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밀항이야기(14] 유도가 김순보씨 ④

▲ 옛 부두로. 산지천을 따라 조성된 부두로 내려가는 길가 풍경. 자전거 마차 리어카 트럭 등 다양한 운송 수단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다리 밑에는 빨래를 하고 있는 아낙네도 보인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일본 집에는 부모님과 4형제(누님 형님 본인 남동생) 이 오래만에 단란한 가족이 되었다.

순보 소년은 학교에 가게 되었다. 부모님들이 등록 없이도 갈수 있는 학교를 수소문해서 학교에 넣어졌다. 학교에 갔더니 간단한 시험을 본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름은 쓰란다. 순보 소년은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썼다.

이 대답을 본 선생님이 '순보 동무 이리와' 하면서 직원실로 데리고 가더란다. 그리고는 조용히 타이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은 이승만이 아니라, 김일성 수령님 이라고 교육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집에 돌아온 순보소년에게 어머님는 이것저것 물어본다. 어머니에게 보고를 한다.

'어머니 잘도 이상헙디다.'
'나고라 순보 동무엔 허고... 선생님이 학생신디 동무엔 해도 되는 거우꽈'
'또 우리나라에서 제일 훌륭헌 사람이 누구냐? 엔 헌 시험엔 이승만 대통령이엔 쓰난, 그 사람이 아니라 김일성 수령님이엔 시킵디다'

어머니는 '아이고 빨갱이 학교에 보내졌구나게' 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니시이마짜토(西今里)의 어느 학교에 보내졌다. 밖에서 보면 일본학교 같았지만 들어가서 보니 조총련 학교였다. 이 학교도 그만두고 말았다.

등록이 없는 관계로 학교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는 곳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번엔 가정관계상 학교는 더욱더 멀어졌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히가시나리 경찰서에 유도를 배우러 들어갔다. 일본에서는 경찰에서 유도와 검도를 일반인 또는 관할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경찰에는 무도 경찰이 많다. 그 무도경찰들이 지역주민을 위한 대민봉사인 것이다. 배우러 간 사람들에게는 영주권, 비자 등의 등록에 관한 검사 등은 없이, 배우러 와 주는 것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유도를 배운 동기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남자는 자기 방어를 위한 무도 하나는 배워 두어야 한다' 는 말이 입버릇이었다.

9살 때부터 일하면서 유도를 18살 때까지 10년을 했다. 재일동포 유도선수로 한국체전에 참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등록이 없는 밀항자인 것이다. 입국관리청에 자수를 했다. 다행스럽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등록을 만들려고 신청해서, 중간조사까지 해 놓은 서류가 나왔다.

등록심사는 너무 쉬게 끝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살아온 과정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히가시나리 경찰서에서 10여년간을 유도를 해 온 모범 청년이 된 것이다. 입국관리청에서 경찰에 조사를 의뢰를 했더니만, 경찰에서는 양 손 들고 도와준다.

생각 할 수도 없는 아주 경미한 조처, 벌금 1만엔만 지불하고서 등록이 나오게 되었다.

이래서 당당히 재일교포 유도선수단이 되어서 서울로 향할 수가 있었다.

▲ 산지천 부근 시가지. 1960년대 지금의 중소기업은행 제주지점 뒤쪽의 시가지. 멀리 중앙성당 첨탑과 도립병원(현재 제주대학교 병원)이 보인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제주의소리.
시는 한일회담 2년전 1959년, 지금처럼 비행기가 있는 시절도 또 정기 배편이 있는 시절도 아니다. 한국을 오가는 무역선에서 승선이 허가되면, 정식으로 출국하게 된다. 고오베(神戶)에서 무역선을 타고 하룻밤 만에 부산으로, 부산에서 열차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의 유도 시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빨리 빨리 제주도로 가고 싶었을 뿐이다. 부산으로 와서 한 많은 '이리호'를 타고서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시에서 버스를 타고 대정읍 영락리를 향했지만, 영락리보다 하나 전의 마을, 무릉리에서 내렸다. 영락리가 가까워지면서 마음이 바빠진 것이다. 무릉리에서 내려서 뛰어가는 것이 더 빠르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가만히 버스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인지,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뛰어 가 보았지만, 버스가 빠른 것은 확실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 왜 그랬는지 자기도 알 수 없다면서 웃음을 짓는다. 얼마나 고향이 반가웠을까? 그 고향 마을이 가까워지자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것이다.

제주도에 가 보았더니, 작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사촌 형님, 사촌 동생들도 몇몇이 사망해 있는 것이다. 또 같이 놀던 친구들도 더러는 보이질 않는 것이다. 친구들은 주로 6.25사변때, 가족들 몇 명은 4.3사건 때, 돌아가신 것이다. 본인은 전쟁과 무관한 일본에 있었지만, 그 사이에 한국은 또 제주도는 큰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것이다.

어려운 한국행 첫걸음, 다음부터는 재일동포팀 유도선수로서 매년 한국을 갈수 있었다. 1960년대의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 또 왕래는 지금으로선 상상 할 수 없으리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김순보씨는 유도를 해 왔기에 유도대표팀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한국에 갈수 있었다. 그때는 한국과 일본사이의 정기 비행기 항로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CAT편, 東京에서 출발(오전 7시50분發) 서울 경유, 필리핀 도착 편이 고작이었다. 그 당시부터 김순보씨는 선수로서 한국을 왕래할 수 있었다.

전국대회 첫 번째 대회가 제주도에서 열렸다. 제주도에서 열린 '소년체전' 이었다. 그때 김순보씨는 「재일동포 유도팀 감독」으로 참가했다.

제주도는 갈때 마다 달라졌다고 회고 한다.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더니 수도가 들어오고, 또 얼마를 지나니 「새마을 운동」소리가 들려, 시골 자갈길이 콘크리트 길로 변해 갔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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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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