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5) 가난 겪던 열일곱 소년에서 자연세탁의 달인 된 윤순오 씨

2021년 창간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을 소개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제주의소리
‘자연 세탁의 달인’으로 불리는 윤순오(56) 하나로세탁 대표. 열일곱살에 처음 친구 아버지의 세탁소에서 세탁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벌써 40년째 세탁 외길을 걷고 있다. 특히 40년 중 절반인 20년을 화학약품에 의존하지 않는 오롯이 자연세탁의 외길을 가고 있다. "옷도 사람과 같다"는 그의 철학이 지금의 건강한 세탁소를 만들었다.  ⓒ제주의소리

손님과 통화를 끊고 그 내용을 메모지로 옮기려던 순간, 머리가 멈췄다. 방금 전 대화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두통이나 피곤함, 어깨통증은 익숙했지만 이번엔 정말 심각하다고 느꼈다. 화학세제 냄새 속에서 보냈던 그 여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를 잘 뺀다고 인정 받았어요.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아팠고, 어깨는 돌맹이가 누르는 것처럼 너무 아프고, 서 있지를 못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보다 약품을 더 많이 썼던 거 같아요. 그게 몸에 누적이 되서 많이 아픈거죠. 이걸 안쓰면 세탁을 못하고, 쓰자니 몸이 아프고... 고민하던 중 새로운 세제를 찾다가 우연히 천연세제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지금 ‘자연 세탁의 달인’으로 불리는 윤순오(56)씨의 인생은 20년 전 그렇게 바뀌었다. 지금 그의 세탁소에는 약초들이 담긴 장독대들이 놓여있다. 세탁소 특유의 냄새가 없는 세탁소, 명품 복원의 대가. 그와 그의 세탁소에 붙는 수식어다.

제주시 연동에서 하나로세탁을 운영 중인 자연 세탁의 달인 윤순오 씨. 그의 무기는 직접 캐낸 약초와 그것으로 만든 천연세제다. ⓒ제주의소리
제주시 연동에서 하나로세탁을 운영 중인 자연 세탁의 달인 윤순오 씨. 그의 무기는 직접 캐낸 약초와 그것으로 만든 천연세제다. ⓒ제주의소리

열일곱 시작된 ‘세탁인생’

유년시절, 소위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생활고는 그의 일상이었다. 스무살이 될 때까지 여섯식구가 4평짜리 한 방에 살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보니 반에서 저 혼자만 생활보호대상자인 거예요. 점심 때마다 학교에서 빵과 우유를 주는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너무 부끄러운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살아가면서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살아야만 내가 살 수 있다’ 그걸 깨달은 거죠. 돈이 없으니까요”

17살, 친구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세탁소에 들어선 날이 운명의 전환점이 됐다. 자연스레 일손을 도우면서 세탁일을 배우게 됐다. 와이셔츠에 비누칠을 하며 세탁하는 정도로 시작했지만 한겨울의 찬물임에도 그는 “재미있었다”고 회상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천직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군대에서도 세탁병이 됐고, 제대 후 일본 동경 기타센주로 건너가 3년간 유학생 신분으로 가죽 관련 기술을 배우며 일했다. 억척스럽게 일하며 모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제주시 화북동에 작은 세탁소를 시작했다. 서른도 되기 전이었다. 같은 또래가 술을 즐기고 놀러다닐 동안에도 그는 열심히 일을 했다. ‘어느 세탁소가 어떤 세제를 사용한다’고 하면 그 노하우를 배우려 애썼다. 20대와 30대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났다.

10대와 20대의 윤순오 씨의 모습. 가난한 유년시절은 그에게 '정말 열심히 살아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줬다. ⓒ제주의소리
10대와 20대의 윤순오 씨의 모습. 가난한 유년시절은 그에게 '정말 열심히 살아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줬다. ⓒ제주의소리

약초 캐는 세탁소 사장님

20여년전 어느 날 몸의 이상을 느꼈다. 손님과의 통화 내용이 순간 기억나지 않은 것. 어깨 통증, 아침마다 힘든 몸, 쉽게 붓는 다리, 두통. 전조 신호는 그 전부터 있었다. 

그는 주변에서 “어느 세탁소가 어떤 세제를 쓰더라”고 하면 그 약품을 구했다. 지우기 힘든 얼룩을 잘 지운다는 인정도 받았지만, 자연스레 화공약품을 많이 쓰게 된 것이다.

친환경 세제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던 그때, 그는 책과 논문, 방송을 뒤지며 천연 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직접 제주와 전국 곳곳 산과 들에서 약초를 캐고 최적의 조합을 찾기 위한 실험을 이어갔다. 

세탁소 구석에 있는 장독대와 빼곡한 연구노트는 그의 고민의 흔적이다. 하수오, 편백, 계피, 겨우살이, 야관문, 가시오가피, 망개... 각종 약초로 테스트를 하고, 적절한 조합을 찾아 끊임없이 실험하고 기록했다.

얼룩의 종류와 특성마다 맞는 약초가 있기 마련이다. 시행착오는 계속됐다. 그렇게 본인의 마음에 드는 약초세제를 만들기까지 적게는 1년, 길게는 10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의 세탁소 구석구석은 한약방을 연상시킨다. 하수오, 편백, 계피, 겨우살이, 상황버섯 등 다양한 약초로 만든 세제들이 장독대 안에 담겨있다. 틈틈이 시간날 때에는 제주와 전국 곳곳으로 약초를 구하러 간다. 물론 자연세탁에 필요한 재료들이다. ⓒ제주의소리
그의 세탁소 구석구석은 한약방을 연상시킨다. 하수오, 편백, 계피, 겨우살이, 상황버섯 등 다양한 약초로 만든 세제들이 장독대 안에 담겨있다. 틈틈이 시간날 때에는 제주와 전국 곳곳으로 약초를 구하러 간다. 물론 자연세탁에 필요한 재료들이다. ⓒ제주의소리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천연세제에 대해서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하나씩 하나씩 풀다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세탁소 한가운데 붙은 인증서를 보며 말했다. 공공 연구기관의 실험을 통해 그의 약초 세제는 무해성을 확인받았다.

그의 세탁 방식은 자극적인 냄새가 없고 얼룩제거에 탁월했기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방송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자연 세탁 명인으로 소개됐다. 제주를 넘어 다른 지역에서도 요청이 온다. 얼룩이 묻은 아끼는 옷, 세월의 흔적을 입은 명품들이 그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전화가 와서 반드시 고맙다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냄새도 안나는 게 참 신기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약초를 썼기 때문에 냄새가 안 나는 거라고 손님들한테 애기를 하죠 저는. 저는 고집이 있어요, 뭐든지 원리원칙으로, 약초로 세탁을 한다는 거예요. 제가 만든 천연세제는 느리게 때를 빼지만 옷이 건강해져요. 천천히 하다보면 때가 잘 빠져요”

윤순오 씨의 천연세제 노하우가 담긴 연구노트. 20년간 약초를 캐고, 자료를 찾고, 실험하고, 기록했다. ⓒ제주의소리
윤순오 씨의 천연세제 노하우가 담긴 연구노트. 20년간 약초를 캐고, 자료를 찾고, 실험하고, 하나하나를 기록했다. ⓒ제주의소리

가난 이겨낸 그가 말하는 ‘함께사는 삶’

약초를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말린다. 이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고, 불리고 세탁을 하는 과정에도 많은 정성이 필요하지만 이 역시도 그에게는 즐거운 수련이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냄새가 나지 않아 신기하다’는 손님들의 전화는 매번 그에게 큰 힘이 된다. 그 분들 모두가 ‘정말 감사한 분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다”,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이야기를 반복했다. 지금 그는 봉사활동에 꾸준히 참여하며 그 마음을 나누고 있다.

“제가 열심히 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줬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만 살지 못합니다. 이유는 거기에 있는 거에요. 또 내가 그만큼 했기 때문에 주위 분들이 나를 이끌어준 거죠. 답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열일곱, 우연히 발을 디딘 친구 아버지의 세탁소에서 비누칠을 하던 소년은 약초세탁의 달인이 됐다. ‘기본을 지키자’는 신념으로 살았고, 중간중간 찾아온 굴곡은 다시 디딤돌이 됐다. 우연히, 재미있어서 시작하게 된 세탁일이 천직이 됐다. 

언제까지 세탁소를 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죽을 때까지”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자연세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도 전했다. 약초 세탁의 전도사가 되는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17살때 친구 아버지 세탁소에서 빨래를 할 때 이상하게 재밌더라고요. 그런데 그땐 이게 평생 직업이 될 지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장래희망에 기술자라고 적혀있어요. 그러고보면 꿈을 이룬거죠 저는.

저 같은 세탁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약초를 만드는 세제를 썼을 때 자신이 건강해지고, 주위가 건강해지거든요. 고객도 기분 좋아할 겁니다. 사람과 자연이 같이 갈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

윤순오 씨는 약초를 만든 천연세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객에게도, 세탁소 주인 스스로에게도, 자연에게도 이롭다는 생각에서다. ⓒ제주의소리
윤순오 씨는 약초를 만든 천연세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객에게도, 세탁소 주인 스스로에게도, 자연에게도 이롭다는 생각에서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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