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밀항이야기(10)] 영철이 ⑤

▲ 제1횡단도로 개통식. 1962년 제주도 길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제1횡단도로 개통식 모습. 주민들이 땅바닥에 앉는 가운데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사진=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비자도 없고 일자리마저 없어진 영철이.
이제 미나미(南)에서는 그가 설 곳이 없다. 돈 많이 들고 손님으로 가면 언제나 봉은 될 수 있을지 언정, 그의 일터로는 이제 인연이 끊어진 것이다.

갈 곳이란 노가다 판 이다. 장가도 가기 전 나이에 신체는 건강하다.
그때는 토목공사가 많이 있을 때였다. 關西空港이 공사를 할 때라, 토목공사팀들이 많이들 關西공항 건설현장으로 들어갔다. 그 관계로 토목공사의 일은 찾기가 쉬웠다. 또 일본 밥 2년 가까이 먹어서 일본말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안다.

하수도 관을 묻는 공사에 들어갔다.
지방으로 지방으로 다니면서 땅을 깊이 판 다음, 지름 2m, 3m의 관을 묻는 공사이다. 주로 야간작업이다.
낮에 땅을 파놓으면 밤에 사람 인력으로 관을 집어 놓고,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추운 겨울 작업은 사람을 죽이는 그런 추위 속에서 해야만 한다.

그래도 이 작업에 들어와서는 돈을 좀 모을 수 있었다.
봉급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 쓸 시간이 없어서 모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지방에 있다가, 오사카로 돌아오면, 배를 타는 선원들이 육지에 상륙했을 때처럼, 정신없이 술이 있고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것도 자주 올 수가 없어 가끔 있는 일이기에 그런데로 돈이 남아있다.

이 일을 3년쯤 했다.
나이도 30을 넘었고 일본 생활도 5년이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하라고 보채기도 한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일본돈 3백만엔을 가지고 일본에서 자수해서 한국으로 들어갔다.
중매로 결혼도 했고, 뭔가 좀 해 볼려고 했지만, 영철이 머리 속에는 계속 일본 생각밖에 없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한국돈 3천만원은 놀고 먹기에는 1년도 모자랐다.

그나마, 어머니는 저 녀석에게 자식이라도 생기면 마음 좀 잡으려나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자식도 없다.
돈 떨어지면 여자마저 시끄러워진다.
직장을 찾으라는 부인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

영철이 머리 속에는, 일본돈 1만엔은 한국돈 10만원, 일본 가서 한달 일하면 한국돈 3백만원이라는 생각밖에 없는데, 한 달에 백여만원도 안되는 제주도에서의 직장은 아예 머리 속에 있을 리가 없다.
마누라 바가지 소리에 슬그머니 여권도 만들어 놓았고 일본 비자도 받아 놓았다.

영철이는 결혼한 자기 마누라와 자세한 의논도 없이 그저 일본에 가서 돈 만들어 오리라는 말만 남기고 오사카 비행기를 탔다.
결혼한 부인과 같이 산 것은 몇 개월에 불과하다.

당시 관광비자는 15일.
15일 일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번에도 일본에 입국하면 비자 버리고 일하겠다는 생각이다. 비자만 버리면 될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결혼한 마누라까지 버려야 되는 것이다.

이래서 일본에 입국
노가다 일은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많고, 일도 익숙하고, 일본말도 할줄 알고, 길도 안다.

▲ 횡단도로 톨게이트. 1972년 제주은행이 지어 기부체납한 '견월악' 근처에 있던 제주도 최초의 톨게이트. 횡단도로 통행료 징수는 1982년 폐지되었다. 사진=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또 노비자 인생, 밀입국자 인생이 시작되었다.
한국 마누라에게 돈을 보내준 적도 없다.
그저 하루 벌어서 자기 하루 잘 쓰면 그만인 생활인 것이다.
돈 소식도 없고, 사람 소식도 없어지니, 결혼한 마누라도 서서히 다른 생각을 해 가는 모양이다. 영철이는 차라리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일본 밥 5년쯤 먹었다고, 한국 밥이 입에 맞질 않는 것이며, 또 한국여자도 맞질 않는 것이다.
일본에 와서 또 다른 여자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혼한 후 일본에 온 여자로, 물론 이 여자도 노비자이다.
이 여자가 보통이 아님은 소문 난 여자이다. 술을 마시면 남자 저리가라는 꾼이다.

일본에 있는 아버지와는 가끔 만난다. 어머니가 있는 집에는 갈 수도 없다.
그저 조용히 다방에서 아버지와 만나서 이야기만 할뿐.
그래도 요즘엔 아버지에게 용돈도 좀 드릴 줄 안다.
아버지는 영철이에게 교포와 결혼해서 비자라도 만들어야 될 것 아니냐고 말하고 있지만, 그런 눈치를 알고 있는 영철이 여자가 가만히 두질 않는다.

일본 와서 이래 저래 20여년 가까이.
이제 영철이 나이 50을 바라보는 나이이다. 한국에 가도 할 일이 없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중견 간부급이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이 중학생 고등학생들이다. 좋은 학교에 진학시킨다고 열심들이다.

영철이는 자식도 없고, 벌어 논 돈도 또 재산도 없다. 그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마시고, 빠찡꼬 집이나 출입하는 그런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에서 만난 여자와도 그리 순탄한 부부생활이 아니다.

일본물 먹지 말고 한국에서 가만히 대학 잘 졸업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이 무엇 이길래, 일본 무엇이 그렇게 좋았기에, 아직도 지나가는 순경만 보면 겁이 나는 노비자 인생이다. ...

 영철이 이야기는 끝입니다.  다음은 세 번째 이야기 <김순보씨>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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