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시글로벌아카데미(37)]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은 ‘박정희 경제통’이라 불릴 정도로 당시 경제 정책의 핵심이었던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직접적인 관여를 했던 경제학자다.

그에게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 정책 뒷 얘기가 이어진다.

백영훈 원장은 24일 서귀포시평생학습센터에서 진행된 서른일곱 번째 서귀포시글로벌아카데미 강단에 섰다.

60년대 독일에 파견됐던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 이야기가 먼저 이어졌다. 백 원장은 당시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게 됐던 사연을 이렇게 얘기한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미국에서 경제원조를 끊었다. 당시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군인들이 모두 일어날 때였다. 이때 한국서 쿠데타가 성공하면 동남아에서도 전부 일어난다 했다. 박정희가 꼼짝 못하고 미국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백악관까지 갔는데 케네디 대통령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국은 결국 경제원조를 끊었고 미국서 주던 잉여농산물도 다 가져갔다.”

▲ ⓒ제주의소리

미국서 경제원조를 끊자 한국은 독일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미국에 원조를 받고 있던 독일 역시 한국 경제에 숨통이 돼 주지는 못했다. 이 때 독일과 한국 사이에 통역관으로 간 것이 백영훈 원장. 이 때부터 백 원장은 독일과의 가교 역할을 시작하게 된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독일 유학시절 알게 된 경제학 교수와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백 원장은 사실 한국 최초의 국비 독일유학생이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쟁쟁한 교수들과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은사님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를 했다. 몸부림치니 스승이 가만 있을 수 있다. 독일 경제부 장관은 못 만나도 차관을 만났다. 독일 정부서 3천만달러 차관을 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은행 가서 지급보증만 받으면 됐다. 하지만 지급 보증 해주는 은행이 없었다. 국가 공신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도움의 손길은 소용이 없었다. 아직 국가 경제력이 미비한 때였기 때문. 이어진 두 번째 도움의 손길은 친구로부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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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친구가 방법이 있다 했다. 다음날 그 친구가 독일 법령집을 가져왔다. 그가 독일 대사에게 탄광 석탄 광부 5천명이 파견 가능하냐고 물었다. 석탄을 캐야하는 데 지하 1천미터 밑이다. 그 곳은 지열이 40도로 뜨거워 못간다. 해외 기술자들 데려왔지만 도망갔다. 대사가 5만명도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독일 친구는 다시 간호사 2천명도 가능한가 물어왔다. 독일 시골에 병원을 짓지만 간호원이 없다는 것이다. 대사는 아무 문제 없다 했다. 우리는 긴급 전보를 쳤다. 빨리 모집해 독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전 신문이 광부 5천명과 간호사 2천명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광부가 4만8천명, 간호사가 2만7천명이 지원을 했다. 이 중 7천명이 서울 군포비행장에서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고국을 떠났다.

백 원장은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고용계약서를 섰다. 이들이 일한 3년간의 월급을 몽땅 독일 은행에 예금한다는 각서였다.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차관은 7천명의 몸을 담보로 돈을 꾼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경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상공부에서 ‘세일즈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그의 사명은 이제 어떻게 빌린 돈을 갚느냐였다. 그러려면 상품을 팔아 이윤을 남겨야 했다. 무엇을 수출할 것인가. 이를 찾기 위해 세계 백화점을 2바퀴 돌았다. 그는 다섯가지를 찾는다.

“서양사람들이 새까만 머리 가발을 사려고 줄 서있었다. 우리나라에 시골가면 많다. 돈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자기 머리카락이다. 돌아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보고했더니 다음날 바로 단발령을 내렸다. 전국에서 머리자르기 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8백만달러 가발을 수출했다. 또 하나는 헝겊 인형이다. 시골에 미싱 가져다 주니 강아지, 인형 만들어 팔아 5백만 달러를 수출했다. 또 플라스틱으로 인조조화 만들었다. 장미, 백합 잘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램프도 입으로 전부 구로공단에서 불어 만든 거다. 다섯 번째가 ‘코리아 밍크’다. 한국 시골가면 쥐 큰 놈 많다. 누가 알게 뭔가. 청와대에 보고했더니 대통령이 다음 날 쥐잡기 운동을 명했다. 도지사한테 인구비례로 할당했다. 충청도에도 1만5천 마리를 할당했는데 1천마리가 미달돼 바로 해직됐다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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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리나라는 1964년 1억달러 수출을 달성하고 77년에는 1인당 GNP 1천달러, 수출 100억불을 달성한다. 백 원장은 77년도를 ‘한민족 성취의 해’라고 말한다. 그는 “조그마한 땅에서 전세계 10대 강국이 된 것은 대단하다. 2차대전 이후에 식민지로부터 독립된 나라 147개국이다. 전부 독립됐다. 146개 국가는 지금도 GNP 2천달러 미만이다. 한 나라만이 수출 10대 강국, 경제 10위국 올라올 게 한국 뿐이다.”라며 자랑스러워 했다.

그는 15-17세기의 팍스 로마시대를 거쳐 18-19세기의 영국시대, 최근 100년은 팍스 아메리카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팍스 아시아 시대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아시아의 시대에 리더는 단연 한국이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는 동경대학 100주년 연설에서 세계 유수의 학자들의 말을 빌린다.

“한국이 아시아 시대 리더가 되는 이유를 학자들이 가르쳐 준다. 리더의 조건 첫 번째는 사회 도덕심을 갖춘 민족이라는 점이다. 사회도덕심은 종교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일본은 없다. 잡신 국가다. 중국도 공산주의 국가라 종교 없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있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그런 민족은 내세를 믿어 도덕심을 갖는다. 두 번째 조건은 문화에 혼이 있는 민족이다. 우리 역사는 전부 혼이다. 우리의 영화 문화 예술 스포츠 모두 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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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 원장은 제주가 한민족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앞으로 물류 시작을 내다 봤을 때 특히 그렇다고 말한다. 아시아가 전 세계의 중심이 되면서 엄청난 물동량이 제주 앞바다를 지나게 될 것이라는 것.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들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인드의 변화는 ‘기업가 정신’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다섯가지 가져야할 경영철학에 대해 말했다.

“첫 번째는 경영은 인류의 미래를 창조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보다 잘 사는 미래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경영의 목적은 이윤추구가 아니다. 성취의 기쁨, 성취의 희열이다. 그 결과로 돈이 벌리는 것이다. 두 번째 경영철학은 경영은 학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영은 실천의 위한 지혜다. 박사 필요없다. 경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지혜다. 세 번째는 경영은 끊임없는 혁신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제를 혁신해서 오늘을 창조하고 오늘을 혁신해서 내일을 창조한다. 네 번째 경영은 경쟁력은 조직력이다. 개인만으로는 안 된다. 팀 웍으로 같이 모여 주민들이 협력하고 민관합동으로 하고 조직의 힘이 나와야 경쟁력 나온다. 다섯 번째 경영은 가장 소중한 자산은 자본도 아니고 기술도 아닌 인적자산이다.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을 남겼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말이라며 강조했다. “미래는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다가온다고 말했다. 미래를 믿지 않으면 그냥 간다고 한다. 믿으십시오. 확신을 가지면 미래가 자기한테 다가온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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