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42년 전 제주 돌담 없애려던 황당한 계획의 전말

최근 12.12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12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으며 전두환의 무도함이 재인식되고 있는 가운데, 전두환의 말 한마디로 사라질 뻔했던 제주돌담에 얽힌 비화를 공개한다. 올해는 제주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 지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전두환과 얽힌 돌담(밭담) 이야기를 언론에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도청 출입기자와 함께 ‘42년 전 그날’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본다. / 편집자 글

1982년 2월 6일, 전두환 대통령이 제주에 왔다. 연두순시 겸 제주공항 새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순시를 계기로 두 가지 큰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하나는 대통령 경호를 위해 제주에 오던 군 수송기가 추락해 타고 있던 특전부대 장병 등 53명이 숨진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대통령의 감상적인 소감 한마디 때문에 하마터면 제주도의 밭돌담이 사라질 뻔한 사건이었다. 군 수송기 추락사고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문제의 돌담 사건은 거의 묻혀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따라서 회자되지도 않는 실정이다. 당시 제주신문의 도청 출입기자였던 필자는 이 두 사건을 비교적 가까이서 접할 수가 있었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번째 사건, 돌담을 없애는 계획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고, 또 어떻게 그것을 막을 수 있었는지 그 전말을 소상히 소개하고자 한다.

무리한 대통령 경호로 특전사 장병 등 53명 사망

먼저 군 수송기 추락사고부터 요점 정리한다. 대통령 순시 하루 전날인 2월 5일 오후 성남공항을 출발한 공군 수송기 7~8대 중 1대가 제주도 상공에서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행불된 수송기에는 대통령 경호차 제주에 오던 특전사 소속 장병 47명과 공군 장병 6명 등 53명이 타고 있었다. 그날은 강풍이 불고 눈발마저 거센 악천후였다. 그러나 ‘안 되면 되게 하라’던 군사정권 통치하였다. 성남공항 통제국에서는 항공기 이륙이 어렵다고 보고했지만 청와대의 서슬에 수송기 출동을 강행했다. 

그런데 수송기 한 대가 제주 권역까지 와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 당국은 추자도 해역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밤 제주 앞바다는 수송기를 찾기 위해 쏘아 올린 조명탄으로 대낮같이 밝았다. 그런데 그 수송기는 다음날 오후 한라산 해발 1060m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탑승자 53명 전원이 사망했다.

제주 하늘의 등대 역할을 하는 무선표지소가 제주에는 공항과 성판악 등 두 곳에 있었다. 한 항공 전문가의 의견은, 그 사고기가 공항에 설치된 무선표지소를 기준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착각해서 성판악 무선표지소 주파수를 잡고 진입하다가 안개 속의 한라산에 곤두박질친 것으로 추정했다. 그때는 레이더 시설이 없었다. 언론은 철저히 통제됐다. 이어 일방적인 국방부 발표가 있었는데, 왜곡과 은폐 그 자체였다. 작전명 ‘봉황새 1호 작전’을 수행 중 사고를 당한 수송기와 장병들이, ‘대(對)침투작전 훈련 중’ 이상기류에 휘말려 추락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표에 ‘대통령’이란 단어는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군 수송기의 처참한 모습. 사진=서재철<br>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군 수송기의 처참한 모습. 사진=서재철

사고 현장 사진도 전혀 없었다. 국방부는 다만 추락한 C-123 동종기 사진 한 장만 달랑 언론에 제공했다. 실상은 사진이 있었다. 그것도 생생한 현장 사진이. ‘한라산 기자’로 이름난 제주신문 서재철 사진기자가 용감하게 사고 현장에 접근, 필름 4통 분량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단 한 장도 신문에 쓸 수가 없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특히 군 관련 사고에 대해선 엄격한 언론 통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대의 특종 사진들은 그 후 7년이 지나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89년 제주신문의 특집 보도로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처사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지방 순시 때 근접 경호는 청와대 경호실이, 외곽 경호는 경찰이 맡았다. 하지만 그들은 ‘봉황새 작전’에 특전사를, 그것도 무려 450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투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주 앞바다에는 군함정이, 제주공항에는 팬텀 전투기 2대가 대기 중이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터무니없는 ‘무력 과시’였다. 정통성 없는 대통령이었기에 스스로 두려웠고, 그래서 그런 실력 과시가 필요했던 것일까. 

“밭돌담을 산울타리로 바꾼다고?”…지시의 출처에는 모두가 ‘쉬쉬’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2월 6일 전두환 대통령이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제주공항엔 돌풍과 진눈깨비가 휘날렸다. 몇 가닥 안되는 대통령의 머리칼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영부인을 동반하지 않은 방문이었다. 그날 지방 유지들과의 회식에서 대통령은 “아내가 테레비에서 보면 머리칼이 날려 흉하더라고 할 것 같다”고 제주의 풍다(風多)를 소재 삼아 농담했다. 그의 언행에 숨진 장병들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건 엿볼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개설된 제주비행장엔 원래 동서 방향으로 1500m 길이 활주로가 있었다. 그게 짧아서 남북 방향의 교차활주로(2000m)를 추가로 만들었지만 대형 항공기가 착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동서 활주로를 3000m로 대폭 확장하는 공사를 마치고 이날 준공식이 열린 것이다. 현재도 그 활주로를 200m 가량 더 늘려 제주국제공항 주 활주로로 이용하고 있다. 전두환은 활주로 준공식에 참석하고 그날 오후 제주도청을 방문, 최재영 도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그는 “제주 관광개발은 최소한 10년 이상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재영 지사 안내로 입장하는 전두환 대통령. 가운데 뒤쪽에 필자가 서 있다. 사진=양조훈<br>
최재영 지사 안내로 입장하는 전두환 대통령. 가운데 뒤쪽에 필자가 서 있다. 사진=양조훈

그때 34세의 필자는 제주신문 도청 출입기자(사회부 차장)였다. 지금은 도청 출입기자만 해도 70~80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때는 달랑 5~6명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언론 통폐합으로 언론사 수를 줄였기 때문이다. 지방신문은 각 도마다 1개씩만 존재하는 ‘1도1사 정책’으로 제주도에는 제주신문이 유일한 일간지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대통령에 대한 도정 업무보고 자리에도 신문기자인 필자와 방송기자인 KBS 고대석 기자만 입장한 것 같다. 이 업무보고 자리에서도 ‘밭돌담 이석(移石) 사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한 첫 정보를 얻은 것은 신년 캠페인 기사 취재 과정에서였다. 제주신문의 1982년 신년 캠페인 주제는 <주인의식>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소주제로 ‘자연보존’에 관한 글을 필자가 쓰게 돼 있었다. 그 취재 과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제주도 밭돌담을 없애고 수벽(樹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것도 일주일 전의 대통령 순시와 관련성이 있으며, 비밀리에 작업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부랴부랴 대통령의 제주 순시 때 있었던 발언 내용을 전부 검색했다. 그러자 순시 이틀째인 2월 7일 서귀포시 유지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했다는 대통령의 발언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보존’ 캠페인 기사에 ‘밭돌담정비 재고해야’는 내용을 포함했다. (제주신문 1982년 2월 15일자)<br>
‘자연보존’ 캠페인 기사에 ‘밭돌담정비 재고해야’는 내용을 포함했다. (제주신문 1982년 2월 15일자)

“제주도에는 보물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돌이다. 돌을 자원화해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팔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으면 한다.”

그러나 이 발언과 밭돌담을 없애고 그 대신 산울타리를 조성하는 것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였다. 필자는 ‘자연보존’ 캠페인 기사 마감시간이 촉박해서 심층적인 취재를 더 못한 채, 기사를 마감해야 했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여 기사 말미에 ‘밭돌담 정비 재고해야’ 한다는 내용을 추가로 담았다. 2월 15일자 제주신문 캠페인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몇 년 전 「라이프」지의 사진기자가 제주에 왔다가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고 밭돌담이라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밭돌담이 생긴 역사적 유래도 알 필요가 있다. 수천 년 동안 선조의 땀과 때가 묻은 채 연면히 이어진 밭돌담은 결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돌을 자원화한다면 개발할 곳과 보존할 곳을 엄격히 선별하는 작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담담한 논조로 쓴 기사이지만 이 보도가 나가자마자 제주도 당국자들이 화들짝 놀라 반응했다. “각하 지시사항인데 어떻게 함부로 기사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도대체 대통령의 구체적인 지시가 무어냐고 따져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취재에 착수했다. 공무원들은 비밀 유지에 급급했다. 그러다 어렵게 ‘대외비’ 딱지가 붙여진 ‘제주돌 활용 계획안’을 입수할 수 있었다. 첫 장을 여는 순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돌을 자원화해서 소득을 높인다는 목적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제주에 있는 밭돌담을 비롯해 집 울타리까지 돌담은 전부 없애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 산울타리를 만든다는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구체적인 이석 계획으로는 △1단계(1982~1984년) 일주도로 변의 돌담 △2단계(1985~1990년) 일주도로 변 가시지역 100m 이내 돌담 △3단계(1991년 이후) 기타 지역으로 도로변의 돌담만이 아니라 주택 울타리인 ‘집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전담 사업소나 공사 설립도 검토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 어처구니없는 계획안이 도대체 어떤 발상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작성되었는지를 추적했다. 그러다 전두환 대통령의 발언 요지를 탐지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제주 순시 첫날 제주KAL호텔에서 숙박한 후, 다음날인 2월 7일 오전 동회선 일주도로를 따라 서귀포로 향했다. 여전히 진눈깨비가 날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군 수송기가 한라산에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간밤에 받았을 테니 아무리 독한 자라도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이다.

구좌읍 김녕리를 지날 무렵, 전두환은 눈이 쌓인 창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일대의 밭들은 대부분 작고 경계가 구불구불하게 구획지어 있는 특징이 있었다. 전두환은 동승한 최재영 도지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최 지사, 제주도는 관광으로 먹고 살아야 할 텐데, 저렇게 돌담이 올망졸망하고 을씨년스러워서 외국 관광객들이 와서 뭐라 하겠나? 가난하게 보이지 않겠나? 거 있잖아. 스위스 같은 데 가보면 숲이 울창해서 아름다우면서도 풍요롭게 보이는데 말이야.”

눈에 덮힌 올망졸망한 제주 밭돌담. 사진=강정효<br>
눈에 덮힌 올망졸망한 제주 밭돌담. 사진=강정효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느닷없이 ‘돌담 이석 사업’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육군 대령 출신인 최재영 지사는 이 사업을 군사 작전하듯 몰아붙였다. 처음엔 도청 관광국에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제주도 출신 공무원들은 돌담의 역사와 현지 사정을 도외시한 이런 시책을 하달받자 기겁하고 뒷걸음질 쳤다. 속도가 안 나자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노건일(행정고시 13회‧교통부장관 역임) 부지사가 직접 펜대를 잡았다고 한다. 그때는 부지사가 한 명뿐인 시절이었다. 

폐간 위험 무릅쓴 보도…“타깃은 제주도정으로” 전략 주효

전후 사정을 파악한 필자는 이 무도한 상황을 기사화해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머리가 아파왔다. 전두환이 누구인가. 당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막강 권력의 우두머리였다. 최근 개봉된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보듯, 12‧12 군사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후 1980년 5‧18 광주학살, 삼청교육대 인권탄압, 10‧27 법란 등 거칠 것 없던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언론 통폐합, 언론인 강제 해직, 보도지침 등으로 언론도 통제했다. 전두환이 눈 한번 흘겼다하면 지방신문 하나 폐간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던 시국이었다.

신문사에 돌아온 필자는 먼저 편집 데스크인 송상일 부국장에게 보고하고 의논했다. 그라면 신뢰할 만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신문 4‧3취재반의 ‘4‧3의 증언’이란 장기 연재가 첫 보도될 때였다. 신문사 경영 측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그는 ‘4‧3 연재로 인해 문제가 발생시 모든 책임이 편집국장에게 있고 회사는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4‧3취재반장인 필자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취재반의 활동에 부담이나 제약이 될까 봐 그랬다는 것이다. 

돌담과 관련된 전후 사정을 보고받은 데스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고위 간부회의가 열렸다. 조금 있자 세 가지 오더가 떨어졌다. 첫째, ’대통령 지시‘라는 말은 빼고 순전히 제주도정의 무모한 시책으로 타깃을 삼을 것, 둘째는 각계 여론을 수렴해 기사에 반영할 것, 셋째는 최대한 빨리 기사를 작성할 것. 세 번째 오더는 안기부나 보안부대를 의식했던 것 같다. 그들 조직이 개입하는 순간, 대통령과 관련성이 있는 기사를 신문에 반영하기는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돌담 이석 사업의 무모함을 폭로한 톱기사. (제주신문 1982년 2월 16일자)<br>
돌담 이석 사업의 무모함을 폭로한 톱기사. (제주신문 1982년 2월 16일자)

필자는 이 사안에 대해 논평해 줄 각계인사를 만났다. 문화재 전문위원 홍정표 선생, 민속학자 현용준 교수, 관광학 서경림 교수, 관광협회 유하영 부회장 등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필자의 설명을 듣고 지역 특성을 지워 없애는 계획이라며 펄펄 뛰었다. “향토경관은 곧 자연적인 정원이다. 돌담 자체가 석다(石多)인 제주의 특색인데 그것마저 없앤다면 그것은 관광정책을 역행하는 것”이라는 소리도 나왔다. 

비밀을 유지하며 기사는 빠르게 작성됐다. ’캠페인‘ 보도 하루 뒤인 1982년 2월 16일자 제주신문 톱기사는 “귀중한 관광자원 왜 없애려나…’국도변 밭돌담 치워 수벽조성계획‘에 각계 여론”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이어서 “돌담은 ’삼다도‘ 상징적 풍물”, “가뜩이나 특색있는 자원 사라지는데 보호책이 마땅”이라는 제목도 가세했다. 기사 리드는 이렇게 시작됐다. 

“제주도가 ’제주돌 활용계획’을 세우면서 일주도로 등 국도 주변의 돌담을 점차 없애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 수벽을 조성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어서 학계와 뜻있는 도민들로부터 ’제주도 특성이 무시된 계획‘이란 반발을 사고 있다.”

처음엔 과연 대통령과 연관성 있는 내용의 기사가 대서특필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편집국 간부들의 용단으로 기사는 크게 다뤄졌다. 윤전기에서 활기차게 떨어지는 신문을 보면서 안도감과 동시에 앞으로 닥칠 고난이 함께 그려졌다. 제주도정은 관련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발칵 뒤집어졌다. 역시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는 말이 앞섰고, “대외비 자료가 어떻게 보도됐느냐”면서 계획안 유출자에 대한 색출작업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첫 보도가 나갈 때, 만평도 함께 실렸다. 양병윤 화백의 4컷 만평 ’황우럭‘에는 도지사를 향해 “졸지에 삼다(三多)에서 이다(二多)로 격하시키는군요”라고 꼬집는 삽화를 실은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직전에 열린 간부회의에서 기사 게재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대통령 지시‘라고 하면 보도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순전히 제주도정의 시책인 양 타깃을 좁혀 잡아 공격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묘안을 제시한 장본인이 양 화백(편집부국장)이었다고 한다.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으로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호들갑을 떨던 도청 쪽이 오히려 조용했다. 그들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대통령의 지시보다 훨씬 오버한 계획안을 세웠던 처지라 청와대 쪽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제주신문 2월 18일자에 “밭돌담의 미학- 이 고장의 역사이자 자연의 일부”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송상일 부국장이 쓴 글이었다.

제주신문 돌담 이석계획 비판 사설 (1982년 2월 18일자)<br>
제주신문 돌담 이석계획 비판 사설 (1982년 2월 18일자)

“왜 이렇게 무모하고 훼손적인 생각을 밀고 나가야 할까?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먼 길을 와서 소재로 삼고, 작곡가에게는 깊은 울림으로 살아온 밭돌담을 안목 있는 사람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허물어 버리려는 착안은 경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장 풍광을 자기집 정원의 돌멩이 한 개 옮겨 놓듯이 즉흥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위험하고 불가하다.”

한국일보 돌담 이석 계획 비판 사설 (1982년 2월 19일자)<br>
한국일보 돌담 이석 계획 비판 사설 (1982년 2월 19일자)

중앙언론은 의외로 조용했다. 그러던 차에 한국일보가 2월 19일자 신문에 이 문제를 사설로 치고 나왔다. 사설 제목은 “돌담 헐어 파는 건 착각- 계획 백지화하여 제주의 멋 지켜야”였다. 

“황금의 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 배를 가르자는 사람이 지금은 있을 리가 없다. 이솝의 얘기에서 그 어리석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에서 돌담을 헐어서 돌멩이를 팔자는 계획이 그것 같다… 돌담이야말로 제주도의 색다른 자연과 문화가 창조해낸 역사의 산물이요, 황금을 낳는 거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분별없는 계획이 어떻게 공식화할 수 있었느냐에 있다.”

그 사설을 보면서 원군을 얻은 듯 한층 힘이 나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갔다. 첫 보도가 나간 지 일주일쯤 지난 무렵이었다. 한 공무원이 희소식이 있다면서 귀띔을 해 줬다. 'VIP 지방 순시 중의 지시 중 지역 실정이나 정서에 맞지 않은 것은 VIP 지시사항이라고 하지 말 것'이라는 요지의 대외 보안 문건을 중앙정부에서 각 시‧도에 시달했다는 것이다. 발송기관이 청와대인지, 내무부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의 긴 숨이 나왔다.

흑룡만리…지금은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가치 인정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처음 보는 공무원이 신문사에 찾아왔다. 내무부에서 근무하다 갓 제주도 기획담당관으로 부임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바로 당시 마흔 살이던 젊은 날의 김태환(제주특별자치도 초대 도지사) 서기관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기자님이 쓴 돌담 기사를 잘 봤습니다. 상당히 일리 있습니다. 제주도정에서는 이런 여론을 반영해서 돌담 활용계획을 수정하고자 하니 고견을 주십시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갓 부임한 신임 기획담당관에게 내린 최재영 지사의 첫 지시가 문제가 된 돌담 이석 사업을 수습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말이 ’수습‘이지 ’명분 있는 퇴로‘를 찾으라는 취지였던 것 같다. 다급해진 최 지사는 본래 이 업무가 관광국 소관이었음에도 그 경계를 뛰어넘어 젊은 서기관에게 기대를 걸고 특명을 내린 것이다.

필자는 그 계획 자체를 백지화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게 어렵다면 밭돌담이나 집담이 아닌, 돌무더기나 석산 등을 활용하는 제한된 계획으로 수정해서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아름다운 제주 밭담, 이젠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제주도 제공)<br>
아름다운 제주 밭담, 이젠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제주도 제공)

제주도 당국은 곧 돌담 활용계획을 대폭 수정, ’제한된 범위‘에서 돌 활용계획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일단 수습의 길을 찾았지만, 그 계획마저도 시일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절대 권력자가 생각 없이 던진 감상적인 말 한마디 때문에 밀고 나가던 돌담 이석 사업은 제동이 걸렸고, 다행히 제주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밭돌담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제주 밭돌담은 이제 인류의 유산이 됐다.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됐고, 2014년에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선정한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그 후에 해마다 ’제주밭담 축제‘도 열리고 있다. 올해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지 딱 10년이 되는 해여서 더욱 감회가 새롭다. 

’흑룡만리‘(黑龍萬里). 검은 현무암을 구불구불 쌓아 이은 모습이 마치 꿈틀거리며 나아가는 검은 용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길이만도 2만 2천여km에 이른다고 한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제주 선인들이 한 담 한 담 쌓아 만든 밭돌담- 대대손손 그 문화유산의 가치를 올곧게 인식하고 드높이고 보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양조훈

제주신문 및 제민일보 4.3취재반장, 제민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으로, 언론계를 떠난 뒤에도 4.3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4.3특별법이 제정된 이후인 2000년부터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4.3진상보고서 작성 실무책임을 맡았고, 이후에 제주4.3평화재단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김태환 도정에서 환경부지사를 역임(2009.7.22~2010.6.30)한 뒤에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국가기념사업분과 위원, 5.18기념재단 이사, 제주4.3평화교육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냈고, 2018년부터 제6대, 7대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22년부터 국무총리 소속 제주4.3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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