.”(355~356쪽)

지옥의 재구성 - 돈과 자본, 그리고 자본주의

라오서는 ‘나는 어떻게 낙타샹즈를 썼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관찰했던 것은 인력거꾼의 차림새에서 풍기는 것이라든지 언행에 대한 소소한 일들뿐만 아니라, 그들 내면의 마음상태에서 지옥이란 도대체 어떠한 곳인가를 관찰해내는 것이다. 인력거꾼의 외면상으로 나타나는 것들은 모두 생명과 생활상으로 어떠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 근원을 찾아내야만, 고통 받는 사회를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오서, 최영애, 김용옥, ‘루어투어 시앙쯔’ 아랫대목, 580쪽, 서울, 통나무, 1986년)

라오서는 자신이 어린 시절 곤궁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층민에 대한 깊은 동정을 지녔다고 했다. 분명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낙타샹즈’ 역시 하층민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낙타샹즈’에서 “인력거꾼의 차림새에서 풍기는 것이라든지 언행에 대한 소소한 일들뿐만 아니라, 그들 내면의 마음상태에서 지옥이란 도대체 어떠한 곳인가를 관찰해내는 것이다.”라고 하여 인력거꾼의 내면의 마음상태에서 왜 ‘지옥’을 관찰하고자 했는가? 다시 말해 왜 그들의 삶을 ‘지옥’으로 생각했으며, 그렇게 묘사하려고 했는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는 샹즈의 시대가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에 돌입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샹즈는 건실한 사람이다. 건강한 육신, 성실하고 근면함, 매사에 긍정적이고 체면이 있는 인물이다. 사치와는 관련이 없고, 심지어 술과 담배, 아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열심히 일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인화차창人和車廠을 떠난 후 살게 된 대잡원大雜院의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작은 공간에 7~8가구가 살고 있고, 행상이나 하인 등 허드렛일을 하지만 각기 할 일에 충실하여 한가할 틈이 없다. 어린아이들조차 작은 광주리를 들고 이른 아침에 죽을 타러 나가고 오후가 되면 알탄을 주우러 간다. 모두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빈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할 것이 마땅치 않은 이는 몸을 판다. 샤오푸즈는 아예 군인의 가정부 겸 성 놀이개 역할을 맡아 가족을 건사한다. 그리고 끝내 사창가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다. 우리의 샹즈 역시 삼전삼기를 거듭하다 결국 썩은 고깃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의 돈을 빼앗은 쑨 정탐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굴 어떻게 한 건 아니지. 그냥 재수에 옴 붙은 거야. 어느 놈은 태어날 때부터 복을 타고 나오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원래부터 밑바닥 인생이라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필요 없어.”(177쪽)

그렇다. 운이 나쁜 것이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열심히 일했지만 빈털터리가 된 것도, 그리고 끝내 전락하고 만 것도 운이 나쁜 것이다. 그 운運에는 시류時流, 세태世態, 처지處地, 신세身世, 학식學識, 경력經歷이 모두 뭉뚱그려 있다. 도무지 빠져나올 틈이 보이질 않는다. 

문제는 사람됨이나 삶의 태도(예를 들어 성실성, 근면성 등등), 노동 의지 등이 아니라 ‘돈’이다. 샹즈가 고향을 떠나온 것도 ‘돈’ 때문이고, 그가 자신의 육신을 파는 인력거꾼이 된 것도 ‘돈’이며, 희망에서 절망으로 곤두박질 친 것도 ‘돈’ 때문이며, 의기양양 우쭐 댈 수 있었던 것도 ‘돈’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사람의 육체를 살 수도 있고, 반대로 ‘돈’으로 인해 자신의 육신을 팔아야만 할 때도 있다. 샹즈에겐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것이다. 축적되지 않는 돈이 그의 삶을 허비하게 만들고, 추락하게 만들며, 절망하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살고 있는 ‘돈’의 시대이다. 자본이 이윤을 남기고, 이윤이 다시 자본을 축적하여 끊임없이 확장되는 사회,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면모는 하나가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돈이라는 자본과 이에 따른 이윤이 우선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하다. 

샹즈는 아쉽게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자본주의가 뭔지 몰랐다.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이나 투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은행이나 고리대조차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자체를 아예 믿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있음에도 자본주의 사회와 별개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에겐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암흑이거나 끊임없이 조여 오는 쇠사슬, 자신도 모르게 절망으로 이끄는 거대한 동아줄이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나올 수 없는 늪과 같은. 이것이 곧 지옥이 아니겠는가?

‘낙타샹즈’를 다시 부르다

2007년 이래로 중국 정부의 1호 문건은 언제나 삼농三農 문제였다. 삼농은 농촌, 농업, 농민을 말한다. 농업은 중국의 기간산업이며, 농촌은 중국공산당의 기반이고, 농민은 그 주력군이다. 하지만 승포제承包制(토지 도급, 하청제도)에 기반을 둔 농촌의 토지 문제와 기층정권의 문제, 농업정책의 문제, 그리고 농민의 빈곤과 소양의 문제 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산업화가 가속화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가 확대되어 농민들의 농촌 이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사회 약자 배려와 균형 잡힌 발전을 강조한 후진타오가 삼농문제를 중시하여 자신이 제창한 과학적 발전관에서 처음으로 농업세 폐지(2006년), 농촌 사회보장제도 확대, 서부 대개발, 농민공 대우 개선 등을 정책으로 밀고 나갔다. 하지만 삼농문제는 여전히 중국 사회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농都農간의 불평등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샹즈의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중국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러한 불평등이 이른바 ‘농민공’이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2022년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2022년 전국 농민공 총인구는 29562만 명이며 계속 증가일로이다. 월 평균 수입은 4615元이며, 매주 6.29일, 하루 8.93시간 노동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그러면 한국은 어떠한가? 물론 노동자들의 임금이 중국의 농민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아니 우리들 누군가의 삶이 ‘천국’인가? ‘지옥’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낙타샹즈’를 소환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2023년 10월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발표한 내용 일부 포함.


#심규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졸업, 동대학원 중문학 박사. 제주국제대 교수, 중국학연구회, 중국문학이론학회 회장 역임. 현 제주중국학회 회장,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저서로 《육조삼가 창작론 연구》, 《도표와 사진으로 보는 중국사》, 《한자로 세상읽기》, 《부운재》(수필집) 등이 있으며, 역서로 《중국사상사》, 《중국문학비평소사》, 《마오쩌둥 평전》, 《덩샤오핑과 그의 시대》, 《개구리》, 《중국문화답사기》, 《중국사강요》, 《완적집》, 《낙타샹즈》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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