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진의 제주 돌챙이] ⑪ 옹기 돌가마 장인 김정근

‘돌(石)’은 제주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손꼽힌다. 그 돌을 일상에 맞게 다듬는 존재가 바로 제주 돌챙이다. 제주도, 제주도문화원연합회 도움을 받아 조환진 대표(돌빛나예술학교)가 제주 돌챙이 12명을 인터뷰해 책으로 묶었다. 바로 ‘제주 돌챙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제주의 근현대사를 헤친 돌챙이들의 철학과 인생을 생생한 제주어로 정리했다. [제주의소리]는 조환진 대표와 함께 ‘제주 돌챙이’에 소개된 12명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옹기 돌가마 장인 김정근(1971년생, 대정읍 구억리 거주) / 사진=조환진
옹기 돌가마 장인 김정근(1971년생, 대정읍 구억리 거주) / 사진=조환진

완전 우연찮게 하게 된 일

Q.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입문하게 된 계기는 완전 우연마씸. 저희 아버지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처음에 도예촌 복원할 때 아버지도 돌가마 축조하면서 참여를 했었거든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첫째 아이, 둘째 아이 낳기까지는 전혀 관심이 엇어난마씸. 급한 사정이 아니기 때문에. 예전에 할머니나 이런 분들이 얘기해도 전혀 감흥이 없엇던거지예. 관심도 없었고 그냥 항아리 만드는 데구나. 그때 동네에 옛날 가마도 이서신디 전혀 관심 없었죠.

그때쯤 우연찮게 대정에 체육대회 이서그네 도예촌 가신디. 옛날 생각나는디, “아버지 산소에 한 번 가보게” 해서 가봐신디, 강창언 선생님이 “이걸 해보면 어떻겠느냐?” 집에 강 생각해보켄도 안 핸마씸. 진짜 완전히 우연치 않게 접하게 된마씨.

Q. 이전에는 무슨 일 했나요?

화물차 운전허멍 있었수다. 그때 화물차 운전할 때는 3일 일하고 4일 놀 때라나서예. 안정적인 물량이 있을 때라서 육지 일하러 갔다오민 도예촌에 쭐레쭐레 가는 거주마씸. 강이네 잡일허고. 그땐 거의 잡일만 햇수다 잡일만. 거기서 처음부터 가마 짓는 거나 그릇 만드는 걸 배운 게 아니고.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2002년에서 2003년에 들어갔다가 사정이 있어서 2007년도에 도예촌에서 나왔습니다. 도예촌에서 나오고 한 달 정도 있으니까 김보현이라는 친구가 전화 와서 자기네 작업장 만들고 있다고 하면서 “지나가당 들리라” 허길래, “알았져” 하고.

궁금하잖아요? 어떻게 되나 해서 가봐신디, 진짜 허접한거라예. 지금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에도 여유가 있는 게 아니라서 고물상에서 철판 사다가 집 짓고 있고 그 허접함 때문에 또 엮이게 된거주마씸.

작업장 짓고 허는디 제일 중요한 것이 가마가 있어야 불을 뗄 거 아니우꽈? 가마 엇인디 불 어떵 땝니까. 전기나 가스 가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완전 엇인거라 마씸. 게민 가마 한 번 지어보자고.

선생님들 모셔다가 가마 어떻게 짓는 거냐고 해느내, 우선 터 파기부터 작업하고 했주마씸. 처음에는 선생님 말대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안 해본 분들의 이야기를 들은거라예. 그 선생님들은 가마를 지어 본 적이 없는 거라, 그 당시에 나이 계산해보면. 어릴 때 짓는 것을 보기는 했을 수도 있지만 나이 갭이 엄청나게 많은 거라마씸.

1960년대 말에 했다고 해도 이십 대 초반에 한 거라. 저 중요한 가마일을 이십대 초반한테 맡길쿠과? 선생님 코치 들으면서 지언마씨. 흙바르고 가마를 다 박앗수다. 다 지어그냉 하루이틀 지나고 나니까 퍽 소리나면서 다 무너져버린거라예.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경 지으민 안 되는 거였어마씸. 돌 사이를 돌로 쐐기 박아서 고정을 시켜야 허는디 이걸 흙을 발라가지고 시멘트 바르면서 조적하듯이 허니까 안 되는 거라마씸. 이제 흙이 수축을 하지 않겠습니까. 수축을 하면서 땡기니까 쿵 떨어지는 거라. 돌들 다 걷어내그냉 다시 했주마씸.  

그때부터는 선생님네가 얼러댕기지 않았주마씸. 한 번 무너져 보니까 선생님네나 안 오시더라고마씸. 

무형문화재 2대 굴대장으로 지정받아

Q. 제대로 된 기술 전수를 받아졌습니까?

제주옹기 관련 문화재가 확대 지정되면서 저희 1대 굴대장 선생님한테 고증을 받았주마씸. 가마 이렇게 지어신디 보완한 부분이 있으면 얘기해주십서. 해그냉 이런 부분을 수정하면 될 것 같다고 말씀을 해주셔서 고증을 받았주마씸. 그 선생님이 2012년인가 2013년도에 문화재 지정을 받안마씸.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거든예. 지정 받고 한 달 만에 돌아가셔버련마씨.

예전에는 허벅장만 이서신디 확대 지정되면서 제주옹기장 안에 도공장, 질대장, 불대장, 굴대장으로 나눠서 지정이 되엇수다. 문화재 전문위원 입회하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짜 기량이 있는지 시연을 핸예. 그때 선생님이 1대 지정이 되고 나서 돌아가시니까 2014년도에 제가 2대 굴대장으로 지정도니 거마씨.

Q. 돌가마는 제주만의 독특함이 있는 겁니까?

지금은 흔적은 없는데 육지에도 돌로 지은 돌가마 사례는 있댄마씸. 아예 없는 게 아니고 제주도의 돌가마영 육지부의 가마 형태가 거의 비슷허댄마씸. 경헌디 재료상의 문제주마씸. 돌가마를 짓는 이유는 돌은 널려이수게. 제주는 돌이 널려잇수게. 돌이 널려있기 때문에 한 거지. 바로바로 구할 수 있잖아요. 돌로 쉽게 할려고 했주마씸. 흑벽돌로 하면 이걸 다 찍으면서 일일이 다 만들어야돼마씸. 가장 가까운 곳에 이시난 가장 구하기도 쉽고 장점이 되난, 그것이 독특한 거주마씨. 온도를 높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예. 열을 품는 게 좀 다르주마씸. 돌은 품어그네 금방 식지 않잖아예. 열을 품는다는 것도 아주 중요한 거주마씸.

저는 처음에는 제주 돌가마가 세계 유일이고 제일 우수하다고 막 경해나신디. 다니다보난 그건 아니마씸. 주변에 돌 있는 지역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구하기 쉬운 돌을 써실 거 닮아예.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Q. 생존해 있는 분들 증 가마 축조기술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몇 분이나 됩니까?

진짜 불 땔 수 있는 가마를 지을 수 있는 건 공식적으로는 저 밖에 없는 거주마씸. 비공식적으로도 엇수다. 옛날 방식대로 불을 안 때영 허는 건 조 선생도 지을 수 있잖아예. 그건 누구나 다 조금만 기술이 이시민 하 수 있는 거난.

제주전통옹기 돌가마는 경사진 돌빌레 위에 짓어

Q. 가마를 만드는 과정을 말씀해 주십시오.

불 때는 방향은 상관이 없고예. 옛날 가마터도 강보민 빌레 위에 짓어서예. 이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게 빌레 위에밖에 엇어마씸. 옛날에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예. 평평한 땅바닥에 굴을 만들엉 가마를 박을 수가 엇어마씸, 그냥 빌레. 살짝 경사진데 있잖아예. 여기가 좋겠다. 그런 땅들이 보민 농사도 안 되고. 못 짓는 땅들이잖아예. 그런 땅을 이용해 그냉 공터나 사유지 같은 데 가그냉 여기 경사가 딱 지고 큰길 옆에 지언마씸, 길도 잇인디 짓는 게 아니고 그냥 큰 길 옆에. 빌레 위에, 경사도도 중요하지 않고예. 빌레면 됩니다. 경사는 눈큼으로 봐서 아, 이 정도 되겠다.

Q. 경사는 어느 정도 됩니까?

보통 옛날 가마 같은 경우를 보면, 책 같은데 보면 15도, 16도 나오는데 그렇게까진 안 나와마씸. 측량해보면 많이봐야 12도? 어떤 때는 12도가 안 되는 경우도 잇어마씨. 경사가 있으니까 가마 자체가 굴뚝 역할을 합니다. 육지에 옹기 가마도 제주 가마고치 굴뚝이 엇어예. 가마의 경사를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굴뚝을 만들어서 헌 거고, 제주도도 마찬가지.

그렇게 위치를 정하고 그 다음은 돌을 구해와야주마씸. 옹기 가마들이 큰길 옆에 위치하는 이유가 가마를 박을 돌 운반이 쉽고 불을 땔 땔감을 나르는 길이 잇어야 되난 마씸.

Q. 가마는 어떻게 운영했나요?

가마 운영은 계를 만들엉 운영했수다. 지금으로 하면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어떤 단체를 만들어서 같이 만들고 운영헌 거주마씸. 혼자 1인 책임 하에 가마를 박는 거주마씀. 같이 쓰는 거예. 혼자 만들어서 혼자 쓴 게 아니고, 고치 만들엉 고치 쓰는 거주마씸. 대신 가마도 수리하고 해야 하니까 가마 사용에 대한 삯을 받는 거마씸. 게난 계원 아닌 다른 사람도 쓰민, 돈으로 치면 10만원이다 하면 계원이 쓰면 한 5만원 정도 정해그냉 허는 거주마씸.

Q. 가마를 축조할 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돌과 흙 외에 필요한 재료는 엇수다. 재료는 돌하고 흙만 이시민 돼마씸. 가마를 박는 시기는 일단 장마철을 피해야 하고, 겨울 피해야 하고예. 저희 어렸을 때만 해도 겨울에 엄청 춥고 눈도 많이 쌓이는 중산간이라서 제가 보기엔 겨울은 아닌 거 같아마씸. 장마철을 피해서 봄 가을로, 농사짓게 되면 농번기도 피해야 허고.

/ 사진=조환진
구억리 검은굴. / 사진=조환진

돌가마 짓는 데는 널려있는 손바닥만한 곱돌을 사용해

Q. 돌가마에는 어떤 돌을 사용합니까?

곱돌이랜 해그냉, 주변에 곱돌 천지 아니우꽈. 저 손바닥 만큼헌 크기에 두께가 5cm 정도 되는 돌이민 됩니다. 곱돌이 널려 잇엇주마씸. 제주도는 화산 폭발이 있어서 용암이 다섯 번 흘렀잖아예? 곱돌은 거의 구들장 같은 거지예. 납작해그냉 손바닥만헌 돌들이 이서마씸. 그걸로 박으민 완전히 쉬운 거지예.

지금은 곶자왈에 가민 많지만 자왈에 안 가도 곶에만 가도 다 잇엇주마씸. 구들돌도 쓰는 돌보다 좀 작은 돌들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가마 천정 홍예 박을 때만 그런 돌이 필요한 거지 옆에는 둥근 돌로 해도 상관 엇어마씸.

Q. 돌가마는 어떤 방식으로 쌓았습니까?

가마는 곁담쌓기로 하지 안 허고, 외담이우다. 외담인데 열이 빠져나가지 말라고 다시 외담이 있고 그 사이는 흙을 채왕 보온을 헙니다. 어떵 보민 접담(겹담)이주마씸. 외담과 외담 사이에 흙이 채워져 있는. 본체를 이루는 건 외담인데 결국 보면 겹담인 거주마씸. 이게 열이 빠져버리잖아예? 돌만 채워놨을 때는. 게난 흙으로 완전히 다져주는 거주마씸.

처음 축조할 때는 외담 형식으로 본체를 축조한 다음에 홍예 쌓기 전까지는 가운데 흙을 채우면서 겹담으로 같이 가고, 홍예 쌓기는 외담인거우다. 측면에 쌓는 담 같은 경우는 크기가 좀 커도 되는데, 사람 머리만 하면 됩니다.

Q. 요즘은 가마 박는 돌 구하기가 쉽지 않겠네요?

요즘에는 아무데나 강 돌을 가졍오지 못허난 밭 정리하면서 나온 돌들을 모아 놓은 야적장 같은 디 강 주워야주마씸. 게난 이젠 가마를 하나 새롭게 박젠 허민 그런 돌 준비 때문에 못 박을 수도 잇어마씸.

Q. 가마 만들 때 특별히 필요한 도구가 있나요?

돌을 다듬는 돌망치 하나 허고, 가마 천정에 홍예를 박는 디 필요한 반달형 틀일 잇어야 헙니다. 지금은 합판을 둥글게 휘어서 틀을 만들주만 옛날에는 지금처럼 합판같은 좋은 소재가 엇이난 휘어지는 가느다란 나무를 휘고 받쳥 전체적으로 틀을 만든 다음에 홍예를 박앗주마씸. 통으로 싹 해난 다음에 거푸집 허듯이 대고 위쪽으로는 휘고 무게가 잇어서 접혀져부난 이걸 다시 아래로 받쳐그냉 햇주마씸.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Q. 요즘에는 어떻게 만듭니까?

요즘은 좋은 소재가 잇수다게. 나무를 뼈대로 만들고 합판을 박아서 틀을 만들고 일부분 박고 나서 다시 빼서 후퇴하고 다시 박고 헙니께. 나무틀의 폭은 보통 1m 정도는 돼야. 이게 독새기 구멍이랜 해그냉 창불을 넣는 데가 있거든예. 그걸 만들 수가 이서예. 독재시 구멍의 가운데가 두 뼘 정도 약 55cm 정도 되거든마씸. 그 사이에 센터에 구멍이 이시민 한 뼘 두 뼘 해가지고 여기 구멍이 나마씨. 그것보단 넓게 해야 구멍을 만들고 수 있는 거지예. 예전추룩 마가 전체에 홍예틀을 만들수는 있는데 경허민 재료가 너무 많이 들어예. 그축 안 해그네 틀을 옮기면서 해도 되는 거니까. 

창불 넣는 독새기 구멍을 몇 개 할 건지에 따라
돌가마 길이가 정해져

Q. 가마의 크기나 형태는 어떵헙니까?

가마 형태가 앞에는 이렇게 해그낸 이렇게 넓어지고. 다시 좁아졌다가 불 벽 사이 지나면 다시 일정하게 가서 뒤에서 다시 좁아지고. 경해야 이게 불이 가둬질꺼니까예. 

가마의 폭은 한 발이고예. 높이도 거의 그 정도. 키가 170cm가 안 되민 일어서도 안 걸려마씸. 길이는 이 독새기 구멍을 몇 개 할건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길이 8m, 10m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독새기 구멍이 8개다, 9개 짜리다. 옛날 같은 경우에는 뭐 한쪽은 25개, 한쪽은 26개 되주마씸. 그 이유가 뭐냐면 가마가 이렇게 되면 선생님 잠깐 보셨지만 굴문이 있잖아예. 그래서 넣고 빼는 굴문 있잖아예. 굴문 있는 쪽은 하나가 없는 거라마씸. 그래서 넣고 빼는 굴문 있잖아예. 굴문 있는 쪽은 하나가 없는 거라마씸. 독새기 구멍이 저쪽은 하나 더 있고, 독새기 구멍은 잿불 구멍입니다. 육지에서는 창불이랜 허주마씸. 

마지막 순간에 거기로 땔감을 넣엉 가마의 온도를 올리고 그릇의 평면에 완전히 유면을 형성허게 허는 거주마씸. 이게 유약을 바르는 게 아니라서. 유약 바르는 사람도 경허긴 허지만.

Q. 제주도에서 실제 쓰고 있는 가마 길이는 어느 정도 되나요?

도예촌에 있는 거는 하도 오래 돼서 모르겠고 저쪽 무릉에 쓰는 거는 한쪽이 12개, 한쪽은 13개고예.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거는 7,8개우다. 길이는 있는데 경 중요허지는 않아마씸. 독새기 구멍으로 해그내 그릇 수가 나오니까. 옛날처럼 25개, 26개면 55줄에서 10줄 나와예. 그걸 세트로 허민 거의 700점이라마씸.

독새기 구멍 중앙에서 다음 독새기 구멍 중앙까지는 두 뼘인디 길이로 한 55cm 되주마씸. 독새기 구멍 자리에 긴 돌을 걸치멍 홍예를 박으면 됩니다. 홍예를 전체적으로 다 만들어냈다 허민 흙과 물을 반죽허영 무르게 만들어서 둥글게 뭉친 다음에 탁탁 쳐 줍니다. 무른 흙으로 다쳐줍니다. 홍예돌 사이사이에 쐐기로 박은 돌들이 빠지지 않도록 빡빡쳐서 홍예돌을 고정시켜줍니다. 

가마 안팎으로 흙을 잘 발라줘야
돌이 녹지 않아 가마가 제 구실을 해

Q. 흙을 왜 바르는 겁니까?

보온. 돌과 돌을 잡아주기도 하고. 흙이 잡아줘그냉 수축을 헐 거 아니우꽈. 불을 때민 흙이 더 수축허는데 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영 구워져 버리민 홍예돌이 하나 빠져도 무너지지 안헙니다. 외부에 흙을 바르고 나면 가마 안에도 발라야주마씸. 안에 흙을 바르는 역할이 뭐냐면 돌은 녹는 온도가 낮고 흙은 녹는 온도는 높잖아예. 이걸 개벽을 해줘야 돌이 안 녹아들어마씸. 안 그러면 불 때다 보민 돌이 녹아서 용암처럼 뚝뚝 떨어져마씸.

돌이 전체적으로 녹지 않으민 확 안 무너져마씸. 지금 저기에 가마도 홍예 하나가 빠졌주만 안 무너젼마씸. 경헌디 위에 흙이 잡고 있어서 형태는 그대로마씸. 일부만 흘러버린 건 상관이 없는데 다 녹아버리민 안 되는 거잖아예.   

Q. 흙을 다 바르면 완성된 건가요?

그렇게 해서 흙이 어느 정도 자연 건조되민 본 불을 때기 전에 헛불을 때서 다림을 해줘야 돼마씸. 다림은 옛날 같으면 소똥 같은 게 지천에 널려 있었잖아예. 그걸 해그네 깔아서 불을 땠었는데 요즘은 소똥들이 아예 없잖아예. 소똥 대신 가마 안에 톱밥을 거의 반 정도 수북이 깔아그넹 불을 때영 이걸로 습기를 잡아주는 거마씸. 그릇 때는 데는 습기가 제일 안 좋으니까. 지상에서 올라오는 습기도 잡아주고. 하여튼 익히는 거주마씸, 이것이 다려주는거라마씸.

옛날에도 마찬가지로 가마 위에 지붕을 안 씌웠거든예. 완성해서 사용하는 가마라도 장마 지나면 다림을 해야주마씸. 장마 때 엄청 비가 와서 습기가 차 있는데 그릇을 담을 수 없주마씨. 처음 때는 거는 헛불을 땐 거고 그릇 놓고 완전히 고온에서 불을 때야 익어그네 자리잡지 경 안 해불민 안 되는 거라예.

제주도는 습기가 많잖으꽈. 습한 게 제일 최악이거든예. 가마를 만들고 처음으로 불을 땔 때는  그릇을 잘 안 넣으려고 합니다. 가마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데 그릇이 반 타작 될 수도 있고 잘 안나와예. 반 타작됐다고 해서 누구한테 물어내라고 할 수 있는게 아니마씸.

Q. 가마 만드는 기능을 배우는 학생이 있나요?

무형문화재에는 보유자, 이수자, 전수장학생이 있수다. 그냥 일반인도 있고예. 전수자에서 이수자가 되젠 시험본다고는 했는데. 일반인들안 많아마씸. 우리 아들들 둘 포함해서 네다섯? 가마를 보수하거나 새로 박을 때는 이 분들이 같이 와서 배우면서 헙니다게. 그게 있어야 나중에 전수 장학생으로 갈 수도 있고 그런 거라. 또 가마를 한 번 같이 만들어봐야 가마 축조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거예. 한번 만들어 보민 혼자서도 만들 수 있주마씸. 완성도는 개개인 마다 다른 거고예.

이제까지 자기 가마를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은 엇수다. 저 빼고는. 배우젠 허긴 허나 관심들이 별로 엇어마씸. 이게 경제적으로 해결해주는게 엇어마씸. 전수장학생에게 25만원 주는데 한 달 내내 이거만 하라고 할 수는 엇어예.

제 개인 생각으론 문화재가 20만원 받고 거꾸로 전수장학생들은 100만원 받아그넹 배우도록 해야한다고 봐마씸. 아무리 전수가 중요하다고 해서 생활도 내팽겨치고, 이건 안 되는 거주마씸. 전승비가 족으난 잠깐 잠깐밖에 안 돼마씸, 개인적으로는 이런 걸 바꿔야한다고 생각해마씸, 경해야 너희가 해야 할 거 아니냐 말헐 수 있는 거 아니우꽈. 지금은 경 못 해마씸. 가마 수리허젠 햄신디 수리허게 되민 시간 언제 되크니? 거꾸로 물어봐야 돼마씸, 비참한 현실이라마씸. 

/ 사진=조환진
구억리 검은굴. / 사진=조환진

가마에 불 땔 때는 그저 맡겨야,
결과에 대해서는 불이 온전히 해주는 거

Q. 가마에 불 땔 때 무슨 생각하세요?

아무 생각엇어마씸. 잘 땐다고 허영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못 땐다고 못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온전히 그냥 맡기는 거라마씸, 잘 땠다 못 땠다가 아니고. 결과에 대해서는 온전히 불이 해주는 거지 제가 잘한 것 같다고 해서 다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건 또 못 땠다고 해서 못 나오는 것도 아니고예. 꺼낼 때까지가 궁금한 거지 일단 가마에 들여놓으면 끝입니다. 끝. 그냥 맡겨야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같이 때고 있잖아예? 3박 4일간 최소 10명 정도가 교대로 불을 땝니다. 

Q. 불 땔 때는 중요한 순간이 있는 겁니까?

그릇을 굽는 게 아니고 가마를 같이 굽는 거라예. 굴을 굽는 거거든예. 전통 가마가 어려운 게 그런 게 어려운 거 같아마씸. 이게 서두르면 안 되고 급하게 가서도 안 되고. 육지하고 달라가지고 초벌을 다 안하거든예. 그냥 담아서 굽는 거라서. 서서히 예열시켜 줘야 하는 게 좀 어렵습니다.

Q. 육지에서 돌가마 만든 얘기 좀 해주십시오.

강원도 양구백자박물관 정두섭 관장님이 가지고 있는 백토마을이라는 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전통 가마를 전부 복원하고 있더라고예. 거기 레지던스 했수다. 관장님이 “제주도 가마도 다 지읍시다” 하길래 농담하는 줄 알고 “제주도 돌도 없고 비용도 많이 들텐데요? 여기까지 돌도 반출 안 되고 힘들 건데요” 하고 그냥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잇었수다. 다음해 봄에 전화가 온거라예.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올해 노랑굴 짓죠?”
“돌이 없어서 안 될 건데요.”
“제가 철원에 다 알아봤습니다. 현지 답사하고 왔습니다.”
하면서 짓자는거라예. 겅핸 짓게 된 거라마씨.

제주도 가마 짓는 돌이 철원에도 널려 있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현무암을 잘 쓰지도 않고 야적만 해두고, 제주도처럼 돌을 가공하는 곳이 거의 없더라고예.

Q. 잘 만들어졌나요?

제주도에서는 자와 아들하고 둘이 갔고, 나머지는 육지 작가분들하고 같이 만들었수다. 7~8명이서 일주일간 그릇 만들면서 가마 박고 불 때서 그릇 완성까지 보름 안에 다 끝냈수다.

그냥 다림굴 치고는 괜찮안마씸. 성공적으로 만들어졌수다. 이게 거기 흙이 찰기가 없어서 잘 안 붙어서 앞에 불턱 사이추룩 불 맡는 자리 돌들이 다 녹아가지고 뚝뚝 다 떨어져버렷수다. 용암 되부런마씸. 저도 작년에야 처음 알아신디 제주도 찰흑이 찰기가 더 있더라고예. 우리 동네는 조금만 파민 그 밑이 황토라서 완전 쉽게 구하는데 양구 가난 흙이 잘 안 붙어마씸.

이 동네에서 옹기가 발달한 것은 흙이 나기 때문에 한 거고 예전엔 이쪽 지역이 다 소나무 밭이었다고 헙디다게. 신평 같은 동네들이 한창 때는 신평에 가마가 20개 정도 잇엇댄 허더라고예. 그 정도 돌리난 나무들이 남아날 수가 엇지예. 땔감으로 다 써부난.

제주도에서 불 땔 수 있는 가마는 2개.
제주도 사람보다 육지 사람들이 관심이 많아

Q. 이제 제주도에서 불 땔 수 있는 돌가마는 몇 개 정도 남았나요?

확실하진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2개 정도. 여기 하나하고 다른 곳 하나. 강창언 선생님게 가마는 교류가 없어서 쓰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고예.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두 개.

Q. 돌가마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나요?

많주마씸, 지금도 9월 24일부터 17일까지 보수할 건데 참여 인원을 한정지어서 그렇지 40명쯤 돼마씸. 제주에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돼마씸. 다 육지 사는 사람. 제주도로 자비로 내려완마씸. 정작 제주도에서는 관심이 별로 엇어마씸.

Q. 제주도 돌가마를 잘 전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직도 부족해마씸. 복원은 됐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거든예. 가마도 마찬가지고, 그릇도 마찬가지고.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얍주마씨. 옛날처럼은 안 되도 근접할 수 있게끔 해야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네가 복원 다 했다고, 완성했다고 허는디 제가 봤을 땐 아니마씸. 아직 좀 멀었고예. 적극적으로 해그네 상품을 만들든가, 아니면 이걸 토대로 해그넹 다른 상품을 만들든가 해야 한다고 봐마씸. 지금추룩 해서는 다시 묻히게 생견마씸. 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경해마씸. 복원도 제대로 안되신디 다 했다고 허고, 제가 보기엔 복원은 제대로 안 돼서마씸. 계속 만들어보고 계속 때보는 수밖에 없주마씸, 다른 데이터로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경허고, 이걸로 어떻게든 밥먹엉 살게끔 해줘야 젊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오지. 나도 하나도 돈 못 벌고 오히려 돈을 때려 박아신디 너도 해! 영 못해마씸. 그걸 젊은 사람들에게 만들어줘야지 희망이 잇엉 올 거 아니우꽈. 지금고치 희망도 엇고 아무것도 엇인디 우리 엄마아빠는 돈만 때려박고 있는데, 고치 일허겐 허민 다 도망가부러마씸.

또 권허지도 못해마씸. 이걸 허민 희망이 잇어야 허는디, 이건 막연한 거지. 정확하게 하면 밥벌이가 될 수 있다고 헐 수가 엇어마씸. 어느 정도 기본수입이 생겨야 지속적으로 배우는 사람도 달려들엉 헐 수 있는 거주마씸. 저희는 제로우다, 제로. 

또, 제주 흙의 본질적인 것을 제대로 이해허고 상품을 만들어야 부가가치도 높아마씸, 이게 흙도 한계성이 있잖아마씸. 흙은 어디서 팔지도 않아마씸. 저도 누가 가공해서 팔아시민 좋으쿠다. 재료의 한계성도 잇어마씸. 일반인들이 만들구정 해도 재료가 잇어야 만들 수 이신디, 이런 문제는 어떵 해결해야 되쿠과?

흙이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아는데 그게 다 사유지 아니우꽈? 땅 파그네 흙 팔아줍서 하는 시대는 40, 50년 전에 지낫수게. 또 땅 값도 올르난 그 땅을 사지도 못해마씸, 샀으면 좋겠지만.

재료 수급에 대해서 관에서 도와주면 좋쿠다. 관에서 그 땅을 가지고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채취하도록 허가를 내주는 거주마씸. 한 번에 얼마 정도 해가지고. 돈을 받든 무상으로 쓸 사람에게 주든 그렇게 해주면 좋주마씨.


[내 남편을 말한다]

돌가마를 지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그를 지켜보며
아내 이경희

갑자기 남편에 대해 적어보라니 좀 어처구니 없고 당황스러웠다. 돌을 이용해 가마를 만드는 남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가족인 아내가 바라보는 남편이라….

난 처음부터 이 일을 하는 남편을 만난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이 일을 하게 되면서 이 일을 하는 남편을 반대하고 이해해 주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갈등도 참 많았던 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직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훌륭한 사람, 옛것을 계승해 나가려는 사람이라지만 가정에서 내 남편은 그리 훌륭한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거운 돌을 옮겨 가마를 만들고 그 가마에 흙을 바르고 매일 매일이 그야말로 노가다였다. 그러다 보니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집안일은커녕 아이들과 보내며 놀아줄 시간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아빠와 보내는 시간은 작업장에서 아빠를 도와 돌을 나르고 흙을 파고 이런 그야말로 노가다를 하는 것 뿐이다. 이런 남편을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다 내가 정말 심각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 힘든 일을 왜 하냐? 굳이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냐?”

그런 나의 물음에 잠시 답이 없더니,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

/ 사진=조환진
/ 사진=조환진

그 대답을 들으니 내 머리가 너무 복잡해 졌다. 그러고 서로 말이 없이 밤이 지났다. 밤사이 정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린 나의 결론은 ‘응원은 못 해주어도 지켜보기만이라도 하자’였다. 

그리고 쭉 남편을 지켜보기만 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으니 갈등도 적어졌고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작업장으로 가는 것이 우리 가족 나들이의 전부였지만 아이들은 그 생활에 불만을 나타내기보다 현실을 즐기는 편이었던 것 같다. 그런 아이들을 통해 내 화는 점점 사그라들기도 했고 지켜보는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기도 했다.

내가 보는 나의 남편은 그런 사람인 것 같다. 돌과 흙을 통해 가마를 만들고 옹기를 구우며 살아있다고 느낄 만큼 그 일을 좋아하고 그 일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많은 무궁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

아마 평생 그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그 일을 할 사람.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다.


# 조환진

1974년 한림읍 태생
2002년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서양화 전공)
2019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석사 (석사 논문 - 제주도 지역별 돌담의 특징과 축조 방식)
2021년 제주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2021년 석공예기능사, 문화재수리기능자
2023년 제주도 농어업유산위원회 위원

제주도 안에서 돌챙이로 살아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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