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재 학생 ⓒ제주의소리
지금 필자 주변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그 어두운 그림자의 이름은 ‘체벌’과 ‘상·벌점제도’이다. 그 그림자 중 하나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속에 불운의 그림자요. 다른 하나는 지금 시국이 낳은 속물의 그림자이다.

먼저, 불운의 그림자가 주를 이루었던 과거의 대한민국의 교육은, ‘체벌’이 곧 교사들의 애정이요. 학생에 대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 애정과 사랑이 먹히던 시대는 대한민국은 아직, 일제가 30여 년간 우리를 통치한 ‘무단통치’의 잔재이자, 그들이 남기고 간 아픈 ‘유산’이었다. 이 ‘유산’은 교육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집단이나 국가통치에 악용되어, 5~80년대의 독재정권과 군부정권에서 일단은 때리고 보는 통제정책으로 그것을 보고 자란 학생들은 ‘체벌’이 곧 사회를 쉽게 통제하는 법이자, 진리라고 스스로 세뇌 당했다.

그리고 80년대의 민주화의 바람과 세계화라는 물결 속에서, 사회나 교육도 제 2의 개화기에 접어들었다. 선진국의 ‘체벌 없는 교육’과 ‘민주적인 사회운영’이라는 두 가지의 문물을 받아들인 대한민국에서는 체벌은 곧 사회의 발전을 역행하는 악성이자, 일제의 잔재라는 인식을 가졌고, 학생들 역시, 자신들이 항상 억압받고, 누군가에게 통제를 받아야하는 수동적인 인간이 아닌, 자기 스스로 의사결정과 표현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인간임을 자각했다.  

이제는 스스로 결정하는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주관적인 판단으로 자신을 내려치는 몽둥이를 향해서, 저항과 거부를 표현하면서, 자기를 보호하고, 인권을 수호했다.

그렇지만, 불운의 그림자를 습득하며, 학교를 다닌 기성세대인 관계자들의 눈에는 이들은 ‘사회를 거부하는 반동분자이자,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는 꼴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옛날같이 체벌을 해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바라봐주던 학부모들도 없다. 단지, 자기자식을 위해서, 자기에게 항의하는 ‘막가파 부모’만이 학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지만, 그들은 사회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면서, 이제는 체벌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점차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체벌’보다 더욱 효과적인 지도방법을 개발했다고 좋아했다. 바로 속물의 그림자인‘상·벌점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원래, 운전면허제도에서의 ‘벌점’을 기초로 한 것이다. 벌점이 일정수를 넘어서면, 운전면허정지와 취소를 받듯이, 벌점이 일정수가 넘으면, ‘교내봉사’, ‘사회봉사’, ‘무기정학’, ‘퇴학’ 의 처분을 내리기 때문에, 교사들은 체벌 같이 물리적인 형벌보다는 안전하고, 합리적인 제도라고 하면서, 최근 5년 동안 제주도내 중·고교들은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제도에 관해서, 최근 학생들 사이에는 ‘시나리오’가 번지고 있다. 시나리오의 내용은 학교당국이 상·벌점제 도입을 통해서, 학교는 자신들의 주관적인 평가를 악용해서 벌점을 부과하고, 벌점을 받은 입시나 진로에서 해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만회하기위한 상점(賞點)획득을 해야 하고, 그 점수를 위해서라면 그들은 학교의 어떠한 지시든지 무조건 복종하고, 이행해야하는, 한마디로 ‘점수의 노예’가 전락한다는 우려가 바로 학생들이 주장하고, 생각하는 ‘시나리오’인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당국의 거듭된 부인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점차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널리 퍼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를 들으면서, 문득 과거 6~80년대 어두운 우리의 근·현대사를 생각했다. 지난 독재정권 하에서는 정부의 주관적인 판단과 정책으로, 많은 무고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남산 지하실’과 ‘남영동’으로 보내져서, 각종 고문과 연좌제라는 악성제도를 통해서, 결국에는 그들은 정권에 굴복하고, 자신은 ‘죄인’이라는 오명으로 그 많은 세월을 고통 받은 것처럼.

우리들 역시, 단지 교사의 눈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벌점을 받아 진로에 지장을 받고, 학교에서는 ‘전과자’로 낙인을 받아야한다는 이 제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시대를 역행하는 학교당국의 ‘계엄령’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제주 3만 중·고등학생을 대변해서 이 상·벌점제도에 관한 공개적인 반대를 표명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제도는 앞에서 말했듯이, 학교측의 ‘계엄령’이자, 학생들을 ‘매 맞는 시대’에서 ‘점수의 시대속의 노예’로 만드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생이기 전에,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권리를 가진 인격체이다. 그리고 이 학생들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고, 권력을 가진 소수계층의 주관적인 평가로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으며, 반대할 수 있다.

특히, 우리 학생들은 ‘계엄령’에는 더더욱 수긍할 수 없다. 이제야 ‘매 맞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제는 교묘하게, 잔머리 쓰는 학교당국의 점수폭탄에 깔려 죽는 ‘점수의 노예’는 더욱 싫다는 것이다.

필자의 학교는 이제야 상·벌점제가 시행된다. 그리고 이 상·벌점제를 이미 실시하고 있는 타 학교 친구들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불의가 벌어지고 있어도, 그냥 모르는 척 외면해라. 그냥 흐르는 순리대로, 벌점만 받지 않게 살아라. 그냥 그들을 떠받치고 살아라.”   

이 제도는 필자의 친구를 권력에 굴복해서, 편안히 사는 법을 배우게 했다. 지난날, 조선 600년 역사속에서의 ‘신민’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지난 조선 60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권력에 맞선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후손이나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패가망신하는 비민주적인 시대에서, 밥이라도 빌어먹고 살고 싶으면, 불의와 부정 앞에서도 권력에 굴복하고, 그들의 명령에 이행하는 ‘사냥개’가 되어야했던, 그 역사가 이제는 학교에서 다시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지역사회에 요구한다. 학생들은 더 이상 ‘매 맞는 시대’도 ‘점수의 시대’도 원치 않는다. 그리고 학교당국도 학생들과 적극적인 열린 대화를 통해서, 이 제도를 대체하고, 학생과 학교가 서로 어울려지는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으로 자신의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육자라면 말이다...  / 제주제일고 2학년 이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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