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화해를 넘어 상생으로(4)]중산간 마을 신례1리ㆍ해안마을 신례2리의 '상생'

▲ 정수현씨가 친부모처럼 여기는 오영란 할머니에게 음식을 드리고 있다.
4.3으로 인한 피해가 단순히 수만명의 목숨을 가져간 인명피해만 있을까. 아니다. 4.3으로 인해 마을공동체의 파괴는 물론 불신과 반목, 대립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연좌제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제주도 출신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런 많은 피해 가운데도 특히 제주라는 '공동체'의 파괴는 여전히 도민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중산간 부락들을 '폭도'로, 중산간 사람들은 해안 마을 사람들을 '경찰 앞잡이'로 서로 업신여기고 있는 곳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몇몇 마을에서는 서로 결혼도 하지 않을 정도로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않고 있다.

▲ 4.3을 겪은 후 더욱 가까워진 신례1.2리 주민들
하지만 4.3을 계기로 해안가 마을과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더욱 가까워진 마을이 있다. 바로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1.2리가 그곳이다.

신례리는 남원읍에서 설촌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일 뿐만 아니라 옛부터 '예촌(禮村)'이라고 불리며 '똑똑한 사람'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신례리는 '한참(2㎞)'을 사이에 두고 신례1리(중산간)와 신례2리(해안가-공천포)로 나뉜다.

4.3 당시 신례1리에는 180가구 800여명이 살고 있었고, 신례2리에는 60여가구 300여명이 살고 있었다. 규모로 따지면 1리가 2리보다 3배 정도 큰 마을이다.

신례리 역시 4.3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중산간 마을 보다 늦은 12월11일에 신례1리(당시는 신례1구)는 소개령이 떨어졌다.

소개령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12일 새벽 이삿짐을 꾸리던 중 서귀중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우익단체'인 학생연맹의 급습을 받아 1명이 학살되고 2명은 행방불명되는 일반주민 첫 희생자가 나왔다.

이어 토벌대에 의해 마을 주민들은 구타와 총살로 4명이 죽음을 당했고, 토벌대가 준비해 온 명단에 의해 10여명이 위미지서로 끌려가 13일 총살당했다.

▲ 정수현씨
11살이던 정수현씨(68)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고 증언하고 있다.

"소개령이 떨어진 11일 마을 사람들은 공천포로 이사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귀중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연맹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구타하고 몇몇 사람들을 지서로 끌고 갔습니다. 당시 숙부(정순종)가 입산했기 때문에 숙모가 끌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 12일에는 작은 숙부(정화종)가 토벌대에게 끌려갔지만 총살집행 당시 구사일생으로 팔에 총을 맞고 기절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후 작은 숙부는 산으로 도망쳤다가 부상 때문에 소개했던 신례2구로 돌아오지만 경찰 신고로 49년 1월2일 저녁 숙부와 할아버지(정기흡), 친척(정봉주)까지 연행됐습니다. 하지만 무장대에게 습격을 받아 흥분할대로 흥분한 경찰은 하례리 주민들에게 '폭도들이다. 죽여라'라고 명령해 결국 3명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신례리 주민들은 대부분 12월12~13일 양일간에 걸쳐 피해를 겪었다. 이 피해에 대해 제민일보 '4.3은 말한다'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소개하던 날 새벽 학련이 일부 주민을 연행한 것이나 소개로 내려오던 주민들을 분류해 끌고 갔던 점으로 봐서 토벌대는 어떤 '명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마을 상황에 비춰 볼 때, 그 명단 속의 인물들은 집안에 젊은이가 피신한 소위 '도피자 가족'이거나 혹은 '무장대 지원자'로 지목된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 명단이 어떤 근거에 의해 작성된 것이든, 아니면 무고에 의한 것이든 비무장 주민들을 즉결 총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희생자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순응해 내려오던 사람들이었다"

신례리 주민들의 피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49년 2월에도 태흥리에 주둔했던 2연대는 '도피자 가족'이란 명분으로 6명을 끌고가 학살을 자행했다.

토벌대와 우익의 잔인한 학살로 수많은 신례1리 주민들이 죽음을 당하는 변고를 치르는 등 불행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개지인 신례2리 주민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더 이상의 큰 희생은 치르지 않았다.

▲ 양금석씨
신례2리 주민들은 3배 규모의 1리 주민들이 내려오자 가구당 2~3가구를 받아들였다. 전 도의원을 지냈던 양금석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희 집은 소개기간 동안 공천포(신례2리)에 사는 김대국씨의 받거리에 살았습니다. 물론 집을 얻지 못한 주민들은 모래판 위나 함바를 지어서 살았죠. 저희는 거의 김씨의 가족과 같이 생활했습니다. 방이며 부엌을 같이 사용하고, 굴묵에서 밥도 먹었습니다. 그 당시 모두 어려웠던 시기에 참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저희 마을 모든 사람들이 아랫동네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 것입니다. 모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입산자 가족'으로 많은 일가친척이 피해를 본 정수현씨도 비슷하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오순란씨(87) 댁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폭도가족으로 낙인찍혀 있던 우리 가족은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57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가족들과는 친부모,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마을차원에서도 단합이 잘 이뤄져 마을간 다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4.3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함께한 신례1.2리 주민들은 지금까지 서로 더욱 각별하다.

각 마을마다 있는 청년회를 두 마을에서는 연합청년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년마다 한번씩 마을별로 돌아가며 체육대회를 개최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 신례1리와 2리 주민들이 단합행사를 갖고 있다.
지난 3월26일 '제주의 소리'가 신례리를 찾았을 때에 마침 신례1리 주민들이 2리 주민들을 초청, 고마움을 표시하는 자리가 있었다.

4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는 오랫만에 만난 친구처럼 허물없이 술잔을 돌리며 4.3 당시 얘기부터 살아가는 얘기까지 나눴다.

신례1리 양윤경 리장은 "저는 4.3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여러 어르신으로부터 얘기를 들어 잘 알고 있다"며 "양 마을의 좋은 전통을 우리 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신례2리 양종옥 노인회장은 "4.3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함께해 온 우리가 벌써 57년이나 지났다"며 "우리 마을만 이럴 게 아니라 이제는 제주 전체가 화합돼야 할 때"라고 말했다.

4.3이 일어난 지 반세기 훌쩍 넘은 57주년이다. '화해' '상생'을 말하지만 그 한과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화해' '상생'이란 말이 단순한 슬로건이 되지 않기 위해 '신례리'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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