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주 칼럼]사용자, 노동자와 고통분담하자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제주의소리
호황기에는 물가가 오르다가 경기가 불황일 때는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가격이 내린다는 경제학의 이론은 두 차례의 오일쇼크에 뒤이은 스태그플레이션 현상과 함께 폐기된 지 오래다. 물가가 움직이는 원인과 경기가 좋고 나쁜 원인이 각각 독립적으로 따로 놀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플레 기대심리라는 것이 작용하여 경기의 호 불호와 관계없이 임금과 물가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동반상승하는 현상도 흔히 목격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대로 최근 20여년 간은 세계 주요국들의 경제가 70년대와 같은 큰 인플레이션을 피하면서 성장하여 왔다. 세계 주요국 정책당국이 인플레 억제에 최우선순위를 두었던 데다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생필품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왔던 것이 인플레 없는 성장을 뒷받침해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에 세가지 악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첫째는 단연 미국의 서브 프라임 부실사태다. 가격거품이 잔뜩 끼어 있는 주택들을 담보로 전국 각지의 은행들이 주택대출을 하고 다시 이 대출들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여 세계 도처의 투자자들에게 넘겼는데 주택가격 거품이 꺼지며 일거에 전세계 금융시장을 파탄시켰다.

# 경기보다 인플레이션에 비중

둘째, 1년 전만 해도 60달러 대의 국제원유가격(WTI 기준)이 금년 2월 세자리수로 뛰더니 이제 정확히 두배가 되었다. 셋째, 식용 농산물 가격도 1년 사이에 55%가 뛰었다.

상호 연관을 굳이 찾으라면 다급해진 미국 중앙은행의 금리인하와 이로 인한 달러화 약세를 들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에 우리나라를 포함해 지구촌 전체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행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다시 들어섰다.

지난 6월 16일 제주도에서 열린 ASEM 재무장관회의, 그리고 그보다 일주일 전 일본 오사카에서 있었던 G-8 장관회의의 관심은 스태그플레이션에 집중되었다. 참석자들은 경기를 살리기 위한 정책과 인플레이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방향이 서로 상반된다는 딜레마를 공유하였다. 결국 예상대로 경기침체보다는 인플레이션 위협이 선결과제라는 점을 확인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 우선순위는 이미 각국의 공조를 얻고 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실업률이 4월의 5%기록에 이어 5월 중에는 5.5%로 큰 폭으로 늘어나 과거 22년의 기록을 돌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리인하를 더 이상 기대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유럽중앙은행 역시 작년 6월 이래 4% 선에 묶여 있던 정책금리를 곧 4.25%로 인상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중국은 대출억제를 위해 은행의 지급준비율을 이미 인상했고 인도도 일년 동안 동결하였던 금리를 8%로 올렸다.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 경기회복보다는 물가안정을 더 중요시하는 세계 주요국의 큰 흐름을 우리나라라고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5월 중 소비자물가가 7년 만에 가장 높은 4.9%를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도 10개월째 5%에 묶여 있다.

물가는 이미 오를 대로 올라있는 상황인데 물가 안정을 위해 통화긴축을 한다니 당장 각 경제 주체들에게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세계 각국에서 식량 품귀로 폭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대형 화물트럭들의 폭력 비폭력 시위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냉정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인플레 위협을 중시해야만 하는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취할 수 있는 정책 수단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회 각층이 함께 인내하며 고통을 나누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입장에 따라, 그리고 부의 정도에 따라 각 주체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고통분담의 큰 정신은 살아 있어야 한다.

# 사회통합 계기 될 수도

영국보험업협회의 피터 몬타뉴 투자국장은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실직자가 늘어나고 경기는 불황으로 가는데 최고경영자들이 여전히 거액의 연봉과 보너스를 받는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평판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갈 때는 자기를 돌아볼 기회가 없다. 어려울 때가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의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개인과 가계, 자영업자들과 기업들에게는 목표를 조금씩 낮추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것 외에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공기업과 공직사회, 그리고 민간 부문이긴 하지만 경쟁에 비교적 덜 노출되어 있는 산업 분야에 있어서는 그 동안 미루어져왔던 선진화 작업과 크고 작은 제도 개선에 눈을 돌리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대학교 산학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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