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수'의 한 장면. / 사진=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누리집
영화 '포수'의 한 장면. / 사진=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누리집

양지훈 감독의 ‘포수’가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한국 경쟁 부문 단편 대상을 받았다. ‘4.3영화제’가 11월 24일~25일 CGV제주에서 상영한다. 24일에는 양지훈 감독과 대화도 진행한다. 놓치지 않길 바란다. 

전통적인 기호와 도덕, 권위를 뒤집고 혁신적인 영화 언어를 모색하는 태도를 ‘모더니즘(modernism)’이라고 한다면, ‘포수’는 ‘모더니즘 4.3영화’다. 

‘포수’는 전통적인 4.3영화 언어를 해체한다. 관습적으로 쓰인 4.3영화의 기호와 상징을 재해석·재배치한다. 4.3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펼친다. 분명한 건, 4.3영화의 새로운 길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포수’를 가급적 저녁에 보길 권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술이 무척 땡길 테니. 양지훈은 할아버지 서옥과 술을 마신다. 할아버지가 꽁꽁 숨긴 ‘그 때’의 비밀을 듣기 위해서다. 

그동안 4.3영화에서 ‘술’은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용도였다. 제사의 이미지를 완성하는 대표 기호였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음복하면서 4.3의 공동 의무를 각인했다. 

‘포수’에서 술은 완전히 다른 용도로 쓰인다. 욕망을 충족하는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 종류 상관없다. 소주, 맥주, 막걸리를 잇따라 채운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벌게진 채 수입 맥주 브랜드 이름을 궁금해하며 거침없이 들이킨다. 

할아버지가 술을 향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취기에 담긴 질곡의 시간이 피어오른다. 4.3의 공론장에서 밀려나 피‧가해의 경계에 고독하게 앉아있는 한 사람의 초상을 본다. 

제단에 올려진 술잔에 대중의 관심이 몰릴 때 할아버지는 홀로 술을 마시며 고통을 견뎠다. 이를 헤아릴 때 울컥함이 밀려온다. 

증언

증언이 기록되는 주 무대는 할아버지 집 안방과 마당이다. 마당에서 할아버지는 불을 피우고 돼지고기를 올린다. 때론 안방에서 치킨을 뜯는다. 술은 손자의 몫이다. 

증언에는 꼭 취기가 따라온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 술로 입막음한다. 

‘포수’는 비장한 클로즈업과 숭고함의 색채로 채워진 기존 4.3영화의 증언 이미지를  해체한다. 양지훈은 술을 먹다가도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으면 카메라를 들이댄다. 소통의 경계를 지우기 위해 익살의 율동을 선보이기도 한다.

마치 ‘무한도전’, ‘런닝맨’ 등의 ‘리얼버라이어티 쇼’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증언의 이미지는 날것 그대로이고, 엄숙하기보단 유쾌하다. 

중요한 건, 감독은 증언의 ‘결과’에 몰두하지 않고, 증언의 ‘과정’을 존중한다. 할아버지가 진실의 조각을 툭툭 던질 때, 더 많은 결과를 얻기 위해 무리하게 증언을 요구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증언을 결단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포수’는 4.3영화의 중심은 증언이 아닌, 증언을 품고 있는 할아버지 즉, ‘사람’임을 강조한다. 

DMZ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장면이 있다. 할아버지가 4.3의 기억을 되짚기 위해 오름을 오른다. 카메라는 할아버지가 쓴 모자를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모자에는 놀라운 단어가 적혔다. ‘Texas(텍사스)’. 

텍사스가 어떤 곳인가. 미국 내에서도 총기 휴대 자유가 폭넓게 허용되는 곳이다. 그만큼 더 큰 비극이 따르고 있다. 지난해에도 텍사스 한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참사가 벌어졌다. 

4.3영화에서 ‘총’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는 결정적 증거이자 상징이다. 오멸 감독의 ‘지슬’ 포스터를 떠올려 보라. 총을 사이에 두고 군인과 주민이 마주섰다. 당연히 총을 든 사람은 군인이다.

제목 ‘포수’에서 알 수 있듯이 할아버지에게 총은 피·가해를 나눌 수 없는 부조리의 기억이자, 너무나 아프고 슬픈 기억이다. 

감독이 작심하며 보여준 ‘Texas’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4‧3과 ‘총’의 직접 책임이 있는 미국에 대한 풍자적인 고발이다. 75년 전에도, 지금도, 국가가 허용한 총에 의해 피·가해자가 나뉘는 국가 폭력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총의 관점으로 피·가해의 경계를 넘어 4.3을 더욱 통찰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그만큼 ‘포수’의 성취는 상당하다. / 4.3영화제 이정원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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