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욱의 중국기행] (3)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터와 그 주변, 한-중 애환이 묻어나는 곳
관광객들이 상해에 도착하면 가이드들이 빼놓지 않고 안내하는 곳이 상하이 관광 제1명소인 외탄(外灘)이다. 탄(灘)은 모래사장을 이르는 말인데, 황포강변에 서양 근대풍의 건축물이 모여 있어 독특한 정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해에서 맛볼 수 있는 근대 유럽풍의 정취란 사실 중국인들에게는 자존심에 남은 상처의 흔적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아편전쟁(1840-1842)에서 패한 중국은 서양의 압력에 굴복해서 상해를 개항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외국에 내준 조계지가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했음은 이미 지난 기사에서 언급했다.)
외탄이 한국인들에게 반가운 것은, 근처 마당로 306동 4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이 저녁에 방문했는데, 우리가 있는 동안에도 많은 한국인 일행들이 임시정부청사 터를 방문했다.
임시정부가 이 자리에 터를 잡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애초에 3·1운동을 전후로 해서 국내외에는 상호간 부지불식간에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다가 상해를 거점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었다. 그래서 상해는 윤봉길 열사의 홍교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떠돌이 신세가 될 때까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싱해임시정부는 애초에 지금의 상해 서금로(瑞金路)에 있던 건물에서 창립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1926년에 이르러 마당로에 터를 잡았다. 그 후 1932년까지 임시정부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최근 상해가 다시 중국 개방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한국과 중국 사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터는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한국과 중국간 국교가 수립되기도 전인 1988년에 이미 중국 정부에서 이 터를 문물보호중점(文物保護中点 )으로 지정해 청사 옆에 관리소까지 설치했다. 한-중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어질 것을 염두에 둔 조치였으니, 앞을 내다보는 그들의 혜안에 감동할 수밖에.
한편, 임시정부청사 터 바로 옆에는 중국의 오래된 옛 골목을 눈여겨볼만하다. 사실 임시정부청사 건물을 제외하고는 주변 건물 대부분이 지저분하고 낡은 느낌이 드는데, 이는 임시정부청사를 그만큼 깨끗하게 잘 복원하고 관리했음을 말해준다. 마당로 임시정부 시절, 요원들 대부분이 청사 근처에서 기거했다고 하니, 주변 어느 건물은 독립운동가들이 생활공간이었으리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도로는 마차 하나가 겨우 다닐 만하고, 3층 규모의 목조 주택들 빽빽하게 서로 붙어 있다. 이런 구조를 갖는 주택을 이롱주택(里弄住宅)이라 하는데, 골목길을 중심으로 연립하여 지어진 주택을 이르는 말이다. 19세기 이후 상해(上海)가 근대도시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집합거주 유형으로, 오늘날의 연립추택이나 아파트와 같은 개념으로 지어진 건물들이다. 상해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던 시절에 주거 난을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특별한 도시주거유형으로, 중국의 전통 주거양식과 영국의 테라스하우스의 배열방식을 접목한 양식이다.
외국인 조개지 안에 서양인들보다 중국인들 숫자가 훨씬 많아졌고, 몰려온 중국인들을 수용할 만한 집단 주거시설이 필요했다. 조계지 내에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고, 주택임대업이 활기를 띠었다. 이런 사회적 요구에 의해 유럽인들은 부동산 임대업에 눈을 돌리고 좁은 면적에 여러 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저렴한 비용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고, 보수가 수월하다는 이점으로 인해 이롱주택은 조계지를 넘어 상하이 밖의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이롱주택은 중국 근대를 특징짓는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상하이 주변은 어디를 가나 아파트 공사 중이다. 포동의 경우 아파트 가격이 우리 돈으로 평당 1억 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하니 가파르게 올라가는 중국의 주거비용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나타난 현상일진데, 이미 150년 전에 겪었던 홍역을 현대 중국인들이 다시 한 번 겪고 있다는 생각이다. (계속/장태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