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⑤ 비석 각자 장인 고정팔(1939년생, 대정읍 안성리 거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비석 각자 장인 고정팔(1939년생, 대정읍 안성리 거주) / 이하 사진=조환진<br>
비석 각자 장인 고정팔(1939년생, 대정읍 안성리 거주) / 이하 사진=조환진

처음엔 애기업게 허멍 놀러가서
이웃집 각자장 하는 걸 신기하게 보다보니

Q. 어떻게 돌각자 일을 하게 됐는지요?

난 이디서, 대정읍 인성리 118번지에서 태어낫수다. 1939년 바로 이 집이서 나신디 이 집허고 나하고 동갑이주게. 제일 막둥인디 손누이, 현재 살아계신 누님 두 분이 계시고, 큰누이는 4.3때 희생되어 버리고 22살에 혼인허고 아들 둘에 딸 넷. 이디서 쭉 살았지.

돌각자, 그건 각자를 뭐 꼭 해볼려고 의식한 것이 아니고 그 초산일 때 애기업게 노릇 허멍, 애기 보멍. 이웃집에 각자허는 분이 계셔났어요. 애기 보멍 놀러강 가만히 빗돌에다 글 각자허는 걸 보난.

손가락으로 끌 붙잡는 모양이라든가 끌 좌우전후 각도를 가만히 보니 저거 어린애기 뭐 장난감 만지듯 아주 재미져 보여. 무심코 끌의 각도가 좌우 전후로 움직이멍 한쪽 손으로 망치를 때리는디 글을 맹글아내는 게 아주 신기해 보인다 말이여 이?

우리 가까운 이웃이고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애기 보덜, 업어가지고 놀면서 가만히 구경핸게 아주 신기해 봬가지고. 여기 대정골은 비석 생산지가 되다 보니까 파손된 거 쓸모없는 그 파편 닮은 거 있어요. 그걸 집에 가졍왕 나름대로 나도 뭐 장난삼아 한 번 해봤어요.

처음에는 한 일자도 해보고, 원도 그려보고, 구멍도 파보고 허니 아, 그 돌이 쪼개지고 구멍이 뚫러져. 처음에는 한 일자 사람 인 자 허단 차차 판 2, 3일 후에는 기역자도 해보고, 니은 자도 해보고, 이응 자도 해보고 이응 자는 좀 굼떠요. 각진 게 쉬워요.

처음엔 한글 하는데 기역, 니은 허당 차차차차 횟수 많아진 거 허다가 예. 손이 자연히 말들엉이네. 경해서 한 일주일쯤 허난 손이 관절이 뻐근해여. 게니, 그러다 보니까는 손이 이제 숙달되여가지고 많아지는 아마 면역이 생겼는지 그 다음은 아프지도 않허고 차차차 횟수 많아지는 걸 허단 보난 글자가 모양이 되는 거라, 모양.

고정팔 장인의 손.&nbsp;
고정팔 장인의 손. 

나도 이재 비석에 글자를 새길 수가 있겠노라 허는 자신이 있어 가지고 진짜 글을 파 본 거라. 팔 수가 있어. 모양은 잘 안 나와요. 글자는 되니까 그 김에 취미 삼앙 허단 보난 손기술이 있어서 그런지, 솜씨가 있어서 그런지 글을 만들 수 있단 말이여. 경해서 누구 아는 분이 비석을 한 장 해달라고 허니까 “아이, 거 거 내가 주문받아 할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해도 아니, 거 되겠다고 하니. 형편은 그렇지만 글자가 되더만. 그게 입소문이 나가지고 차차 허다보니 용기가 생겨.

경허연 한 1년쯤 연습이라고나 할까, 수련이라고 할까 허단 보니 아마 그 내가 그런 솜씨가 있었는지 조각 기술자가 되여분 거라. 누구신디 뭐 배운 것도 아니고 나 자력으로 허단 보난.

숙련공이 되려면 손 관절을 숙련시켜사

Q. 돌각자가 뭔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십시오.

각이라는 건 새길 각, 자는 글자 자, 글자를 새긴다는 거라. 한문인디 각은 새길 각, 자는 글자 자. 경해서 각자라고 헙니다.

Q. 비석에 글씨 새기는 차례와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학교 댕길 때 배웠주마는, 각자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두 개의 힘이 작용했을 때 힘은 약한 쪽으로 쏠린다는 거, 가장 그게 중요한 원리여이. 좌우전후로 그런 거는 이제 징이 각도 좌우로 움직이느냐 전후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힘없는 쪽으로 파편이 날아가게 되니까 그런 원리로 쓰면 되는 거여,

각자 순서는 따로 없어요. 자기 마음대로 가장 쉬운 건 뭐 그뭇 하나 그어가지고 파보는 거, 기역 니은 직각으로 되는 거, 이응 자는 좀 힘 드난 숙련돼야 돼요. 기역 니은 리을 미음 이런 거.

제일 처음 초기엔 글자라기보다도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파보는 거라. 될 것 같으민 그때는 한 일 자라던가 기역이라던가 니은 자라던가 사람인 자도 해보는 것이고, 처음부터 글자 맨들젠 허믄 안 됩니다. 우선 이 손 관절을 숙련시켜야 주게.

비석에 글을 새기젠허민 기술이 궤도에 올라야 해요. 그게 돈을 받을려면 상품성을 만들어야 허난 아주 수준에 도달해야 되지예. 이게 자가용이 아니거든. 상대로부터 돈 받고 허는 거 맨들잰 허민 수준에 올라야주게.

고정팔 장인이 새긴 비석들.&nbsp;
고정팔 장인이 새긴 비석들. 

Q. 비석 주문 받아서 완성하기까지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29세 때부터 각자 일을 해신디 한 2-3년 동안은 그저 소문에는 고정팔이가 비석 새긴다 말 뿐이지 상품성이 없었어요. 그저 좋고 궂고 옳고 그름을 잘 모르니까 보이는 액면 그대로 해봐신디. 기술적으로 되긴 되는데 차차 보니까 노하우가 필요허여.

기술적인 전 아까 말씀 드린 것이고 다음엔 글을 알아야 돼여. 글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첫째는 기술. 그 다음은 글 볼 줄 아는 거. 다음은 상품성. 또 가급적이면 자필. 다음은 문장력.

좀 복잡한데 이런 너댓 가지 요소가 갖춰져야만, 사업허젠 허민 그런 요소는 갖춰져야 해요. 무턱대고 한답시고 허영 아무 생각엇이 일자 무식자도 기술적으로 할 수는 있으나 맨날 고용인밖에 안 돼요. 자기가 리더 위치에 잇젠 허민 아까 얘기한 세 가지에서 다섯 가지 요소는 갖춰져야만 경영자가 될 수가 있어요.

몇 년 동안 허단 보난 상품성에 상당히 신경이 많이 가 가지고 요즘 사업헌다고 판촉이다 뭐다, 광고 낸다 뭐한다 하지마는 나의 노하우는 나만 잘허민 판축이 필요 없다. 그래가지고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진짜 판촉이 필요 없어. 저절로 입소문이 나가지고 찾아오니까. 요히려 수요가 넘쳐날 정도라 그게 지금도 참 보람을 느껴요.

이젠 뭐 나이 들어가지고 배운 것도 많이 잊어불고 손도 묵언 이제는 영업 행위 못허지만 후회 없어요. 얼른 남 보기에는 복장도 사업장도 허술허지마는 내용적으로는 알뜰허여. 그 당시(70-80년대) 자본은 3000만원 회전 자금으로 시작해신디 요즘 같으면 운영자금으로 한 1억 정도.

2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비석 조각을 시작했주

Q. 언제부터 직업으로 이 일을 하게 되셨나요?

직업적으로 시작한 거는 처음 시작은 29세 때, 2년 동안은 그런대로 그자 이해관계 아무 생각 엇이 거의 뭐 농사지으멍 누가 한 장 해달랜 허민 마지못허영 허는 둥 마는 둥 허다가 계속 수요가 몰리니까 아이고, 이거 뭐 비석 조각을 해야겠구나 허연. 그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업을 한 거주.

이거 뭐 그렇다고 수요가 몰린다고 돈을 더 받을 수도 없는 거고, 그건 양심의 문제니까. 작업량이 한계가 있어요. 최대 성수기에는 종업원 고용도 해봐신디 종업원을 고용허민 이익도 엇고 주문받은 거 욕먹지 않게 납품하는 것, 그런 의무감에서 한 것 뿐이고. 35년 그런대로 소문나게 해왔주

Q. 비석을 많이 새기는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었나요?

손님이 그 저 수요는 언제냐? 제주도 풍습이 토속적으로 4월 5일이 청명인데, 청명이 좋은 날은 아닌디 그 관습적으로 청명날 비석 세운답시고 청명을 기준해서 미리 가을부터 주문이 와요.

“청명날 비석 세울 것이니까 주문합니다.”

앞으로 3,4개월은 명심하는 사람은 미리부터 와서 주문을 허고 뭐 어디 상점에서 물건 파는 돈만 가지고 가면 될 것 같으난 어떤 사람들은 뭐 당장 4월 5일 전에 일주일 전에 와서 해줍서.

“게민 못합니다. 이건 돈 받고 팔앙 확 파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해야 되난 일 헐 수 있는 기간이 있어야 돼요. 아무리 돈이 황금이 떨어졈댄 해도 그영 뭐 노력이 필요한 일이난.”

최고 성수기는 4월 5일 기준 해가지고 4월 3일까지는 완료를 해야 되는디. 이건 마지막 일주일이나 10일 안에 들어갔을 때는 진짜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주야 작업을 해여. 원체 숙달 되난 클자가 잘못 되거나 허진 않습니다. 그건 콤푸레샤 악세레다로 조정하니까 능숙하니까. 

생명체가 한계가 있는디, 52시간 이건 거짓말 같주마는 52시간을 밤낮을 안자고 했어요. 이건 뭐 나 자신이 영 골아도 거짓말 닮아. 딱 한번. 그냥 겁나. 집사람이 참 영양 보충을 잘해주고또 젊었으니까. 체력적으로 견딜 수 있었으니까 경해져신가. 지금 생각허민, 아이고 누게가 봐도 52시간 잠 안 잤다는 건 거짓말이라. 이거, 진짜라 진짜.

Q. 여자삼춘도 비석 새기는 사업에 역할을 했네요.

속담에 ‘서당 개도 3년이면 시를 읊은다’는 말이 있다시피 집사람의 내조가…, 반은 집사람이 햇어. 난 기술적인 거 하고. 잔잔한 일은 50퍼센트는 집사람이 했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집사람이 뭘 하느냐. 비석을 조각허민 글씨에 페인트칠을 헙니다. 집사람이 페인트칠하고 납품헐 때 포장을 집사람이 허고, 또 손님 왔을 때 접수받고. 이게 물건 접수가 아니고 글을 접수받기 때문에 이거 남 안티 맽기지 못해여. 꼭 나라야 돼여. 비문의 낙자, 오자 처음부터 시정하는 거, 그거 꼭 나가 해야 하는디. 기타 그 외에는 회사영 거래처영 비석 주문허는 것도 집사람이 전화로 몇 장 며칠까지 보내줍서. 집사람이 50프로 협조했다고 볼 수 있주. 나는 기술적인 것만 하고 그 효과가 있어요.

Q. 비석에 들어가는 글자수와 가격은 어떻습니까?

4x4cm 소자가 처음에는 10원이어신디 15원, 30원, 40원, 60원, 80원, 150원까지 올라갔주. 비석당 글자가 많으민 200자, 적으민 100자. 대자는 소자 가격의 10배. 대자 글자 수는 6~8글자.

내가 하루 비석 일 허민 여자 세 사람 고용하는 정도의 일당을 벌어서. 요즘 시세로 보면은, 요즘 여자 인건비가 8~9만 원이라. 내가 비석 일을 계속 한다고 할 때 25~30만원 번다는 계산이 나오지. 그때 돈 벌어서 아이들 교육시키는데 다 들어갔지. 빚도 엇고, 숨켜놓은 돈도 없
고, 보이는 거는 저것뿐. 자녀들 대학 졸업사진. 남은 소원은 건강하게 살앙 애들 괴롭히지 말앙 곱게 죽어지민, 거뿐.

시대가 변하면서 에어톨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게 됐지

Q. 각자 방법도 점차 변하여 갔나요?

처음에는 망치로 글씨를 새기다가 나중에는 에어톨로 작업하게 됐주. 처음에는 제주말로 끌, 징 허고 망치 수작업으로 한 10년. 10~15년 해졌나? 

그 다음에는 기술이 발달허니까, 에어톨이라고 콤프레셔가 공기를 압축시켜서 노즐로 공기를 배출시킵니다. 2마력짜리 콤프레셔면 50~60 압력으로 노즐을 통해가지고 공기 압력을 보냅니다. 에어톨이라는 도구가 이신디 속에 정이 박혀 있이요. 50~60의 압력으로 공기를 보내면 에어톨 안에 스프링이 작동해서 징이 앞뒤로 움직여요. 에어톨 작업은 1983년인가 85년쯤 시작했수다. 계난, 수작업이은 25년 정도. 합쳐서 35년 정도.

고정팔 장인이 비석 각자 작업 시 사용한 도구들.&nbsp;
고정팔 장인이 비석 각자 작업 시 사용한 도구들. 

Q. 각자하는 데 돌은 주로 어디 걸 쓰셨는지요?

산방산 돌로 하다가 오석으로 하기 시작했수다. 한 30여년 조각하는 동안 돌 생산하는 기간이 20년쯤 될 거우다. 산방산 돌을 못 쓰게 된 이유는 그게 안덕면 사계리 지역인데 안덕면에서 자연보호 차원에서 단속을 했어요. 자연 파괴된다고 단속하니까 이건 비석 만드는 사람들이지 우리는 관계없지마는. 산방산에서 생산할 수가 없게 되다 보니까 수요는 몰리고 공급은 못 하니까 어차피 오석을 주문해가지고 공급할 수 밖에. 경허연 육지 오석을 거래하게 된 거에요.

한 2년 동안은 산방산 돌 반, 육지 돌 반이 섞어탕이 되엇수다게. 갑자기 변하믄 안 되니까 이왕 계약해 놓은 것도 있고, 산방산에서 공급 안 된다고 해도 어물어물 어쩌다 재고품들 같은 걸 주문할 수가 잇어. 육지 걸 불러가지고 혼합해가지고 손님 취항에 따라서 다르니까. 산방산 돌로 새로 주문하는 사람은 안 합니다. 물건 공급을 못하니까.

1980년대 초반. 1981-82년도쯤, 80년, 81년 그 고비쯤 될 건디. 한 2년 산방산에서 오석 혼합하다가 나중에는 100프로 오석, 전북 함열오석이라고. 지금도 돌 나는지 모르겠는데 돌 참 좋아요. 충청남도 옹천이라고, 충남오석도 있고. 거기도 어떻게 자연보호로 생산자가 안 된다고 해가지고 전라남도 고홍, 남원에 오수라는 거래처도 많이 댕겼어요.

산방산 돌은 부드러우니까 수작업이 되는데
오석은 워낙 강도가 세니까 못해요

Q. 점차 오석을 주로 쓰게 됐나요?

왜 산방산 돌을 안 쓰고 오석 돌로 하게 됏냐 허면에. 산방산 돌은 부드러우니까 수작업으로 됩니다. 에어톨은 그 육지 그 중남오석이라고 충청남도, 전라북도 돌이 아주 강합니다. 그건 꼭 에어톨로만 팔 수가 있고 수작업으로는 돌이 원체 강도가 세니까 못해요.

에어톨이 산방산 돌은 되긴 되는데 아주 압력을 약하게 합니다. 노즐 차단기로 압력을 약하게 조정해가지고 좀 약하게. 그 오석 파는 것 추룩 해서는 다 박살나 버립니다. 돌이 물러노니까. 에어톨로 하면 아주 쉽죠. 뭐 능률도 오르고. 돌이 약하기 때문에 60이 압력이라면은 절반은 버려야주. 한 30 내지 35압력이라야만 됩니다. 50~60으로는 돌 박살 나버려. 수작업으로 하는 것보다는 에어톨로 작업하는 게 빠르주마씸, 빨라. 한 3배 정도는 빠른 거 닮아. 파는 것만은 빠른디 그 에어톨은 징이 아주 요동치난 공기는 30정도로 아주 느리게 해도 글자 가장자리가 매끈하지 안해여

파는 건 빠른디 나중에 징으로 가장자리를 곱게, 계란껍질 벗긴 것 추룩 해야만 A급 상품이 돼요. 에어톨로만 팡 내불민 글자가 되긴 되는디, 엉성허게 어디 긁힌 거 모냥 그런 식으로 돼여 상품으로 맨들젠 허민 반드시 징으로 각을 마무리를 해야 됩니다.

Q. 직접 돌 보러도 다니셨습니까?

그렇죠. 거래처를 왜 바꾸느냐? 그 생산지에서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자꾸 그 기간에 돌을 안 보내 주니까 나름대로 석재사에 가서 거래처를 만드는 거주. 많이 댕겼어, 전라남북도.

돌을 구입할 때 미리 선금을 주고 안 주고는 사람 나름인디. 돈 달라 그러지 않는데 며칠날까지 물건 보내주세요 그러면 송금하겠습니다. 믿어가지고 그게 다 한 번만 해나면은 그 다음엔 전화로 사이즈 얼마짜리, 몇 장 언제까지 보내주세요 허면 탁탁 보내줘. 게고 비석돌은 주로 조상과 관계되어서 사용되는 거니까 계약금이다 뭐 위반이다 투쟁하거나 그런 적은 거의 없어요. 어쩌다 비석을 찾아가지 않은 경우가 한 1프로 정도 되카?

나는 글 모양에 신경을 써,
난 글씨를 볼 줄 알거든

Q.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노하우가 있습니까?

그게 중요한데, 뭔가 수준에 오르다 보면 생각이 달라지고 꾀가 생겨. 어차피 상품을 만들어야겠다, 글의 모양이 삐틀어지든 바르든 글자는 글자지…. 모르는 사람은 그런가보다 하는디.

다 아는 건 아니지마는. 첫째 깊이 파야 되고, 둘째 모양이 좋아야 되고, 모양이고 뭐고 오래만 가면 된다고 그러지마는 사업적인 면에서 볼 때는 상품성이 가장 중요한 거여. 글 모양이 좋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글 모양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어요.

간판을 세무서에 등록할 때는 과세특례자로 ‘고정팔 비석조각소’ 라고 해서 상호를 사업자 등록을 내서 무슨 모양으로 간판을 할꼬 하다가…, 무슨 상회, 무슨 식당 전부 직각 90도 형태인데 나는 간판을 저렇게 하지 않겠다. 자연미 있게 글체 있게 하겠다. 경허연 간판 모양을 보려고 제주도 두 바퀼 돌았어.

목각으로 한 것들이 잇어. 문중회니 뭐 동창회…, 그걸 유심히 봤주. 

아, 나는 목각 간판을 해야겠다. 목각하는 데가 이신디 글씨가 맘에 들어가지고 ‘고정팔 비석조각소’ 해가지고 간판을 했지. 간판도 하나의 상징성이 있어.

첫째 글 모양이다. 그것에 신경을 많이 썬. 그 왜 그 모양에 신경쓰냐면은 손님이 올 때는 마을이면 이장, 문중이면 종손 아니민 훈장, 문장 대표자들이거든. 다 아는 수준 있는 사람들이 오니까 그런 사람 말 한 마디 입소문이 굉장히 선전효과가 돼여. 입소문이 잘 나야. 나 생각이 적중하는구나, 손님들이 고 사장 글 잘 써, 잘 써 하시는데 글 잘 쓴 것이 아니라 글 볼 줄 아니까. 글 볼 줄 아는 사람은 기술이 늘어. 글 볼 줄 모르는 사람은 10년이 가도 몰라. 그게 가장 중요한 거여.

Q. 서예가한테 글자를 받아오는 거하고도 차이가 있습니까?

자필을 못하니까 경허는 건디. 자필을 해야 되는 이유가 남한테 글 빌어쓴다는 게 그게 지출이 되여분단 말이지, 공짜가 아니여. 한 두장은 좋은디 연달아 수십 장, 수백 장을 어떻게 남 빌엉 쓰냔 말이지. 그것도 못할 노릇이라. 시간상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있고. 참 그게 자필 못하면은 경영자가 될 수가 엇어. 요즘은 컴퓨터로 글 써주난 자필 못해도 기계가 글 써주니까 되는데, 꼭 자필을 해야 돼여. 자필 해야 쉽고.

비문 작성, 낙자 오자 없이 어찌 보면 까다로운 일이주. 비문 작성 낙자 오자 누가 알아야 뭐 모르는 사람은 틀렸는지 마는지 손님만 밑지고가. 경헌디 그걸 왜 그렇게 신경 써야 되느냐. 일대일로 두 사람끼리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10년, 20년, 100년 만고에 잇일 건디, 다른 사람이 평가한단 말이라. 잘못되면 나의 책임, 잘못이 나에게 엇어도 결국엔 내 잘못이 돼부러.
경허난 요즘 공동묘지 돌아보민 그 참 글 틀린 게 많아. 그게 왜 틀리지 말아야 허냐면. 우리가 죽어불민 후손에게 평가를 받는다고. 우리 어느 조상 때 이 정도라났구나. 후손에게 평가 받으민 얼마나 불명예라. 경해도 몰르난 감사합니다 허멍 돈 주고, 멋지게 가족공동 묘지에 설치해신디 참 글들 많이 틀려. 모르니까 무사통과라.

아이들 교육시킨 것이 가장 큰 보람이고,
난 한문을 잘 알이. 천자문 노래를 불러낫어

Q. 각자 일을 하시면서 어떤 때 보람을 느끼셨습니까?

애들 교육시킨 거 하고, 자랑 같지만 내가 공부를 안 했주만, “한문은 모르는 거 이시민 고정팔이에게 물어보라.” 주위에서 그렇게 말들을 해여. 내가 지금 나이가 84살인디 이제 한문 쓰지 안 해도 되주마는 어제도 고문서 같은 걸 발굴할 때는 모른단 말이지 나에게 물어봐 한문들. 그걸 내가 골아주고 이상하게 입소문이 나가지고.

내가 고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마는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일주일에 4시간 한문을 배웠어요. 그런대로 한문에 취미가 있어 획수 많아도 취미가 있어서 한문만 하면 무조건 100점이라. 한문 획수가 많아도 어려운 게 아니여서. 한문은 뜻글이라, 한글은 소리 글이고. 한문은 뜻을 알아야 하고 글자 구조는 획수가 많고 복잡한 것도 분해하민 복잡한 거 아니주게.

고정팔 장인이 자신의 비석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nbsp;&nbsp;
고정팔 장인이 자신의 비석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권세 권(權)자’ 봅시다. 획 수 얼마나 많아요? 나무(木) 옆에다가 풀 초(艸). 입 구(口) 두 개, 밑에 세 초(焦), 합치민 권세 권(權) 자가 된단 말이여. 분해허면은 간단한 거라. 복잡한 거 닮아도. 그건 그렇고 나무 목이 들어갔을 때는 나무에 관계된 거여. 삼수변 있으면 물에 관계되고, 입 구가 포함되면 말에 관련된 거고, 말씀 언(름)에 들어가면 말에 관계된 거고…, 게난 쉬워 한문이. 거의 이런 식이라. 말 갖당 붙이민 연결되고 어려운 거 아니주게.

Q. 한문을 잘 아셨네요

자꾸 한문 한문(漢文) 하는데 이거 나냥으로 곧젠허난 쑥스럽주만. 상 받지 못하는 우등생이라 내가. 상을 못 받안게. 항상 한문은 상위권에서 노는디 1등이 못 돼여. 우리 학년 126명 안에서 20등, 15등 안에서만 감돌아서 상을 못 받아. 한 과목 잘해도 필요엇어. 합쳐서 평균을 때리니까 상 받을 점수가 못 되여. 중학교 1학년 때 천자문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러나서. 하늘 천(天) 따 지(地) 감을 현(玄) 누르 황(黃)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이런 식으로 흥청망청 허멍 끄트머리에 언제 호야라. 심심허난. 그 노래도 노래지마는 한문 구조설명도 허고. 하도 내가 천자문 노래 불러가니까 동네친구들이 너, 글자 질문허민 알아질래? 어,너 질문해봐.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라나서. 천자문 보명 물어보민 어느 페이지 어느 칸에 있는 글자인지까지 내가 아는 사람이라. 그건 왜냐? 외울 방법이 이서. 4x4=16이라 한 페이지가 16자라. 4416 허민 두 번째 줄, 세 번째 줄 다 외우게 되어 이서게. 규칙이니까. 몇 페이지 가운데 줄 몇 번째다, 이거까지 난 다 안 사람이라. 15, 16살에 참 신기허여.

4.3사태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대정골에서 한학(漢學), 요즘으로 선생이주게, 서장(書長)이라서. 문하생 50~60명 배출시켰고. 아버지안티 글들 배우러 오고. 대정골에서는 아주 조예가 깊었주. 아버지 유전인자 물려받아진 거 닮아.

한창주 교장 선생님이라고 잊어불질 안히여.
나한테는 은인이라 하고 싶을 정도라.

Q. 돌각자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 말해주십시오.

기억에 남는 전. 오히려 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게 잇어. 1980년대 초반이나 산방산 돌 자연석인데 모양은 우리나라 지도 모양이고 글 팔 부분만 매끈하게 가공해서 글 파는 거라. 비석돌은 조이전 씨가 자연석 비석을 만들어신디. 그 글 내용이 무엇인고 허민 국민교육현장. 박정희 정권 때 전국적으로 학생들 외우라고 해신디.

국민교육현장을 새겨탈라고 서커포 보목국민학교에서 주문이 와서. 감사합니다 허면서 구두로 계약을 허고 제작을 허는디. 중간에 그 교장이영 서무계 직원이영 둘이 구경을 왔어. 글 다 새졌다고 연락허니까 구경을 왓는디. 딱 읽어보더니,

“아이쿠, 이거 글 틀렸습니다.”
“어딥니까?”

국민학교 학습장에 나온 국민교육헌장 원고를 나는 읽고 선생님은 비문을 쳐다보는디. 쫙 읽고 내리는디, 딱 읽고 나니까 글자는 다 맞아신디….

한장주 교장 선생님이라고 잊어불질 안허여. 아, 그 선생이. 아, 나한테는 은인이라 하고 싶을 정도라.

“고 사장, 이게 글자가 틀린 게 아니라 위치가 틀렸다.”

뭐냐 허면 국민교육현장은 삼단으로 되어 잇어. 처음에 서론은 ‘우리는 민족중홍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본론은 성실한 마음과 이게 본론. 결론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 1,2,3단으로 되어 잇어이.

여기 신문에 글을 봐도 여기 여분이 있지만 남겨두고 여기 와서 쓴단 말이지. 연달아 쓸 거지만 바꾸는 게 다 이유가 있주게. 이와 마잔가지로 국민교육헌장도 3단으로 되어 잇어 이게,

교장 선생님은 글자 위치가 틀렸습니다 그래. 아, 왜입니까? 학습장을 보니까 2단으로 되어 잇어 이게. 일단과 이단을 한 묶음으로 반공을…, 한 묶음으로 해서 두 단으로 되어 잇어. 글이 서론, 본론, 결론이 안 되었습니다 이거라.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보십시오. 학습장에는 2단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이대로 했단 말이여. 하, 참. 그 선생님 똑똑도 허대.

이것은 회사에서 학생들에게 호감 사서 매상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써논 거지 이걸 인정할 수가 없다 이거라. 하, 그러니까 그 말도 맞아. 교육적으로 안 된단 말이여. 3단인데 2단이니까.

“이건 인정 못합니다. 문교부 발행 독본이라야 합니다.”

허는 거라. 문교부 독본을 보니 3단으로 되어 잇어. 할 말이 없단 말이여. 내 말인즉은 선생이 저한테 비문을 주문할 때에 원고를 인계해 주셨습니까 하니, 아니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민교육헌장도 모르카부댄 꼭 비문을 인계해야 합니까. 이렇게 또 나온단 말이여. 아, 그 말도 맞다 말이여.

나 말도 맞고 그 말도 맞은 거라. 문교부 발행 독본 딱 보니까 그 선생 말이 맞아. 하 이젠 딱 따졍은 이겨질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는 내가 진거라. 야 그 때 글자가 500~600자 정도 될 거라. 한창 바쁜 농번기에 3,4일인가 조각해가지고 며칠 세운다고 제막 날짜도 정해 놓고 하니까 아, 이거 두 번 새기기가…, 할 말이 없다 이거라.

“정 그러시면은 제가 이 조각비 안 받겠습니다. 그대로 가서 세우십시오.”

선생님의 말씀이 “틀린 내용을 어떻게 아동들에게 교육시킵니까. 이대로 교육시킬 수가 없습니다. 독본대로 해주십시오.”

이거라게. 공짜로 세우라고 해도 안 허겠다는 거라. 그 말도 맞아. 어떻게 억울한지. 한두 시간,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공들여 파논 걸.

마침 그때 가을철인디 보리 파종기로 농사 많이 혈 때난 이것 때문에 농사도 10일 보름 정도 늦당 보난 보리농사도 망처 불고 이건 이거대로 손해 보고. 인건비만 손해 본 거. 돌은 글씨 부분을 갈아내면 안 버리고 재활용이 되게끔 되어 잇어.

빗돌허는 조이전 형님안티 이 가공비 얼마우꽈 허니까. 아시가 경 손해 많이 가는디 돈 받아져게. 허명 공짜로 해주더구만. 며칠 두불 일허곡 보리 늦게 파종해부난 보리농사 잘 안 되곡 어떻게나 애석헌지.

사람이 한 번 당해나야 돼,
돈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손해보지만 그게 거울이 되는 거라

경허나 이건 정말로 돈으로나 정신적으로 손해봤지마는 이번 한 교장 선생님 일은 나한테 거울이다. 절대 내가 앞으로 낙자 오자 없게 한다는 마음이 콱 박혔어. 경허연 비문 인계받을 땐 철저허여, 철저허여. 비문 인계받을 땐 철저하게 받고 비문을 비석에 옮겨 적을 맨 최소 다섯 번은 읽어.

그 다음엔 일절 실수를 안 해봐서. 모르는 사람은 틀려도 인수받아 그대로 세워 부러. 그날은 통과됐주마는 먼 훗날에 나타나면은 업자한테 욕이 되부러. 이건 나한텐 굉장히 거울 되는 일이라. 게난 한 번 얼 먹을 맨 얼 먹어봐사. 난 한창주 교장 선생님께 고맙게 생각허주. 나한테는 거울과 같은 존재라는 거. 상당히 의미 깊은 말이여이. 사람이 한 번 당해나야 돼. 그게 기억에 남고이.

일해서 자식들 교육시킨 거, 한창주 교장선생님께 욕 들어진 거, 서귀포 사람 어디 호근리 사람 사법시험 그 당시는 고등고시라고 해나서. 그 분이 고등고시 합격해서 쓴 글이 잇어. 내가 신문인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도 모르주마는 그 고등고시 합격되영 면접시험 볼 때 글 쓴 걸 읽은 기억이 나. 앞의 사람한테 면접관이 테이블 두 개 위에 각각 사과를 놓고 한쪽 테이블은 이 사과 위치는 상점이다 말해 놓고, 사과를 가르키면서 이거는 뭐냐? 하니까 처음 수험생이 사과입니다. 둘 다 사과입니다.

다음이 자기 차례라. 처음 것은 사과입니다. 그럼 이것은 뭐냐? 이것은 팔기 위한 상품 사과입니다. 라고 말한 거라. 이래도 사과, 저래도 사과라고 말한 사람은 불합격하고 팔기 위한 상품 사과라고 말한 것에 합격된 거라.

2022년 돌빛나예술학교에서 장인이 진행한 돌각자 기능 전수 교육 모습.
2022년 돌빛나예술학교에서 장인이 진행한 돌각자 기능 전수 교육 모습.

같은 사과를 놓고도. 상품이다라는 건 참 의미가 깊어. 꼭 같은 거를 가지고 상품이냐 아니냐. 즉 나 같은 업자 입장에서는 비석이 손님에게 인계될 때까지는 상품이다. 인계되고 난 다음에야 물건이지. 그래서 그 글이 굉장히 의미 있는 거. 이래도 사과, 저래도 사과라는 사람은 불합격. 잊어불질 안 허여,

그리고 그게 보람이 돼가지고 비석돌은 육지에서 주문하는데 상석 같은 것은 제주돌로 하는 데 영락리도 있고 남원에도 석재사가 이서. 배달해 달라고 하니까 인부들 데리고 와가지고 확 하고 푸길래, 조심해서 퍼야 허는디 탁탁하고 푸길래 요매니 투다져. 경허난 내가 짜증냈어.

“형씨네 이거 상품이요 상품. 형씨네는 평 가민 그만이주만 난 파는 상품인디 영 투다지민 상품 아니지 않느냐. 이건 빼라고!”

나한테 책임자가 욕들언. 아직 돈은 안 준 때라. 돈 줘시민 그 사람이 뭉 썼으면 나만 손해인데 일단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상품 아니요? 이거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상품이냐 아니냐는 굉장히 중요한 거. 애들 교육시킨 거, 한 교장한테 욕들은 거, 상품성 사과 말한 거에서 많이 배웠고 잊어불지 안해져. 나쁘게 말허믄 까다로운 거주게. 그건 나를 위해서 제일 중요헌 거.

그 가루 먹으멍 35년, 작은 세월이라
정말 보람을 느껴

Q. 일 하다가 다치거나 아팠던 적은 없었나요?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엇인디 52시간 안 잔 거 딱 한 번인디. 경해도 다행히 음식이나 영양관리 잘 해줘가지고 건강을 유지해신디 지금 생각허민 겁나. 이게 그 집안 청소나 창고 청소는 한두 시간이믄 끝나주만 이건 문 딱 닫고 콤프레셔 돌리멍 계속 작업헌다는 게, 그 먼지!

낮엔 모르는디 밤엔 전기불 싸난에 대기 중에 그 미세먼지가 날아다니는 게 보여. 그걸 내가 마셨구나 생각허니까 겁이 나. 마스크 끼면 되지 않으냐 허는데, 마스크 끼고 안경 쓰기 때문에 압력 세게 넣으면 돌가루가 튀영 눈에 들어오난 도수 엇인 안경을 꼭 껴야 해. 먼지 막기 위해서. 꼭 안경은 필수적으로. 먼지는 막아지는데 입김 때문에 안경이 뿌영해분다. 게민 마스크를 낄 수가 엇어. 밤에 전기불 키고 가만히 보민 햐, 저 먼지를 내가 마시면서…, 119에 나온거 보민 겁나, 겁나. 이거 폐병, 기관지병 걸리기 5분 전이라.

이걸 어떵 해소허느냐. 그때 나 술을 배워졌는디 술이영 돼지고기. 술은 원래는 안 권허주마는 그때는 어려울 때난 손님이 계약허고 나민 수고해달라고 잘 부탁한다고 최고 대접이 술 한 잔 합시다, 이거라. 요즘은 커피 한 잔 합시다. 식사나 한끼 합시다 허는디. 그때는 술 한 잔 허는 게 최고 인사라.

경헌디 인사를 아니 받을 수도 엇고 한 잔씩 두 잔씩 허당 보난… 참, 이 건강에 먼지 먹는 거. 애들 교육도 다 시키고 결혼도 다 시키고 나니까 내가 64세에 폐업해부러신디. 애들이 아버지 돈 허영 뭣 허쿠가? 저 먼지 먹으멍. 일 해서 뭣 하겠냐고 해서 한 10년은 더 해질 거 같아도 애들이 하도 강경허게 못허게 허난에, 아니지 더 벌고 싶다고 해도 더 벌수도 엇어.

우린 노동 사업이난 한계가 잇어. 만약에 이게 장사 같으면은 곱은 벌어질 것 같아. 돈 받고 물건만 내치민 되난. 이건 자기가 하지 못하민 필요가 엇어. 또 성수기에는 끼어들기로 해가지고 못하겠습니다 허민 돈 주켄 해여그냉에 꼭 해주랜 허는 사람들이 잇어.

돈 더 준다고 해서 더 받아서 시간적으로 할 수도 없지마는 허였다고 가정허여 봅시다. 그 손님 그 순간에는 감사하지마는 그디강 얼마줭 해 완? 딱 나는 단가 그렇게 비싸게 받는 걸로 알아버린단 말이지. 사실상 마이나스라. 그 몇 장 허지 말아불지. 바쁘다고 절대 돈 더 받아불민 안 돼여. 양심, 자기 이미지, 바쁘다고 더 받아봐. 사업 오래 안 가요.

정상적으로 최대한 서비스를 더 해야 되지, 일반 장사꾼 뜨내기는 그럴 수도 있겠지. 미래를 봐선 절대 그러선 안돼. 경허난 사업장이 길어지는 거라. 아마 도내에서 비석 쪽으로는 내가 제일 오래 해실 거라. 대개는 5년씩 하다가 간판 떼버리고 허는디. 35년 작은 세월이냐 이거 정말 보람 느껴. 마음과 기술과 변함없이. 양심이라고나 할까 고지식하다고나 할까. 이건 확실해. 지금도 마찬가지. 절대로 남에게 거짓이나 위장할 줄 몰라. 절대 돈에 현흑돼가지고 돈 된다고 그레 안 간다고. 이건 나 정말 자부허주. 평생 살면서 술 먹어도 놈 괴롭혀 보거나, 어디 가게 방에 강 외상행 괴롭히거나, 내가 내면 내가 냈지 남에게 얻어먹엉 신세 끼쳐보질 안 해서. 정신 수양도 되고 보람 이서. 자신허주. 정말 후회 엇어.

우연히 아무런 목적엇이 소일거리로 허단 보난 손기술이 이시난 그 기능이 자연히 수준에 올라가고. 이것이 끝나고 나니까 내 이름이 남으니까 보람을 느껴. 그것에 만족합니다. 나의 작품이 영원히 존재하는구나. 이런 것에 내가 보람을 느껴. 후회도 엇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예술적 감각을 느껴가지고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생각도 엇고 그런 수준도 못된 사람이고. 공동묘지에 가민 내 작품들이 이신디 좀 오래 몇 백 년 남아져시민 허는, 그런 게 잇어. 우리  후손들이라도 우리 몇 대 할아버지가 영 해났구나 허는 게 남아시민 허여. 애들 공부시켜 가지고 잘 키워진 거. 뭐 이런게 보람이지.

2022년 돌빛나예술학교 돌각자 기능 전수 교육에 참여한 강사, 참가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br>
2022년 돌빛나예술학교 돌각자 기능 전수 교육에 참여한 강사, 참가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나의 아버지를 말한다]

자식들에게는 무한한 사랑,
부모님께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존경심을 주신 나의 아버지

아들 고석빈

이토록 지극한 희생과 사랑이 하늘 아래 있을까.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다가오는 감정은 바로 희생과 사랑이다. 

아버지는 슬하에 6남매를 두셨다. 우리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쇠막(소 외양간)을 고친 바깥채의 한견에서 하루 종일 비석에 글을 새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집에는 늘 손님들이 들락거렸고, 아버지는 뭔가 폼 나는 내용의 글을 그분들께 설명해 주셨다. 일부러 옆에 가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깨가 으쓱해졌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즈음, 아버지는 작업장을 ‘비석거리’로 옮기셨다. 버스 정류장이 옆에 있고 교통량이 많은 위치였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팽나무와 평상이 있었다. 동네 아저씨들이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고 쉬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아버지는 그 곳의 어느 조그마한 창고를 빌리셔서 글을 새기셨다. 동네 어른들이 쉬는 평상에서 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장소였다. 조그맣고 바람도 들지 않는 그 곳은 항상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회색 돌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버지께서 아침저녁으로 치우시는 데도 눈처럼 쌓인 돌가루는 여전했다.

그 곳에서 맞은편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을 바라보면 천국의 모습이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쐬며 그늘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동네 사람들과 조그마한 작업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시며 일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많이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비석 새기시는 일 그만두시라고, 건강을 생각하시라고 자식들이 강권드릴 때마다 아버지는 “너네 6남매만 잘 커주면 된다. 6남매 대학 들어가면 그만 둘 생각이여. 아마 그때 쯤이민 내 폐 속은 다 망가져 이실거여만…, 나 걱정을 말고 공부나 열심히 허라.” 아무리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이런 사랑이 있을까 싶었다. 아버지의 희생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약속대로 막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비석 일을 그만두셨다. 그러고 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병원에 가셔서 페 검사를 하신 일이었다. 당신도 얼마나 불안하시고 궁금하셨을까. 자식들을 위해서 생명을 담보로 일을 하신 것이었다.

“평소에 검사하시지 이제서야 하시냐?”
“미리 허영 폐에 이상 있댄 허민 어떵허느니. 너희들 키워사 허는디…”

아버지의 말씀에 다시 마음이 아팠다. 다행히, 아버지의 폐는 여느 정상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이 깨끗했다. 어머니께서 항상 모슬포 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사 오시는 등 아버지를 보필하신 것도 큰 역할이었을 것이다.

자식 사랑 못지않게 아버지가 평생 간직하시는 것은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존경이다. 어린 나이에 나의 할아버지, 즉 당신의 아버지가 4.3의 풍파로 세상을 하직하셨으니 그리움은 당연할 것이다. 그 사무침을 보고 있으면 안쓰러울 정도다. 나라면 과연 그런 그리움과 존경이 생겨났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해봤다. 오히려 자식들과 함께 도망치시는 길을 택하지 않으신 할아버지가 원망스럽다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린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오히려 차근차근 시대 상황을 설명하시면서 할아버지의 정당성을 설명하시는 아버지는 진정한 효자의 모습이었다.

이제 아버지의 연세가 만 84세이시다. 나에게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자식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주셨고,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평생 사무치는 그리움과 존경심을 보여주셨던 분이다. 자식으로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아버지의 삶에서 자식이나 당신의 부모님을 내려놓고 당신을 위한 당신의 삶을 즐겁게 사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 아버지여서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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