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57) 베란다 3월 풍경

 

베란다 3월 풍경

투명한 잔등으로 불빛 튕겨 내는 일
맨발 잔뿌리로 지하계단을 더듬는 일
초록색 양손바닥에 하늘 영접하는 일

종일토록 전화 한 통 초인종도 울리지 않아
저들은 나를 보고 참 쓸쓸한 사내라 하네
세상이 너무 춥다고, 보일러를 켜라네

여름에도 제주가 춥다는 다문화 신부처럼
저을 위해 한 시간씩 보일러를 때라는 구나,
여름 꽃 사루비아가 한 겨울에 피어서

엊그제 돋보기 들고 우리 창에 찾아와서
‘오순이’ ‘도순이’의 머리 쓰다듬고 가신 
해님이 그리운가봐, 자꾸 창을 엿본다

/ 2013년 관찰일기 고정국 詩

#시작노트

노형동 우리 집 3층 베란다에는 여덟 개의 화분이 있고, 그 화분에는 아기감나무, 꽃기린, 쑥부쟁이, 민들레, 고추나무, 상추 등 어린 생명들이가족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해 여름이 다 지날 무렵, 비어 있던 화분에 난데없이 싹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한참 후 확인해보니, 여름에 꽃 피우는 사루비아였습니다. 그리고 동짓날 손주놈들과 함께 걸어둔 ‘동지무’가 4월까지 함께 하면서 관찰일기의 여백을 채워주곤 했답니다. 

시조 1만수 쓰기에 전념하던 지난 2012년 가을부터, 이들 베란다 애완식물들은 나와 함께 시인행세를 하면서 겨울을 넘겼습니다. 우리 베란다가 저들 살기에 알맞다는 듯, 11월 14일에 이 한 뼘 크기의 그 사루비아가 빨갛게 봉오리를 내밀었습니다. 

저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엉뚱한 표정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때가 있습니다. “겨울에 핀 꽃들은 눈물 빛이 빨갛더라/하나 둘 떨어지는 아프디 아픈 꽃잎/아파서 피를 삭히는 제 속내를 보이더라.”라는 등의 시조 음보에 맞춰 관찰일기를 썼습니다. 이 사루비아는 3년간 꽃을 피우고는 그 씨앗이 영글어 다시 후손을 남기기도 하면서, 가끔은 “제 얼굴 뜯어보세요, 진실이 곧 핏빛인 걸” 등의 수십 편의 시들을 선사해주고 정든 베란다를 떠났습니다. 

사랑 증오 질투 경쟁 
불같은 욕심 까지

갖출 것 다 갖춘
이 겨울날 사루비아가

노란 색 치마 길이를 
무릎 위로 
올렸다. (2013)

「꽃의 집착」

이런 종류의 관찰일기를 한 권 시집에 엮었더니, 2014년 <세종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면서, 나의 농협 통장에 세 자리 수고료가 찍혀있었습니다. 이처럼 저들 애완식물들은 “글을 쓰려거든, 이것저것 허둥대지 말고, 일정한 테마를 정해 그곳에 집중하다보면, 엉뚱한 결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라며 내 앞에서 가끔씩 ‘선생질’하기도 한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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