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1) 삽을 씻으며

 

삽을 씻으며

나보다 삽을 먼저 씻는다
시린 물속에 삽날과 손을 담그고
한해 저물도록 피와 땀을 쏟았던
흙 묻은 살갗들을 어루만진다

삽질한 만큼 거둔다는 약속이야 그렇지만,
저기압의 일기예보 때마다
뼈와 근육이 따로 뒤척이는 이부자리에
밤새도록 파고드는, 물파스냄새를 
너는 안다, 너는 안다

무 농사 배추농사 때로는 
자식농사의 밭떼기거래가 끝나고
진눈깨비 농로길로 돌아온 밥상머리에,
아들이 흘린 밥알을 주어먹는 
아홉 개 반, 
지문 없는 내 손가락의 내력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세모 때면 들판으로 눈이 내리고
추곡수매를 거절당한 노적가리마다 시름이 쌓이면
협동조합에서 지급받은 새 영농수첩에다 
서울 간 혈육의 산번지 주소를 옮겨 적는다

그러나 삽이여, 
녹슬기보다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칼날보다도 휘장보다도
더 숭고한 너의 번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안다

새해에도 거듭 거듭 새해에도 
너와 내가 일궈야 할 이 땅 어딘가에
가슴처럼 뜨거운 영토가 기다리고 있음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
녹슬기보다 차라리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삽이여

/ 1991년 고정국 詩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시작노트

‘정情’의 의미를 사전에 찾아보면, “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발생하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이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삽, 괭이, 전정가위, 곡괭이, 경운기 등등은 이미 가족처럼 정이 들었고, 올 한 해 추수가 끝나면 이들 농기구들을 기름 치며 닦아놓습니다. 

황무지 개간이란 말은 농사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젊은 날 나의 황무지는 곧바로 글쓰기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펜 또는 붓 등의 필기도구의 대명사는, 삽과 야전곡괭이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녹슬기보다 차라리 부러지기를 갈구하는 농부의 마음, 아니 시인의 마음! 그리고 나이 들어서도 변함없이 스스로에게 주고받았던 젊은 날의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조가 아닌 자유시 형식인 이 작품에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잘 읽어 내실 줄 압니다. “나보다 삽을 먼저 씻는다” 또는 “녹슬기보다 차라리 부러지기를 갈구”했던 그때 그 새벽정신을 이제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이곳저곳 아픔을 딛고 일어섰을 때의 그 에너지야말로 체험했던 사람들만이 감지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주의소리》 애독자 여러분, 갑진년甲辰年 새해에도, 거듭 거듭 새해에도, 다복다복 복 많이 받으십시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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