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립공원에서 배운다](2)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 옐로우스톤
‘위대한 발견, 국립공원’의 역사와 의미

 
▲ 이지훈 편집위원 ⓒ 제주의소리
이지훈 편집위원은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탠포드대학 아태연구소(APARC) 객원연구원으로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 위원은 ‘미국의 국립공원(과 자연유산) 관리정책’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공원 시스템’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한라산국립공원의 올바른 보존과 관리방향을 새롭게 모색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전장<나를 움직인 '요세미티(Yosemite)'>에서 필자는 미국인들의 국립공원에 대한 자부심이 각별하다고 얘기했다.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 제도(National Park System)'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런 의미를 뛰어넘어 자연과 문화자원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를 ‘공적 자산’으로 보호하겠다는, 국립공원의 ‘이념’을 처음 정립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미 국립공원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그 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그 역사에 대한 천착이라는 의미 외에도 ‘국립공원의 이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하겠다. 자 이제부터 120년 전 미국으로 떠나 보자.(이 이야기는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의 ‘자료마당/기타자료’ 중 ‘국립공원 관리제도의 유래(1,2,3)’에 비교적 간결하게 잘 정리돼 있다. 이 자료를 기초로 미국립공원청(NPS.gov)의 자료 등을 덧붙여 소개한다)

▲ ⓒnps.gov

소문으로만 떠돌던 진기한 ‘옐로우스톤’...‘랭포드’의 첫 탐사

미국 와이오밍(Wyoming)주 옐로우스톤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에는 온천, 간헐천, 계곡 그리고 다양한 식생 등도 있었지만, 특히 그 곳의 흙과 돌, 바위들이 노란빛을 많이 띠고 있어 ‘옐로우(Yellow)’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면적은 200만에이커(8,991.39㎢)로서 남한 면적의 10%에 해당된다. 이 ‘경이롭고 신비로운’ 자연경관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년도 채 되지 않은 1800년대부터.

1800년대 초부터 1850년대까지, 옐로우스톤의 놀라운 자연현상에 관한 이야기와 소문-깊은 황색 협곡과 물이 솟아오르는 웅덩이, 식식거리는 구멍, 부글대는 진흙, 무지개 색깔로 물든 간헐천 등-이, 옐로우스톤 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주리 (Missouri)주 세인트루이스(St.Louis)까지, 그 시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사냥꾼들과 모피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1860년대에 들어서는 금광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그 진기한 경관에 대한 소문과 기록들이 전해지기 시작해 옐로우스톤 지역에 인접한 몬타나(Montana)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소문에 가장 지대한 관심을 보인 사람은 몬타나주 토박이이자 훗날 옐로우스톤국립공원의 초대 관리소장이 된 ‘나다니엘 랭포드(Nathaniel P. Langford)’였다.

▲ 나다니엘 랭포드(Nathaniel Pitt Langford). 1871. ⓒnps.gov

랭포드는 1867년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 경이롭고 신비한 지역을 탐험하기 위하여 친구들과 계획을 세웠다가 인디언에 대한 두려움으로 포기했다. 2년 후인 1869년 그는 몬타나주의 주도인 헬레나(Helena)시 근방에 위치한 다이아몬드(Diamond)시에서 폴썸(David E. Folsom), 쿠크(Charles W. Cook), 피터슨(William Peterson)등과 함께 뜻을 모아 드디어 탐험에 나서게 된다.

고된 여정 끝에 마침내 옐로우스톤에 도착한 그들은 엄청나게 큰 온천과 100피트 이상 치솟아 오르는 간헐천 등 온갖 신비로운 자연현상을 목격하자마자 그 감동을 억누를 수 없어 하나같이 모자를 벗어 던지며 환호했고, 일행 중 쿠크는 이 지역을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신비스런 자연현상을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몬타나주 차원에서의 공식 탐사단, 워시번 탐험대

랭포드의 탐사는 이듬해인 1870년 몬타나주 차원의 본격적인 옐로우스톤 탐험대의 창설로 이어진다. 이 탐험대는 독립전쟁 당시 시민군 장군을 역임한 전직의원 헨리 워시번(Henry D. Washburn)을 조사책임자(대장)로 하였고, 랭포드 또한 이 탐험대의 창설에 적극 지원함은 물론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동년 9월 19일 밤 탐험대가 기번(Gibbon)강변에서 야영을 할 때 대원중 한 명이 이런 제안을 한다. “이곳이야말로 관광명소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만의 공동소유와 투자방안을 논의해 봅시다.” 깃발만 꽂으면 자신의 땅이 될 수 있었던 시기, 이 대원의 주장은 당 시대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법률가 코넬리우스 헤지스(Cornelius Hedges)는 반대했다. 대신 이런 제안을 했다. “이처럼 신비스러운 곳을 결코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사유지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온 국민이 보고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헨리 워시번(사진 좌),코넬리우스 헤지스(사진 우),  ⓒnps.gov
▲ 국립공원의 이념이 태동한 기번 강변에서의 워시번 탐험대의 야영장면을 그린 상상도(Diorama) ⓒnps.gov

헤지스의 주장은 이 지역을 공공(公共) 유보지(Public park)의 개념을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헤지스의 제안에 모든 대원들이 흔쾌히 동의하면서 옐로우스톤 지역을 국립공원(National Park)으로 지정하자는 내용의 탐사보고서를 작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경이롭고 신비로운 자연현상", "사유(私有)가 아닌 공유(公有)", "국민 누구나 이용하고 즐거움을 누린다"는 탐험대의 주장이, 국립공원 초기 이념으로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1872년 법이 제정되어 옐로우스톤이 세계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 그랜트 대통령이 선언한 내용과 거의 같다.

탐험대원들의 결정은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정말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전 국토에 대한 토지 소유가 거의 확정되어가던 무렵이라 개인들 간의 땅 차지 경쟁이 극도에 달하던 이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엄청난 잠재적 투자가치가 있는 주요한 경관지역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의 소유와 대중의 이용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립공원을 설정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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