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4)] 제5대 제주도지사 김충희 ③

6.25 사변이 발발한지 한달이 지나면서 밀려드는 피난민 속에는 당대의 실력자 이기붕(李起鵬) 서울시장을 비롯해서 정치인, 체육인, 예술인, 대학교수 등이 대거 피난을 왔는데 이기붕 서울시장은 서울수복 전까지 도지사 관사에 머무르기도 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제주도에서도 7월20일에는 관덕정 광장에서 공비섬멸학생총궐기대회가 학도호국단제주도학생주관으로 개최됐는데 공비섬멸과 괴뢰섬멸을 외치며 도민과 학생들의 총궐기를 외쳤다.

학생들은 이어 7월28일에는 제주신보에 광고를 내고 학생들을 모집한 뒤 학도돌격대를 조직하여 출전준비를 서둘렀다. 이들은 8월2일 학도돌격대장에 김호산(金浩山)을 추대했다.

당시에는 병역제도가 없어 학생들에게 아무런 병역의무나 부담이 없었다. 학생들은 8월16일 첫 출정에 나서면서 학도돌격대부대라는 명칭 아래 독립부대를 유지해줄 것과 지휘통솔, 신병훈련 후 곧바로 전선에 투입시켜줄 것, 통일 후 지체없이 복학토록 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제주도 유지사건'으로 구속중인 교사들의 즉각 석방 등을 제주지구계엄사령관에게 요구했다.

신현준 계엄사령관은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학생들은 해병대 자원 입대가 결정됐다. 이날 출정식에는 학도지원병에 대한 무운장구를 비는 환송식이 학교강당에서 성대하면서도 엄숙히 거행됐다.

이에 앞서 1950년 7월말에는 육군 제5훈련소(소장 金炳徽 대령)가 제주항에 있는 주정공장에 설치됐으며 제1교육대가 모슬포, 제2교육대가 한림, 제2교육대가 제주농업학교에 각각 설치됐다. 훈련병의 대부분은 제주도민이었으며 일부가 육지부에서 들어온 피난민이었다.

그해 10월에는 백낙준(白樂濬) 문교부장관이 순시차 내도 했다. 백 장관의 방문은 피난민에 대한 교육실태 등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제주북초등학교 직원실에서는 제주시내 교장단이 마련한 백 장관 환영오찬 및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교장단은 제주지역에도 대학을 설립해달라고 요청했다.

백 장관은 "제주도라고 대학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고 조건만 구비하고 시설만 갖춘다면 인가가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그때 제주도에는 대학이 없어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면 육지로 나가야만 가능해 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어서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육지부에 나가 공부하는 것을 두고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에 빗대어 유학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백 장관의 이 같은 시사는 후에 제주대학의 태동의 계기가 됐다.

6.25 전쟁으로 한국최대의 보육원 '한국보육원' 탄생

그해 12월 북진(北進)의 승전 소식이 속속 전해지던 중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는가 했더니 국군의 후퇴소식이 전해졌다.

12월16일 서울시는 종로국민학교에 수용중인 서울시립아동양육원 소속 고아 1000여명을 한강이남으로 피난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고아원의 구호물자 보관책임자인 배학복(裵學福. 영락교회 여전도부장. 후에 제6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崔承萬지사와 결혼)과 장복순(張福順)의 긴급 피난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이기붕 서울시장은 "그러면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묻자 이들은“한강만 넘겨주면 아무 데라도 좋다”고 말해 고아들을 안양으로 일단 옮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제주도로 바뀌었다. 이 서울시장은 고아들을 제주도로 후송할 계획을 세우고 수송은 미군과 협의중이니 일단 인천항으로 가서 기다려달라고 전했다.

이때 고아원 고문에는 최승만(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대학교 교수)으로 임명되어 이들의 수송을 도우면서 고아원 운영과 감독을 맡고 있는 미군 군목(軍牧) 부라이젤의 통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최승만은 피난을 서둘던 중 서울시 사회국장 박학전(朴鶴田)을 만나 우연히 고문직에 임명됐는데 피난 전까지 연희대학교 도서관장직을 맡고 있었다.

고아원 구호물자책임자 배학복 등은 고아들을 섬으로 옮기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식량이 있어야 함으로 석달 열흘 분의 식량을 확보해달라고 고집했다.

고아들에 대한 수송작전은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시민에 대한 피난 명령이 발표되기 하루 전인 12월23일 새벽5시에 시작됐다. 어린이는 어린이들대로, 구호물자는 구호물자대로 트럭에 나눠졌다. 이들 수송에는 미군트럭 37대가 동원됐으며 고아들과 물자는 모두 동인천역에 있는 축현국민학교로 옮겨졌다.

구호물자는 3개의 창고 속에 보관됐다. 고아들은 난방이 안된 국민학교 2층 강당에 밤을 보내야 했다. 막상 도착한 뒤의 더 큰 문제는 목적지인 제주도까지의 수송이었다. 서울시는 마침 제주지방의 구호물자인 시멘트 1000천 포대를 싣고 제주도로 가기로 돼있는 화물선 1척을 주선하고 이 화물선을 통해 고아들을 수송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수송계획은 고아원측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어린아이들을 시멘트와 함께 승선시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더욱이 1000여명의 고아들과 화물을 동시에 선박으로 수송하는 데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를 것으로 보였다.

결국 선박수송계획은 비행기로 바뀌었다. 비행기 수송작전에는 UN군 소속 미군 제5공군 제61수송대가 참여했으며 헤스 공군대령이 총지휘를 맡았다. 이때 인천에 잇는 명진보육원생 60명도 합류하게 됐다.

전쟁고아 제1진이 도착한 것은 1951년 새해를 닷새 앞둔 12월27일 저녁이었다. 고아 수송에는 수송기 16대가 동원되었고 제주도의 저녁 하늘을 수놓으면서 장관을 이루었다. 이날 비행장에는 김충희 지사를 비롯한 도청 간부진과 도내 주요 기관장들이 모두 제주비행장에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이에 앞서 정부로부터 전쟁 고아 수송계획을 직접 전해들은 김 지사는 무려 1000여명에 이르는 고아들을 수용할 장소부터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거나 직접 둘러본 김 지사는 제주농업중학교가 가장 적당하다고 보고 최광식(崔光植) 교장을 찾아 고아수용문제를 논의했다.

최 교장은 학교로서는 상당히 곤란한 일이나 전국민이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당에 서로 참고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승낙했다. 김 지사는 군대의 협조를 얻어 농업중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설치하는 등 임시 수용소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고아들은 도착즉시 수용장소인 제주농업중학교까지 미군트럭에 나눠 수송됐다. 이들은 연령에 따라 천막과 교실 등에 분산 수용됐으며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 등이 임시 마련됐다.

제주농업중학교는 엄청나게 몰려든 고아들로 교실은 물론 서무과까지 내줘야 할 형편이었다. 후에 겨울방학을 끝낸 학생들은 학교시설의 대부분이 전쟁고아원으로 변해버린 모습에 놀랐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교실을 고아들에게 내준 학생들은 야외수업으로 대부분의 수업을 이어갔다.

이로써 당시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한국보육원이 탄생했다. 그때가 1951년 2월8일이었다.
제주도민들은 한국보육원을 가리켜 UN의 지원으로 설립됐다고 해서 'UN고아원'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극심한 식량난...배급문제로 사사건건 말썽 갈등

한국보육원의 전신인 서울시립아동양육원의 운영기관인 서울시는 원장에 김재호, 부원장에 배학복을 발령했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고아원 운영권을 놓고 서울시립아동양육원과 고아원 수송중에 함께 피난 온 인천 명진보육원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은 고아원에 지원되고 있는 풍부한 구호물자와 의약품에 있었다. 양측의 갖은 마찰은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전해지면서 진상조사를 위해 박학전 서울시 사회국장이 제주도에 내려오기에 이르렀다.

이 대통령은 이의 수습과 고아원의 정상적인 운영 등을 위해 마침 영국에서 사회사업의 전문교육을 받고 돌아온 황온순(黃溫順)에게 보육원의 운영책임을 맡겼다. 황온순은 처음 순수한 일반 고아원이 아니고 전쟁고아원이라는 점에서 맡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이 대통령과 이 서울시장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원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던 중 한국보육원 고문으로 있던 최승만은 도지사 관사에 묵고 있는 허정(許政) 사회부 장관에 의해 피난민 구호사업 책임자인 사회부 제주분실장에 임명됐다. 사회부에서는 이미 직원 6명이 내려와 피난민에 대한 구호사업을 펴고 있었으나 마땅한 책임자를 구하지 못하던 차에 허 장관이 서울에서부터 가까이 지내온 최승만에게 그 자리를 맡긴 것이었다.

사회부 제주분실사무소는 제주시내 남국민학교에 설치됐다. 구호사업에 관해서는 도지사도 사회부 분실장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구호양곡과 부식 등은 도청에서 보관 관리하되 지출은 사회부 분실장의 허락이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김충희 지사와 최승만 실장은 서로 불편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제주에 피난온 사람은 물론 현지 주민들에 대한 구호사업 모두 제주도의 소관사항일 뿐만 아니라 4.3 사건으로 피폐된 지역주민들의 구호도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부는 자신들의 구호사업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고 불만이 많았으며 하루라도 빨리 구호물자를 배급해야 되는데도 도청이 늑장을 부려 구호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더군다나 최승만 실장은 피난민 구호사업의 분명한 권한을 위해 사회부장관에게 '피난민 구호사업에 관해서는 도지사도 사회부 분실장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공문을 제주도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 실장의 입장에서도 구호물자 배급과 관련해서 더 이상 사회부 분실과 제주도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최 실장은 김충희 지사와 CAC 책임자, 민간측 대표로서 이호빈(李浩彬) 목사 등으로 구성된 피난민구호위원회를 조직하고 구호사업의 모든 업무를 협의하여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이처럼 구호물자에 대한 요구가 각계 각층마다 높아지면서 말썽도 끊이지 않았다. 군휼병감실(軍恤兵監室)과 같은 곳에서는 실제 병력보다 많은 유령(幽靈) 숫자를 만들어 구호양곡과 부식 등을 과다하게 받아내는 일이 많았다. 사실대로 보고해달라면 “군인에 대한 구호문제는 군대의 소관인데 왜 간섭하느냐”면서 막무가내 식이었다.

어느 날 김충희 지사는 지사실에서 최승만 실장과 함께 피난민에 대한 구호물자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그때 지사실 바로 옆에 위치한 전인홍 총무국장실에서 크게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군휼병감시 소속 군인 세 사람이 다짜고짜 지사실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시 임시 도청으로 사용하고 있는 관덕정은 널빤지로 칸막이를 설치하여 쓰고 있어서 옆방의 웬만한 소리는 그대로 들렸다.

지사실에는 김 지사와 최 실장, 김 국장, 사회과장을 비롯해서 세 명의 군인이 자리했다. 군인들 가운데 책임자로 보이는 중령은 왼쪽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 주머니에 손을 대면서 큰 소리로 "우리 군인들은 단순하다"고 말하고 "군인에 대한 구호업무는 군대에게 전적으로 위임해달라"면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김 지사 등을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김 지사가 "휼병감실에서 구호사무를 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중령은 "군인문제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면서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같이 있던 최 실장이 "구호 대상자의 성명과 계급만 분명히 적어준다면 그것에 의해 구호양곡과 부식을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자 군인들은 "알겠다"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구호물자에 대한 배급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군대까지 노골적으로 개입하려 하여 갈등이 컸다.

전쟁의 와중인 1950년 12월7일에 내려졌던 비상계엄령은 두 달 후인 1951년 2월19일 제주도에 한해 해제됐다. 그 동안 계엄사와 군대의 위력에 눌려 대민 행정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제주도로서는 매우 반가운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전국의 피난민의 숫자는 200만명에 달했다.
김충희 지사는 그해 3월14일과 3월21일에 서울과 춘천이 각각 재탈환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기미를 보이자 4.3 사건으로 피폐된 제주도내 농촌재건을 위해서는 전담부서의 설치가 절실하다고 보고 내무부의 승인을 얻어 도청에 산업국을 부활시켰다.

그때 제주도의 기구는 1948년 11월에 공포된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법률 제8호)과 '지방행정기관직제'(대통령령 제32호), 1949년 7월에 제정된 지방자치법에 의해 총무국 1국과 서무, 회계, 지방, 농림, 축정, 문교사회과 등 6과를 두고 있었다. 도제가 처음 실시됐을 때만 하더라도 총무국, 산업국, 보건후생국 등 3국을 두었으나 이후 총무국만 남겨두고 산업국과 보건후생국은 폐지됐다.

그해 4월1일자로 산업국이 부활되면서 제주도의 직제는 경찰국을 포함해 3국10과로 확대됐다. 산업국장에는 이홍림 농무과장이 승진 발령됐다.

이즈음 제주도에 들어온 피난민 숫자도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1951년 5월20일에 제주도의 피난민 숫자는 제주도민 인구의 절반이 넘는 14만8794명이었다. 이와 함께 1950년 7월부터 1951년 5월까지 피난민들에게 지급된 구호물자는 양곡 4052톤, 모포 1만500매, 침대 2000개, 이불 2000장, 소금 200톤, 자켓 2만개, 천막 350장, 아동용 급식품 2088상장 등이었다.

또 피난민들에 대한 보거위생지원을 위해 구호병원 4개소와 진료소 30개소가 설치 운영됐으며 16개반에 64명의 의료진이 활동했다. 이들이 1년동안 진료한 환자는 17만3595명이었으며 발진티푸스. 천연두, 장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숨진 사람은 71명이었다.

제주에서 활짝 핀 6.25 피난시대 문화예술

당시 피난민 가운데는 중앙의 저명한 예술인들이 대거 내도, 제주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국문학자 장지영(張志暎), 시인 계용묵(桂鎔默) 장수철(張壽哲) 박목월(朴木月), 화가 이중섭(李仲燮), 영화감독 김묵(金默) 등은 피난 중에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언론인 곽복산(郭福山)은 제주신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탁구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이경호(李慶浩)와 민병태(閔丙台) 등은 제주체육발전에 기여했다. 후에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金相敦)의 동생 김상흡(金相洽)은 피난민 표를 기반으로 제주도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제주도내 곳곳은 피난민촌이 형성됐고 길거리에는 행상으로 북적거렸다. 용천수가 나오는 해안가에는 식수를 길어 파는 물장사로 장사진을 이뤄 제주의 물 인심마저 사나워졌다. 대문이 없던 집에는 대문이 만들어졌고 잘 사는 집에는 가시철망과 병조각이 담장에 설치되는 등 삼다(三多) 삼무(三無)를 자랑했던 제주풍물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또 학교 교실은 거의 방위군과 주둔 군인들의 숙소로 이용됐으며 식량이 부족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 제주읍내 근교에 있는 사라봉과 광양공동묘지에는 새로운 무덤이 계속 생겨났다.

1951년 6월5일에는 제주도피난민협회가 결성됐다. 이날 도청 청사로 임시 사용되고 있는 관덕정 앞에서 거행된 피난민대회에는 김충희 지사와 최승만 사회부 분실장을 비롯해서 KCAC(한국민사원조사령부) 관계관과 피난민 3000여명이 모이는 등 피난민들은 자신들의 단합된 힘을 과시해 보였다. 피난민협회장에는 김호빈(金浩彬)이 선출됐다.

피난민협회는 제주도정에 상당한 압력단체가 됐다.
이 때문에 김 지사는 "제주도의 주민들도 생계유지가 어려운 실정이지만 피난민에 대한 구호사업에 적극 펼 것이며 피난민 여러분도 도정에 협조해달라"고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또 최 실장은 "피난민 중에 한 사람이라도 먹지 못해 죽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로 피난민들을 달랬다.

이처럼 피난민에 대한 구호사업의 비중이 커지자 정부는 사회부 제주도분실에서 맡고 있는 구호사업을 제주도로 이관하는 문제를 강구했다. 구호사업을 둘러싸고 사회부 분실과 제주도의 이원화로 갈등이 심한데다 지역주민과 피난민 사이에도 알력이 계속돼 도지사가 지역주민에게만 구호물자를 배급하고 피난민을 외면한다는 투서가 잇따랐다.

구호물자 배급물만 투서로 김충희 지사 사표제출

따라서 정부는 사회부 분실의 폐지와 구호업무에 대한 도청이관 및 김충희 지사에 대한 경질문제를 검토했다.

김충희 지사에 대한 경질은 1951년 5월에 들어서면서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중앙 언론 등을 통해 전해지다가 7월 하순에는 노골적으로 나돌았다. 또한 김 지사의 후임에는 사회부 제주분실장 최승만이 내정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지사는 자신의 경질이 당시 이기붕 국방부장관과 신성모 前국방부장관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여기고 몹시 불쾌해 했다. 김 지사는 이 국방장관이 도지사 관사에서 피난 중일 때 김 지사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김 지사는 자신의 경질을 눈치채고 8월1일 스스로 사표를 제출했다. 김 지사는 퇴임 후에는 국민회제주도지부 위원장과 자유당제주도당부 위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였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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