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45) 단풍 한 잎 가볍게 놓여

 

단풍 한 잎 가볍게 놓여

누구에게 내려 보낸 속달우편물일까
잠 설친 아침계단에 하늘나라 소인이 찍힌
황금색 상형문자의 단풍 한 잎 가볍게 놓여

오소소… 건강치 못한 그믐달이 이우는 창에
날 새면 하나 둘씩 불려가는 순종의 목숨
천상의 부적을 뗀다, 은행잎이 또 진다

가지 끝 바람이 와 내 여죄를 다그치고
반타작 삽날 위에 명줄처럼 금이 간 햇살
체부遞夫가 한천에서  내린 
등기 한 통을 건네고 간다

/1998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1998년 겨울초엽, 작품 한 편 쓰려고, 하얗게 밤을 새고 아침계단을 내려오는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단풍 한 잎이 시멘트 계단에 놓여있었습니다. 대출금 상환 독촉장, 미납 세금 독촉장 등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상황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속달우편물에는 엉뚱하게도 황금색으로 테를 두른 하늘나라 소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하늘우편집중국 집배원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단풍잎이 선뜻 시 한편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때 우리말, 우리 시형인 시조로 받아쓴 것이 세 수 연시조인 「단풍 한 잎 가볍게 놓여」입니다.

이 계절이 되면, 은행나무는 도처에서 노랗게 단풍든 잎들처럼 결 고운 작품들을 건네주곤 합니다. 그 무렵, 천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다는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는 고찰, 운문사에 갔을 때 일이었습니다. 그때 대웅전 마당을 쓸고 있는 젊은 스님께 합장 인사를 하고 그 은행나무를 보러 왔다고 여쭙자, 마치 부처님 이목구비의 그 젊은 스님이 그 은행나무 구간은 아직 개방되지 않다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나무도 성불한다는 시월상달 운문사 가면

일제히 날개를 접는 수천수만의 나비 나비

부처가 맨발로 내려와 대웅전 마당을 쓸고 있었네.

-「부처가 맨발로 내려와」 전문

그 은행나무의 본체는 물론 거목의 낙엽 지는 모습을 본 것처럼 이 단시조 한 편을 썼습니다. 그로부터 오년 후, 서울의 어느 중량감 있는 문학상에 “그 은행나무 구간은 개방되지 않아서 어떡하지요?” 안타까워 하셨던 부처님 이목구비의 나이어린 그 스님을 “부처가 맨발로 내려와 대웅전 마당을 쓸고 있었다.”로 묘사된 단시조 한 편이 수상작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상 심사위원장을 맡은 원로 시인은 수상작 「백록을 기다리며」 외 4편의 심사소감에 이 작품 중 “부처가 맨발로 내려와 대웅전 마당을 쓸고 있었네.”라는 부분을 집중 거론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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