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나의 추석 이야기]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둥둥 떠오릅니다”

추석입니다. 올해의 추석은 악명 높은 '팔월 맹질'이라서, 준비하기도 더 힘들고, 기력에 부칩니다. 얼마 전, 요즈음은 며느리들만 명절증후군을 앓는 게 아니라, 남편에 시어머니까지 명절증후군을 겪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시어머니 뒤로 하나를 덧붙였습니다. 요즈음은 딸들도, 명절 증후군을 앓습니다. 온 집안에 스미는 기름 냄새부터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까지. 보통 신경으로는 환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명절을 좋아했습니다. 인절미를 만드시는 할머니 무릎에 길게 누울 수 있던 때였지요. 제비새끼처럼 입만 아, 아 벌리고 있자면 할머니께서 못생긴 떡 조각을 밀어 넣어주시곤 하셨는데, 모양이 파치라도 맛까지 파치여야 한다는 법은 없었나봅니다. 통통과 뚱뚱의 중간쯤 되는 저의 몸매에는, 분명 그 당시 욕심 부리던 인절미가 한 몫을 담당했을 테니까요.

어린 마음에, 송편은 먹기가 싫었습니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먹기가 아까워서 그랬습니다. 갓 쪄낸 송편에선 참기름 냄새와 솔 향이 향기롭게 섞여 풍겼고, 속에 들은 고명의 고소함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제겐 참으로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지만, 몇 가지나 되는 반죽과 고명을 만들고, 하나하나 빚어가며 고생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손이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습관이 되어서일까요? 저는 이제껏 제가 송편을 싫어한다고 생각 해 왔습니다.

올해엔 송편 색이 네 가지입니다. 본래 송편은 붉은빛, 푸른빛, 노란빛과 흰빛, 그리고 검은빛까지 다섯 가지 색으로 빚어내야 한다는데, 송편 빚는 데 선수이신 어머니께서 편찮으시거든요. 그래서 붉은빛, 푸른빛, 흰 빛 세 가지로만 빚어내었습니다. 그나마, 솜씨 좋기로 유명하신 우리 이모님께서 노란빛 한 가지를 보태주셔서 간신히 네 가지 색으로 구색을 맞출 수 있었지요.

▲ ⓒ제주의소리 김로마나
딸을 낳지 않겠다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데, 제가 빚은 송편은 하나같이 일그러지고 터져대니 슬며시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렇게 예쁜 송편을 빚으시는 어머니도 저같이 평범한 딸밖에 낳지 못하셨는데, 주무르다 내버린 찰흙 같은 제 송편으로는 사람처럼 생긴 딸을 낳을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올해에 빚은 송편은, 크기가 좀 커서 그렇지 참 복스럽고 예쁩니다. 배는 통통하고 입은 '요망지게' 다물렸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의 참담한 실패 이래로 송편을 빚는 것은 처음입니다. 매 해 반죽과 고명은 거들어도 정작 빚을 때가 되면 설거지다 뭐다 하며 쏙 빠져나오곤 했으니까요. 아마 어머니가 편찮으시지 않았더라면,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약밥이 굳었는지 확인해보겠다며 푸닥거리기나 했을 테지요.

올해엔 송편을 먹었습니다. 이모님이 빚어주신 노란빛 단호박 송편에서는 깨 고명의 달콤한 맛이, 익반죽을 하다 손을 데인 흰 송편에서는 녹두의 담백한 맛이 났습니다. 육 년 만에 먹어보는 송편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차례 드시러 오시는 조상님도 서로 다투시며 드실 게 분명한 맛입니다.

차례 상을 차릴 일이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번거로울 손님맞이도, 송편 빛깔과 만듦새를 칭찬받을 생각에 기운차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둥근 접시에 곱게 돌려쌓으면 아버지께서 차례 상에 예쁘게 진설해 주시겠지요. 일이 수월하지야 않을 테지만, 뭐 어떻습니까. 편찮으신 어머니 몫까지, 제가 조금 더 바지런히 뛰면 될 것을요. 어차피 해야 할 고생이라면, 조금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게 나을 테니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말이 있었지요. 명절이 다가오면 짜증스런 생각부터 앞서곤 했는데, 이제야 왜 어른들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 일에 바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한 집에 사는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해 본 일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나란히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몇 개월만의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은 분명 지치고 피곤한데, 마음은 어째서인지 둥둥 떠오릅니다. 명절 준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편찮으신 어머니의 입맛을 끌만한 음식을 이것저것 찾아봅니다. 쉬지 않았는데도 콧노래가 나옵니다. 매콤한 게 좋을까, 담백한 게 좋을까.

▲ ⓒ제주의소리 김로마나
지난 새벽에 아버지와 함께 만든 장조림을 쭉쭉 찢어 담고는, 할머니께서 챙겨주신 묵을 접시에 옮겨 담습니다. 색 배합이 좀 부실한 것 같아 떡도 매콤하게 볶고, 생각이 난 김에 올리브유로 파스타도 볶습니다. 아무래도 조금 느끼해 보여서, 잘 익은 갓김치까지 썰어 챙기고는 애기배추를 담뿍 넣은 된장국을 넘치게 떠냅니다. 할머니 표 된장은 구수하고 입에 답니다. 기준 없는 식단에 실없는 우스갯소리만 주워섬기면서도 맘이 뿌듯합니다. 내일은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보름달'이 떴으면 좋겠습니다.  <제주의소리>

<제주의 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