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변종수 1인극 ‘점쟁이 곽씨’

멋진 1인극(모노드라마)은 흡사 농축된 인생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비단, 배우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주어진 역에 몰입하는 모습은, 마치 현미경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배우 특징들이 더 크게 각인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직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형태,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 희로애락부터 삼라만상까지 전하는 말.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융합시켜 무대라는 특별한 공간을 홀로 누빌 때, 관객은 여럿이 등장하는 극에서 느끼기 힘든 특별한 경험을 마주한다. 

1985년부터 연극을 시작한 제주 배우 변종수가 생애 첫 1인극을 공연했다. 9~10일 소극장 문화놀이터 도채비에서 공연한 ‘점쟁이 곽씨’다. 설문대할망, 자청비, 김만덕을 모시며 용한 솜씨를 뽐내는 제주 점쟁이 곽씨 하루를 보여준다. 

지난 9일 열린 변종수 모노드라마 '점쟁이 곽씨'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지난 9일 열린 변종수 모노드라마 '점쟁이 곽씨' 무대 인사 장면.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대대로 이어온 신내림을 거부하다간 가족 구성원이 큰 화를 입게 될 처지에 놓인다. 어쩔 수 없이 곽씨가 천운을 받아들이면서 30년 째 점쟁이로 활약 중이다. 곽씨는 시기·질투를 부추기는 귀신을 쫓아내고, 유품에 손을 대는 고약한 사설 구급차 운전사를 호통친다. 죽어서도 미안함에 자녀를 떠나지 못하는 아버지도 빙의해 위로한다. 때로는 요란하게 때로는 눈물로 통곡하며 할 일을 마친 곽씨는 “모두 넋들라”는 인사를 남긴다.

‘점쟁이 곽씨’는 무엇보다 변종수의 빼어난 개인기가 돋보인다. 산 자와 죽은 자, 남자와 여자, 나이 차이를 뛰어넘으며 저마다 사연을 지닌 인물에 빙의하면서 울고 웃기는 연기 재주, 점 종류를 줄줄이 읊는 말재주, 아픔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재주까지. 종횡무진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무대 위를 누빈다. 

다만, 이야기는 연기 능력과 비교하면 무르다는 인상을 줬다. 작품은 각각의 사연들이 하나씩 등장하면서 옴니버스(omnibus) 구성을 띄고 있는데, 마무리마저 “점쟁이는 모난 인간관계를 다듬어주는 역할”이라는 식의 인사말 정도에 그치면서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서사가 없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점쟁이 곽씨’는 변종수가 직접 썼다. 그가 소개글에서도 밝혔듯이, 언젠가 1인극 ‘염쟁이 유씨’를 보고 영감을 얻었고, 본인 노력과 주변 도움을 받아가며 가다듬었다. 극작가 김인경이 쓴 ‘염쟁이 유씨’는 2004년 초연 이래 누적 관객 70만명을 바라보는 스테디셀러(steady seller) 작품이다. 유씨는 염 작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종국에 이르러 유씨가 어떤 이유에서 염을 하는지 밝혀진다. 관객은 처음부터 유씨가 보여준 행동과 이야기를 떠올리며, 유씨의 슬픔에 깊이 공감한다.

‘염쟁이 유씨’를 그대로 따라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탄탄한 이야기가 반드시 토대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냉정하게 ‘점쟁이 곽씨’는 연극 보다 배우가 기억에 남는다.

점쟁이 곽씨가 상대하는 망자들의 사연이 교통사고에 치우쳐 있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는 단순한 시작으로 사연을 풀어내는 등 곳곳에서 정교한 이야기 구성이 필요하다고 체감했다. 작품은 관객을 점집 조수로, 손님으로 활용하는 등 시작부터 중반 넘어서까지 관객을 극 안에 개입시킨다. 부조금까지 받아낼 만큼 넉살을 자랑한다. 관객과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자체를 특징으로 여길 수 있지만,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관객 개입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구성은 아닌지, 관객은 모두 같지 않기에 적정한 수준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극본 완성도가 더 탄탄해질 필요가 있다는 우려의 연장선상이다.

제주 점쟁이라는 설정을 살려 섬을 이해할 때 빠질 수 없는 아픔의 역사, 섬 사람 만의 공감대 등을 녹여내면 어떨지 사족을 더해본다.

아쉬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돌이켜보건대 제주 배우 변종수가 보여준 저력은 계속해서 무대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연극과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38년을 뚜벅뚜벅 걸어온 인생이 곽씨 춤사위에도, 구성진 소리에도, 눈빛에도 입혀져 있어서다.

“20살 연극을 시작해서 연극에 대한 갈증으로 34살의 나이에 서일대학 연극영화과를 시작으로 다시 시작해 38살에 청주대 연극영화과를, 54살에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를 받기까지 오로지 한 길을 걷기 위해 우유 배달, 신문 배달, 택시 운전을 포함해서 거의 40개나 되는 직업을 경험하면서 꿋꿋하게 걸어온 연극인입니다.”
- 변종수 소개 글 가운데

풍차를 향해 돌진한 기사 돈키호테는 부딪혀 쓰러져도 일어서서 다시 창을 잡는다.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변종수는 ‘점쟁이 곽씨’ 초연이 준비가 더 필요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완성도를 높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여주겠다고 공언했다. 

38년만에 뽑아든 무디지만 단단한 변종수의 창이 날카롭게 빛나는 순간을 진심으로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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