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가게, 고치가게] (6) 1981년부터 제주 원도심 지켜온 대동선구 김종호 대표

창간17주년을 맞은 [제주의소리]가 오랜 기간 제주 곳곳을 지키며 이어온 공간과 인물을 소개하는 연중 기획 [이어가게, 고치가게]를 2021년 시작합니다. 오래된 점포(老鋪)와 그 속에 숨은 장인(匠人)들이 소개됩니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입니다.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고 앞으로도 함께 지켜감으로써, 제주의 미래를 같이 가꾸고 조명하자는 취지입니다.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이야기는 제주 현대사를 관통하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이들의 기억을 공유하는 일이 제주의 오늘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 됐으면 합니다. [편집자 주]
1975년, 대동선구 인근에서 찍은 김종호 대표의 사진. ⓒ제주의소리
1975년, 현 제주시 수협 인근의 옛 제주항 주변은 사진 속 풍경처럼 제주돌(현무암)을 깎아 만든 석축과 건물들은 고스란히 제주스러움을 담고 있다. 김종호 대표가 지금의 대동선구 바로 뒷편 제주시 수협 인근에서 당시 제주항 앞바다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제주의소리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세계일주라는 꿈을 가졌던 18살 제주 소년은 서울 총무처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1968년 한 달 월급은 2만원. 서대문구 냉촌동 하숙비 한 달 방세가 2만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과 나눠 방세를 내고 나머지 1만원으로 한 달을 버텼다. 

어느 날 시장에서 런닝셔츠를 고르던 중, 순백색 런닝셔츠 위로 붉은 코피를 쏟아냈다. 순간 너무 당황한 그는 코피를 닦으며 연신 ‘객지 와서 무슨 고생인가’라는 생각을 들었다. “그래도 좋은 곳이니 (서울에서) 버텨야 하지 않겠냐”는 아버지를 끈질기게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약 50년 동안 한시도 일을 놓아본 적이 없다. 1950년생 김종호(72) 대동선구 대표의 이야기다.

“가난에서 빠져나가야지, 벗어나야지, 여기서 해방돼야겠다, 어떻게 빨리 벗어날까. 어릴 적부터 그 생각이 막 난 거라...”

귀향한 직후 해병대에 입대해 병역의무부터 서둘러 마쳤다. 군 제대 후 돌아온 집.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공소 공장이 문을 닫았다. 건축자재들이 현대화되면서 나무 문이 아닌 알루미늄 새시로 제작된 창호가 보편화 된 게 결정타였다. 주변에 빚을 내는 등 돈 때문에 쩔쩔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20대 초반의 청년은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입사한 제약회사 대리점에서 다른 사람의 숙직까지 대신 서며 악착같이 일했다. 이후 식당을 도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작은 선구점을 시작한 것은 1981년의 일이었다. 제주시 건입동의 제주항 인근에서 40년 역사를 이어온 대동선구의 시작이다. 

1990년대 대동선구의 역작 플라스틱 삼봉. ⓒ제주의소리
1990년대 대동선구의 역작 플라스틱 삼봉. 오징어를 낚는 도구다. ⓒ제주의소리

 평생의 역작 ‘플라스틱 삼봉’

작은 가게를 연 직후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낚시줄을 조금씩 갖다놓고 팔기 시작했는데 놓는 족족 팔렸다. 손님들의 반응 하나하나를 기억한 뒤 고민하고 답을 찾아내는 성격이 큰 몫을 했다. 

“손님들이 오면 귀담아 들어요. 한마디 한마디 하면 ‘이런 걸 원하는구나,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경심줄(낚시줄) 같은 경우도 우리가 귀찮아도 종류를 다양화하니까 ‘그 집에 가면 뭐든지 있구나’ 하더라고요. 뭐든지 신경쓰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계속 신경쓰고 넘어가지 않으려 했어요”

그의 대표작 플라스틱 삼봉(가짜미끼)는 이런 태도에서 탄생했다. 당시 한치 낚시에 쓰인 삼봉은 주로 버드나무로 만들었는데, 나무는 물을 먹으면 제대로 뜨지 않아 불편이 컸다. 그는 ‘반드시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조사했다. 녹여서 모양을 만들고, 천을 잘 고정하는 방법까지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골똘히 앉아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피부가 벗겨지고 밤 늦게까지 일한 노력의 결실은 곧 돌아왔다. 초록색이었던 초기 모델은 생각보다 잘 팔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더 화려해야 했다. 서울, 부산 전국 시장을 돌아다니며 삼봉에 입힐 원단을 찾았다. 가장 화려한 게 한복이었고, 플라스틱에 한복 원단을 입혔다. 이 원단은 더 화려한 수영복 원단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제작 3년째부터 날개 돋힌듯 팔렸다. 그 해 2만개를 팔았고, 한 해 무려 15만개까지 팔릴 때도 있었다. 제주뿐만 아니라 강원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는 주문을 채우기 위해 20~30명이 대동선구로 출근해 바느질을 했다. 1990년대,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대동선구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

대동선구 김종호 대표. ⓒ제주의소리
대동선구 김종호 대표. ⓒ제주의소리

 “대동선구 이름 기억해줬으면”

초창기 대동선구의 고객들에게 외상은 일상이었다. 잘못하면 소위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게 외상이다. “장사는 잘 됐는데 거의 다 외상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외상장부는 늘 빽빽했다. 외상을 갚는 경우가 20~30%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민들 덕에 지금까지 먹고 잘 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민들을 위한 휴식공간 조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 또한 일본 잔재의 어업 용어들이 여전히 만연해있어 일본어로 된 어업 용어를 우리말로 정리한 인쇄물을 어민들에게 나눠주려는 구상도 가지고 있다. 그는 “매년 한글날만 다가오면 이 생각이 난다”며 “언젠가 해야하는 일인데, 빨리 해야하는데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한일어업협정도 잘 되고 어민들이 편히 어업활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이어도 때문에 중국 눈치 보지 않고,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도 더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국적(?) 바람도 밝혔다. 

“내가 이게 적성에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뭐 일이 없어서 심심하고 그러진 않아요. 내가 일을 그만해서 끝나는 거지 일이 없는 거 아니에요. 철칙? 철칙이라기 보다도... 소비자를 속이지 말자. 어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못 주더라도, 조금 더 가격을 저렴하게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건전지 하나라도 공장에 가서 직접 봐서, 이왕이면 수명도 길고 오래가는 걸 팔려고 해요”

이 곳은 그의 인생을 축적해 놓은 나이테와 같다.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물려받은 ‘대동’이라는 상호는 김종호 씨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과거 원도심을 떠올리면서 “지금도 옛날 구멍가게, 돌담집, 초가집 이런 게 막 생각난다”며 “대동선구도 나이드는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장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느 덧 40년. 시간이 흐르며 이 곳 원도심과 제주항 일대도 많이 변했지만 대동선구는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김종호 대표는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처럼 매일 아침 대동선구에서 손님들을 맞는다.  

“언제까지? 아들이 장가가면 바로 손 놓으려고. 70이 넘고, 작년에 수술까지 했는데 그만 둬야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1년 일찍 7살에 들어갔고 18살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실습을 갔지. 졸업식도 참여못해서 졸업앨범에는 내 친구가 골라준 여름에 찍은 사진이 대신 실렸어. 그 때 서울가서 중앙청 총무처에 근무하고... 19살 총무처에 근무하던 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그 때 총무처 인근 변두리로 파견됐던 때였는데 장례를 못 치뤘어. 그게 한이 됐는데 너무 슬퍼서 아까 얘기를 못했네. 그리고 제대하고 나서도 바로 제약회사 들어갔지. 쉬지도 않았어. 18살때부터 72살까지 너무 일 많이 한 거 아닌가?(웃음) 50년도 더 했지. 이젠 좀 쉬어야지”

김종호 대동선구 대표가 인터뷰 중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종호 대동선구 대표가 인터뷰 중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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