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건입동 도로변의 아담한 1층짜리 건물. ‘수제 도장’이라는 문구가 간판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문을 열면 휠체어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는 박효민(62, 훈민당 대표) 장인의 모습이 보인다.도장을 고정하는 틀과 조각칼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오랜 기간 동고동락한 그의 동료들이다. 컴퓨터나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고집스레 손으로 도장을 깎아온 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다. 그 동안 나무와 뿔에 새긴 이름은 셀 수도 없다.뛰어노는 대신 지우개를 깎다 그는 2살 때 고열을 겪고 소아마비를 앓았다. 목발과 휠체어에 기대야 했던 그는
제주 모슬포 상가거리에 자리잡은 한 쌀집. 한쪽 벽에 걸린 아기자기한 짚신과 망태기, 삼태기는 차곡차곡 진열된 곡식들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쌀도 팔고 풀로 엮은 갖가지 공예품들도 파는 신기한 쌀집이다. 쌀집 간판이 내걸린건 벌써 60년 전이다. 팔순을 훌쩍 넘긴 노인은 말없이 바구니 엮는작업에 열중했다. 주름살 가득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채 몇 시간이 지나도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김석환(85) 할아버지의 공방이기도 한 ‘100번 쌀집’의 풍경이다.가난했던 시절 신발부터 생활용품까지 제주의 일상을 채워줬던 선물같은 신서란
“이거 50년 넘은 빗이에요”흰색 가운 앞주머니에 꽂혀있는 윤기 나는 흑색 빗은 그의 오랜 동료다.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 호텔 이용실에서 일했을 때, 다시 고향 한림에서 가게를 열었을 때도 함께했다. 이발소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을 짐작케 하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세기도 훨씬 넘은 60여년을 이발사로 살아온 임영삼(81, 신라이용실 대표) 장인. 첫눈에 보기에도 반듯한 흰 가운 차림과 말끔한 가위질에서 장인의 품격이 읽혔다. 벌써 50년 넘게 사용해온 빗의 곧은 빗살처럼 그는 늘 반듯한 옷매무새와 이발 솜씨로 손님들에게 각
제주시 동문시장부터 오현단을 거쳐 삼성혈까지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길. 이 거리에서 느껴지는 예스러운 분위기는 양쪽에 자리잡은 표구사와 화랑, 필방에서 나온다. 오래된 알루미늄 섀시문 너머로 보이는 글씨와 그림, 필구와 화구는 짙은 예향(藝香)을 풍긴다.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미색건물 안에는 수십 개의 작품이 벽에 걸려있고, 병풍들이 벽을 기대고 있다. 백발의 장인은 한참동안 작업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만 바삐 움직인다. 이 표구사의 이름은 ‘충옥당(忠玉堂)’. 한평생 표구(表具)일을 천직으로 살아온 구봉식(69) 장인이 이 곳
장인의 뜨개질 솜씨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왔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가 손끝으로 옷과 모자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유년기에 가장 선명한 기억이다. 8남매 중 둘째였던 그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부터 동생들의 옷을 만들곤 했다.중학교 졸업 후 낮에는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녀의 인생의 모토가 된 꾸준과 성실은 이 때 새겨진 삶의 태도다.스물 일곱, 결혼과 함께 좋아하면서도 자신 있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했다. 결론은 수예점이었다. 일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언뜻봐도 소위 '내공'이 느껴진다. 제주시 서문시장 입구에 위치한 삼복당제과는 남다른 세월의 향기를 풍기는 곳이다. 초록색 줄무늬 차양과, 타일로 된 바닥, 간판의 색감까지. 언제부턴가 베이커리 마니아들이 제주에서 성지순례처럼 찾는 이른바 '빵지순례'의 명소가 된 곳이다. 안내판에 적힌 빵 가격은 개당 단돈 600원. 이것도 작년까지 500원이었는데 식재료 물가 때문에 부득이 100원 올린 거라고 한다. ‘이래서 남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40여년 서문시장 앞 터줏대감 빵집평일 오후 가게를 찾은 68세의 여성 손님은 비닐 가득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세계일주라는 꿈을 가졌던 18살 제주 소년은 서울 총무처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1968년 한 달 월급은 2만원. 서대문구 냉촌동 하숙비 한 달 방세가 2만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과 나눠 방세를 내고 나머지 1만원으로 한 달을 버텼다. 어느 날 시장에서 런닝셔츠를 고르던 중, 순백색 런닝셔츠 위로 붉은 코피를 쏟아냈다. 순간 너무 당황한 그는 코피를 닦으며 연신 ‘객지 와서 무슨 고생인가’라는 생각을 들었다. “그래도 좋은 곳이니 (서울에서) 버텨야 하지 않겠냐”는 아버지를 끈질기
손님과 통화를 끊고 그 내용을 메모지로 옮기려던 순간, 머리가 멈췄다. 방금 전 대화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두통이나 피곤함, 어깨통증은 익숙했지만 이번엔 정말 심각하다고 느꼈다. 화학세제 냄새 속에서 보냈던 그 여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때를 잘 뺀다고 인정 받았어요.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아팠고, 어깨는 돌맹이가 누르는 것처럼 너무 아프고, 서 있지를 못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보다 약품을 더 많이 썼던 거 같아요. 그게 몸에 누적이 되서 많이 아픈거죠. 이걸 안쓰면 세탁을 못하고, 쓰자
새벽 여섯 시, 오늘도 해 뜨기 전 일어나 문을 연다. 고소한 냄새를 따라가면 막 기계를 빠져나온 유채기름이 보이고, 모락모락 김이 솟는 뜨끈뜨끈한 가래떡이 반긴다. 예약된 물량을 지키기 위해 아침에는 쉴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할머니와 외손녀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운 가루를 기계에 넣고, 떡을 빚고 문양을 낸다. 할아버지는 회전솥에 유채열매를 볶아내고, 기름을 내린다. 셋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분담해낸다.이른 봄, 가족이 함께 캐낸 향긋한 쑥은 방앗간에 직접 제분한 찹쌀을 만나 제주쑥인절미로 탄생했는데 고소함이 일품이
“내가 언제부터 고추 장사를 했더라? 한창 젊었을때 내가 애들만 보고 있으니 잘 아는 언니가 나보고 장사하면 잘 할거라고 한 번 해보라고 했어. 제주차부(현 용담로터리) 옆에 오일장에 고춧가루를 들고 갔는데, 정말 그 날 깨끗이 다 팔았어. 첫 날인데도... 그게 언제 쯤이냐고? 1967년인가 1966년인가 정확히는 모르겠네. 가게는 1971년부터 했어. 누가 흉볼지 몰라도 난 100살이 되어서도 고추가게에 나와있고 싶어”고춧가루에 울고 웃는다. 고추 때문에 아프거나 행복해진다. 제주시 오일장 좌판에서 우연히 시작한 고추장사는 이제
1970년대 초 6촌형을 따라 애월 봉성리에서 제주시 칠성로로 나온 열일곱 소년은 어느새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초로(初老)를 맞았다. 벌써 50년. 금세공 장인으로 외길을 걸어온 그의 삶은 금보다 더 빛나 보인다. 중산간 농촌 마을 봉성리에서 들과 밭에 둘러싸여 살던 그는 제주 원도심을 첫 마주한 당시에 대해 “관덕정 같은 큰 기와집이나 4층 짜리 건물들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회상한다. 마치 시골 소년이 상경해 서울 도심의 빌딩을 마주했던 기억처럼 당시 칠성로를 중심으로 한 제주 최대 번화가는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1943년생. 올해로 만 일흔여덟. 미용경력 60년.제주 동문시장 한복판에서 옥천미용실을 운영 중인 문순애 원장은 제주시 동문통에서 나고 자랐다. 과거 제주성의 동문이 있던 그 곳, 제주의 오랜 역사의 중심지를 거쳐 1970~80년대만 해도 활기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원도심으로 불리는 그 곳.열여덟 시작한 미용일은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평생의 업이 됐다.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 여섯번은 족히 바뀌었을 세월을 미용일에 오롯이 바쳤다. 보릿고개 시절부터, 제주 원도심의 중심이었던 시기를 거쳐 오늘 2021년까지도 그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