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아동들...그 후] ② 베이비박스 설치 삭제→민간·공공기관 위탁 삭제돼 제정

2021년, 출생신고 없이 성인 나이까지 자란 제주지역 세 자매 사연은 전국적으로 파장을 남겼다. 이후 정부와 지자체가 ‘출생 미신고 아동’ 문제를 들여다보고, 제주에서는 베이비박스 조례 논란까지 번지는 등 사안은 계속 진행 중이다. [제주의소리]는 출생 미신고 아동 조사 상황과 관련 조례, 현장으로부터 듣는 대책 등을 세 차례에 걸쳐 모아본다. [편집자 주]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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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위기임산부 및 위기영아 보호·상담 지원 조례’가 가결·공포됐다.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출생신고가 누락된 전국 아동만 2123명에 달하며, 이중 601명은 베이비박스 등을 통해 유기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조례 제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공포된 조례는 제주도정의 위기 임산부·영아에 대한 책임이 조금이나마 강화됐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이비박스’ 논란에 매몰돼 위기에 놓인 임산부와 영아 지원을 강화하는 다른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아 반쪽짜리 조례에 머문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뒤따르고 있다. 

2023년 7월19일 제주도의회 제419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위기 임산부·영아 지원 조례가 가결됐다. 이틀 전 보건복지안전위원회 문턱을 어렵게 넘은 수정안이 마지막 관문인 본회의마저 넘으면서 그해 8월7일 공포됐다. 

해당 조례는 송창권 의원(더불어민주당, 이호·도두·외도동)이 대표발의하고, 강동우(제주시 동부, 교육의원), 강철남(민주당, 연동 을), 김승준(민주당, 한경·추자면), 양병우(민주당, 대정읍), 양영식(민주당, 연동 갑), 양홍식(민주당, 비례대표), 이경심(민주당, 비례대표), 하성용(민주당, 안덕면), 한권(민주당, 일도1·이도1·건입동), 홍인숙(민주당, 아라동 갑) 의원이 공동발의로 이름을 올렸다. 

조례 제1조(목적)에 ‘위기임산부 및 위기영아의 보호·상담에 대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위기임산부의 안전하고 건강한 출산과 위기영아의 생명권·인권을 보장하고 부모와 자녀의 안전한 출산과 양육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고 명시됐다. 

경제·심리·신체적 어려움을 겪는 위기 임산부와 만 2세 미만 영아 중 부모 등 원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위기영아에 대한 제주도지사의 책임 강화를 골자로 한다. 

조례에 따라 도지사는 위기 임산부의 안전한 출산을 돕고 위기영아의 안전한 양육환경 조성을 위한 사업을 실시할 수 있다. 사업은 상담 지원이나 출산·산후조리 지원, 주거·생계 지원, 아동양육지원, 위기아동 일시보호, 치료 지원, 실태조사 등이다. 

또 조례 3조(도지사의 책무)에 따라 도지사는 위기임산부와 위기영아의 안전과 권익을 보호하고 위기영아가 원가정에서 안전하게 양육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국적인 영아 출생 미신고 등 논란으로 관련 법률이 제·개정되면서 올해 7월부터 출생통보제와 보호출산제가 시행된다. 

출생통보제는 부모 등 보호자에게만 부여된 출생신고 의무를 의료기관까지 확대하는 제도다. 보호출산제는 친모가 원할 경우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로, 위기임산부를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번에 제주도의회 본회의를 통과한 조례는 제주도정의 책임을 강화한 것만으로도 매우 긍정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가결·공포된 ‘제주특별자치도 위기임산부 및 위기영아 보호·상담 지원 조례’의 목적과 정의. ⓒ제주의소리
가결·공포된 ‘제주특별자치도 위기임산부 및 위기영아 보호·상담 지원 조례’의 목적과 정의. ⓒ제주의소리

다만, 조례 제정 추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위기에 놓인 임산부나 영아를 위한 사회보장체계가 잡혀 있어 이를 강화하는 논의가 우선돼야 하는데, 갑작스럽게 베이비박스 설치 논의가 왜 필요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반쪽짜리 조례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다.

각종 논란으로 당초 추진 과정에 포함돼 있던 베이비박스나 센터 설치 후 공공기관-민간기관 위탁 관련 내용은 모두 삭제됐다. 

베이비박스가 되레 영아 유기를 조장한다는 우려로 인해 공청회 등도 열렸다. 베이비박스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과 베이비박스 설치가 아닌 다른 지원 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다.  

베이비박스 찬·반 논란이 커지면서 결국 관련 내용이 모두 상임위에서 삭제됐고, 대신에 ‘도지사는 위기임산부 및 위기영아 지원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관련 기관 또는 단체 등과 정보 교류 및 홍보활동 등 상호 협력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제주특별자치도 고령친화도시 구현을 위한 노인복지 기본조례’만 하더라도 제주도가 노인복지와 고령사회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고, 기본계획 달성을 위해 연도별로 시행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한다는 조항을 추가해 행정의 책임을 강화했다. 

또 대중교통과 공공시설 이용료 면제·할인, 어버이 날·치매 극복의 날·노인의 날 등에 행사를 하거나 ‘민간단체’가 여는 행사에 예산(범위 내)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노인 복지 실현을 위해 제주도가 꾸준히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만으로 제주도의 책임이 커진다.    

단순히 ‘노력해야 한다’, ‘정보교류 및 홍보활동 등 상호 협력할 수 있다’는 내용에 그치는 위기임산부·영아 지원 조례와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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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논란 끝에 베이비박스 관련 부분이 삭제된 채 상정된 원안(위)과 제주도의회 논의 과정에서 수정 가결된 조례(아래). 센터 설치와 관련된 위탁 부분이 삭제됐다. ⓒ제주의소리

갑론을박 끝에 베이비박스를 설치하지 않기로 정리됐다면 ‘위기임산부’와 ‘위기영아’를 위한 다른 지원 방안이나 기존 지원 강화 등 논의로 이어졌어야 했지만, 당초 안에서 베이비박스 논란 조항만 삭제된 채 조례가 제정됐다는 부정적인 평가다. 

신강협 제주평화인권연구소왓 상임활동가는 “세계적인 추세는 베이비박스가 인권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라며 “이번에 제정된 조례는 베이비박스 설치를 위한 조례로 해석됐다”고 말했다. 

이어 “정말 위기에 놓인 임산부와 영아를 위한 조례라면 이미 운용되는 위기임산부, 위기영아에 대한 사회보장체제 검토를 통해 미비점을 보완·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베이비박스’ 설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으로만 추진됐다. 또 베이비박스 논의 과정에서 아동의 권리가 소홀히 다뤄졌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조례안을 대표발의한 송창권 의원은 “공청회와 간담회 등 치열한 논의 끝에 제정된 조례”라고 반박했다. 

송 의원은 “제도권 밖에서 이렇다 할 지원을 받지 못하는 위기영아를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등록조차 돼 있지 않은 위기영아를 위한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하는 고민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어 “위기 임산부·영아 지원 조례로 더불어민주당에서 주는 전국 최우수상도 수상했다. 곧 시행되는 출생통보제, 보호출산제 등만 보더라도 위기 임산부·영아 지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이라며 “전국 최초로 제주에서 제정된 조례 자체를 부정하면 안된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조례 제정 움직임이 있고, 부족한 부분은 조례 개정으로 보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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