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미경아!”

하고 꼭 한번은 나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마나 야무지고 똑똑했던지 어릴 적 별명이 ‘똑순이’였던 내가, 내 힘으로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시련이란 장벽 앞에 무너져 30대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마흔을 바라고 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라 고통의 시간을 하나씩 넘다보니 이제는 내 얼굴에 웃음도 보이고, 주변을 바라보는 여유도 생겼다.

지금 내 주변엔 유채꽃이 지천에 피고, 벚꽃은 겨울을 맞서 싸워 금의환향하는 봄의 여왕을 마중이나 하듯 도로마다 하얗게 웃음 짓고 섰는데, 지금 내가 짓고 있는 미소만 할까. 나의 미소에는 내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걸.

“넌 어떻게 엄마가 70년 살아온 인생보다 더 힘드냐? 태어날 때도 그렇게 힘들게 태어나더니.....”

엄마가 말끝을 흐린다. 난 거꾸로 태어났다. 남들은 머리부터 나온다더니 난 발부터 세상구경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태어난 난 그래도 썩 나쁘지 않게 성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더니 남편을 만나면서 내 인생은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어느 날 남편이 직접 쓴 소설을 들고 와서는 프러포즈를 했다. 누구도 그 소설을 읽고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너무 무겁다며 그 짐을 던져두고 자유를 찾아 떠났다. 난 엄마이기에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내게 남겨진 아이는 내가 숨을 쉬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만들었다. 호흡기에 의존해야만 겨우 숨을 쉬는 아이, 그 아이 앞에서 내가 어찌 슬퍼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 아이가 있어 모진 목숨 이어가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하지 않는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저승을 드나드는 시간들이 나의 뼈를 삭게 만들고 내 피를 마르게 했다. 작은 숨 몰아쉬며 겨우 생을 이어가는 아이 곁에서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이 아이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릴까봐 눈물 한 번 제대로 짓지 못한 나를 마흔이 된 내가 꼭 안아주고 싶다.

‘신은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고 했다. 난 그 말을 믿었다. 나와 아이의 의지는 신마저 움직였다. 더 이상 ‘오늘’을 넘길 수 없는 아이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난 그걸 감히 기적이라고 이름 지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이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어야만했다. 무어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불교라는 종교를 가진 내가 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빌고 또 빌었다. 혹시나 나에게 죄가 있다면 살면서 갚을 테니 제발 아이만은 데려가지 말라고, 내 기도가 통한 것일까. 모유가 끊긴지 두 달이 되어 가는데, 젖이 모자라 제대로 먹여보지도 못했는데, 내 가슴에서 젖이 흘렀다. 아이가 내 마음을 안 것일까 지독하게 꼼짝하지 않던 산소수치가 올라가고 간수치가 떨어졌다. 그렇게 아이는 지루하고 긴 싸움을 이겨내고 중환자실에서 벗어났다. 아직도 그 아이는 질병과 싸워야 하지만 우리는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다. 남편의 벗어놓고 간 ‘가장’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하면 믿지 않을까? 그래도 그게 사실인걸.

미경아!

그래, 우리 신나게 웃자. 내가 짊어진 ‘가장’이라는 짐 안에는 부담과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만이 느끼는 사랑과 행복도 들어 있고, 그래서 그 짐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으니 말이야. 미리 알았더라면 남편도 이 행복을 같이 느낄 수가 있었을텐데. 

제주도 말에 ‘촘앙 살당보민 살아질거야’ 라는 말이 었던데 진짜 촘앙 살다보난 살아점신게 마씨.

<제주시 삼양일동 한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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