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3) 굴뚝새

 

굴뚝새

당초 너의 길은 낮은 데로 뚫렸어라
흉흉한 돌담뿌리 해거름이 서러운 날
채석장 아득히 오는 정釘 소리로 우는 새야

살아도 막장 같은 굴뚝이나 후비는 짓
대쪽 같은 목소리 담벼락에 찢겨나고
피 묻은 시어詩語만 흘리는 날갯짓 그 행적이여

한 생애 절반쯤은 누명 쓰고 사는 세상
시인은 언제부터 굴뚝새를 닮았던가
추녀 밑 배고픈 일월에 돌이끼만 쪼아라

/ 1988년 고정국 詩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시작노트

삼십 년 전에 강원도 어느 독자로부터, 인상적인 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나의 첫 시집 『진눈깨비』에 게재된 시조 「굴뚝새」에 공감했는지, 엽서 가득 그 독자가 겪었을 법 한, ‘누명’으로 인한 억울함의 하소연이었습니다. 엽서의 전면도 모자라, 주소 쓰는 앞면 여백에다 문장을 꼬불꼬불 비틀면서, 이어나간 깨알글씨가 그 내용보다 더 특이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소 란에는 “강원도 어느 독자로부터”말고는 연락처도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굴뚝새가 많았던 고향 위미에는, 겨울 끝 무렵에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있었습니다. 행동반경이 고작 수 킬로에 불과한 이 흑갈색 작은 새는, 가까운 숲속에서 여름을 보내다가 겨울이 오면, 동네 올레 돌담구멍이나, 굴뚝 등을 후비고 다녔습니다. “짹짹 짹짹”하며 대쪽 쪼개는 소리로 울다가, “쩍쩍쩍쩍” 먼 곳 채석장에서 석수石手들이 바위를 깰 때 사용하는 정釘소리로 아프게 들려오곤 했습니다. 고향에서는 이 새를 ‘고망ᄃᆞᆰ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행된 조류도감에는 ‘굴뚝새’ 또는 ‘쥐새’라 적혀 있습니다. 환경변화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제주에는 그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5년 전, 다도해 필자의 작업실 골목길 입구에서 그 새를 만났습니다. 쪼그만 날개를 달고, 어둑한 부엌이나 굴뚝, 올레 돌담구멍을 후비면서 돌이끼만 쪼아 먹던 그때 그 새! 병마와 가난을 누명처럼 쓰고 다녔던 나의 모습, 그리고 반생을 누명쓰고 살고 있다던 강원도 독자 분이 떠올랐습니다. 잠깐 사이, 바짝 긴장한 듯 짤막한 꽁지를 세우고, 세상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카메라에 보이고는, 마른 가시덤불 속으로 살아졌습니다. 
  
굴뚝새는 봄의 전령사임엔 틀림없습니다. 입춘이 지나고 설을 넘기면, 농부들의 오감도 이미 봄을 향해 열려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굴뚝새 울음만 듣고도, 농부들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해냅니다. “짹짹 짹짹” “쩍쩍쩍쩍”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 전령사의 희망찬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새벽입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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