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의 借古述今] (358) 나무가 좀먹지 세월은 좀먹지 않는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것을 빌려 지금을 말한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 또한 없지 않은가. 옛 선조들의 차고술금의 지혜를 제주어와 제주속담에서 찾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들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지혜가 담겼다. 교육자 출신의 문필가 동보 김길웅 선생의 글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깃든 차고술금과 촌철살인을 제주어로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 편집자 글 


* 낭 : 나무
* 좀먹주 : 좀먹지, 좀슬지

어차피 흐를 세월인데 세월이 좀 먹나 천천히 쉬엄쉬엄 하자고 이 순간도 흐르고 있는 시간에게 눈 한번 흘기고 있지 않은가. / 사진=픽사베이
어차피 흐를 세월인데 세월이 좀 먹나 천천히 쉬엄쉬엄 하자고 이 순간도 흐르고 있는 시간에게 눈 한번 흘기고 있지 않은가. / 사진=픽사베이

옛날 집은 흙과 나무를 주된 재료로 해서 지었다. 특히 문설주나 문지방, 툇마루에 있는 두세 개의 굵은 기둥은 목재가 필수적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지만, 이렇게 집을 드나들며 눈에 잘 띄는 곳의 나무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집일수록 자잘한 구멍이 숭숭 뚫려 미관상 좋지 않았다. 좀먹어 그런 것이다. 금세 부러질 것만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무진장이고 무한정한 게 시간이고 세월이다. 그런 시간이 겁(劫), 끝이 없을 뿐 아닐 길었다 짧았다 변하지도 않는다. 

왜 대중가요에서도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그 세월은 고장도 없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놈의 세월이 제발 좀이라도 먹어(혹은 슬어) 잡시 잠깐이라도 멈추었으면 좋은데, 단 일 초도 멈춰 서는 법이라곤 없음을 한탄한 게 아닌가. 

인정사정이라고는 없는 게 시간이다. 무정하고 비정하고 몰풍스러운 게 세월이라 함이다.

‘낭이 좀먹주 세월 좀 안 먹나.’

사람도 세월의 속성 따라 느긋하게 하고 볼 일이라 마음을 다잡는다. 어차피 흐를 세월인데 세월이 좀 먹나 천천히 쉬엄쉬엄 하자고 이 순간도 흐르고 있는 시간에게 눈 한번 흘기고 있지 않은가.

인생무상이다. 덧없고 속절없는 게 인생사로다.


# 김길웅

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마음 자리 ▲읍내 동산 집에 걸린 달락 외 7권, 시집 ▲텅 빈 부재 ▲둥글다 외 7권, 산문집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아이콘-일일일'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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