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작가 서안나, 다섯 번째 시집 ‘애월’ 발간

제주 작가 서안나가 새 시집 ‘애월’(여우난)을 펴냈다. 

시인은 다섯 번째 시집 제목을 ‘애월’로 지은 이유에 대해 “애월이 지니는 특수성과 장소성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라며 “애월은 제주의 지명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거느린 곳이다. 하지만 애월은 그 아름다운 풍광 뒤편에 근대사의 비극을 흉터처럼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현재에도 제주의 4.3 사건처럼, 중국 신장 지역의 포로수용소,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상, 10.26 참사 등, 전쟁과 인권 유린과 양민 학살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제주 사람들의 아픔과 양민학살의 참상이 깃든 지역을 작품 속에 조명해보고자 시집 제목을 ‘애월’로 정했다”고 강조했다. 

시인은 “시집이 출간되는 계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주기가 되는 해”라며 “한없이 다정하셨던 아버지는 분명, 그곳에서 따스하고 넉넉한 제주 바다 같은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을 것이다. 못난 내 시집을 나보다 더 아껴주셨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감을 덧붙였다.


애월, 공무도하
서안나

1

호스피스 병동에서 바라보는 밤은 왜 사무적인 걸까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 앞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2

고레다 히로즈의 영화를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를 나눈다는 건 무엇일까

3

침대에 기대어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할 때
왜 먼지 냄새가 나는 걸까
병실 창밖에는 메마른 구름비나무 한 그루

4

아픈 사람은 5층 같아서 
걸어 올라가다 보면 내가 먼저 지치지
간병은 지루하고
지친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은 구별하기가 어려워
나는 새벽에 병원 지하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인간의 존엄함에 대하여 생각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병실의 시간과 창밖의 구름들
나는 구름을 쳐다보며 
어떤 기적 같은 형상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이 저녁 
병자들은 무용하여 아름답고
저녁의 문장은 링거처럼 맑고 차갑지
물 끝에 아스라이 서 계신
당신, 

공무도하
공경도하


밤의 애플민트
서안나

밤에 애플민트를 꺾었다
꺾은 자리가 떨렸다
실직한 이와 오랜만에 만난 술자리였다

김 모 시인이 말했다
여리고 푸른 것들은 
쓰다듬어 손으로 향기를 맡는 거라고 

술집 유리창에 발이 사라진 
나와 일행이 허공에 떠 있었다
실직한 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집단 학살터였던 박성내 다리 앞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나를 
실직한 자의 밤을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제9 연대 군인 트럭에 실려와 
집단 학살된 백 오십 명의 맨발을  

이지러진 밤의 애플민트가 
사과 향기로 어루만져 주는 밤

그 여리고 푸른 것들 앞에
내 무심한 폭력을 내려놓는다
다시는 풀과 꽃을 꺾지 않으리

*박성내 다리 : 4.3사건 때 함덕국민학교에 모인 와흘, 함덕 등의 주민들 300여 명 중,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150여명을 철사로 묶어 트럭에 태웠다. 제9연대 3대대는 제주시 아라동 박성내 다리에서 이들 모두 집단 학살하고 시체는 불태웠다.


해설 쓴 이홍섭 시인은 “1950년 현 제주국제공항 자리에서 자행된 집단 학살과 암매장을 고발하고 있는 앞의 시에서 시인은 ‘죽음을 밟지 않고 제주에 착륙할 수 없다’와 ‘죽음을 껴안지 않고는 제주를 떠날 수 없다’라고 통렬하게 말한다”면서 “시인은 ‘고백은 고백할수록 더 참혹해’지지만, 이런 추악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추악함을 견뎌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시인은 제주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발함과 더불어 제주어의 발견을 통해 제주도의 원형과 서사를 조명한다”고 호평했다.

서안나는 1990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 등을 펴냈다. 평론집(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정의홍 선집 1·2, 전숙희 수필선집), 동시집(엄마는 외계인)도 펴냈다. 불교문예 작품상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서쪽’ 동인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136쪽, 시인수첩,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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