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④ 2020년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사를 읽고

한국전쟁 제71주년.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전쟁기의 제주도는 어떤 역사로 기록되고 있을까. 4.3과 예비검속,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의 참혹한 현장이나 희생자들이 해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0년 6월25일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육지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난민,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설치된 육군훈련소, 중국인민지원군 전쟁포로수용소의 설치, 미군 비행장으로 조성된 알뜨르비행장(모슬포)과 정뜨르비행장(용담). 거기에다 끝나지 않은 4.3의 비극은 한라산 등지에서의 무자비한 토벌작전으로 무고한 목숨들이 주검으로 쌓여갔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지난해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획에 이어 올해 71주년을 맞아 [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 기획을 다시 연재한다. 냉전시각에서 고착화된 한국전쟁기 제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이제 평화유산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기억하는 작업이다. 제주가 ‘박제화된 평화의 섬’이 아니라 한국전쟁기의 제주역사를 되돌아봄으로서 ‘항구적 평화’를 이끄는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 편집자 글 

제주 4·3 70주년(2018년) 지나 2년 후 한국전쟁 70주년(2020년)을 보냈다. 이념전쟁으로 과열된 두 사건은 제주도 근현대사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제주4·3에 비해 덜 다뤄진 감이 없지 않다. 일부 군 관계조직(국방부, 보훈처, 재향군인회, 해병대 등)의 활동 외에, 6·25 관련 학술적 조명 및 기록화는 아직까지 학계에서 외면되거나, 4.3속에 녹여내 버림으로써 그 자체로 독립된 조사나 공론화는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 기사를 읽고

그런 배경에서 작년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도내 지역언론으로서는 제주의소리가 유일하게 [70주년, 한국전쟁과 제주]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기획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고 감사한 일이다. 한국전쟁을 주제로 2020년 6월22일부터 12월30일까지 총16회 연재한 기획기사 한점, 한점에서 귀중한 사람과 자료를 접할 수 있었고, 행간에 취재 기자들의 땀과 열정 또한 읽혀졌다. 총16편 특집기사 구성은 이렇다.

- 제주도민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노병(老兵)과의 인터뷰 기사 3편(동문로터리 해병혼탑 기사 포함)
- 전장에서 산화하여 뒤늦게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집안 자손과의 인터뷰 기사 1편
- 제주참전용사 기록물 수집 및 집필에 앞장서는 정수현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 1편
- 대한민국을 지킨 6.25 후방 전략기지이자 포로수용소가 있던 대정읍 모슬포를 조명한 기사 3편
- 육군·해병대 군사시설 및 한국보육원이 설치되었던 제주농업중학교(광양교지) 기사 1편
- 피난민이 무려 15만명 입도라는 전쟁통에서 싹튼 제주문화예술 관련 기사 2편 
- 호국영웅의 이름을 딴 도내 명예도로 지정 관련 기사 1편
- 전쟁기 도내 유일의 신문 ‘제주신보’가 보도한 전쟁 관련 기사 3편
- 도내 14곳 충혼묘지 현장 및 제주국립묘지 조성 현황 기사 1편

위 16편 특집기사 중 10편은 기사 초입에 관련 영상(5분 내외)도 별도 제작하여 띄우고 있어 관심과 공감 효과를 한층 높여 주었다. 특히 참전의 경험을 직접 육성으로 들려준 어느 노병(老兵)과의 인터뷰는 남다른 울림이 있었다.

내 나이 열여덟살. 육군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나가서 전투할때 부상 당하고, 죽다살다 하면서 살아 돌아와서 감개무량한거지. 얼마나 고마운거야. 거기서 그렇게 악전고투했는데 살아나온 생각을 하면……화랑무공훈장도 고맙고. 이런 사태(전쟁)는 다신 일어나지 말아야 돼. 진짜 다시는……

고우석(1933년생)_[70주년(1)_2020년 6월 22일자] 

※ 안타깝게도 고우석 어르신은 이 인터뷰를 마친 3개월 후 10월 초 별세하셨다. 제주의소리는 “한국전쟁 구국투혼 제주 고우석 용사 별세(향년 88세)” 소식을 알렸다(2020년 10월5일자). 한국전쟁 70주년 6월 위 인터뷰 기사가 생전 그의 마지막 외침이자 영상기록이 될 줄이야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또 문창해 용사는 제주4.3에 이어 한국전쟁으로 번져가는 좌우 대립 이념 전쟁 속 해병대(4기) 군인이 되어 영하 35도 개마고원 전투에 참전했던 용사이다.

그때 살아 돌아온게 기적이지...육지사람들이 ‘제주도가 해병대와 무슨 관계냐’며...전혀 모르거든. 그런 때 내가 의기양양하게 가서 설명을 해주지. ‘4.3사건의 빨갱이란 말 들어봤죠?’ 하니까. 제주도에는 빨갱이만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거예요. 그러한 판국에 6.25가 터져서, 그게 바로 이념전쟁인데. 아 그러니 군대 안 갈 수가 없잖아. 빨갱이 마을에 군이 지금 주둔하고 있는데, 빨갱이 잡으러 왔는데. 전쟁이 터졌는데 군대 안 가겠다고 하면 진짜 빨갱이(로 몰리는 거) 아니여. 그렇게 군대 갔는데. 그때는 군인 수가 모자라서 한국 해병대가 인천상륙을 못할 뻔 했다고. 근데 제주도에서 (해병대) 3천명이 입대를 하니까 승전보만 들려온다 이거야. 그게 바로 제주도 사람들의 긍지가 아니냐...열정을 담아 세운 (동문로터리) 해병혼탑...해병대 3·4기 활약 기억해달라.

문창해(1933년생)_[70주년(6)_2020년 7월 23일자] 

당시 제주도민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어, 이러한 불명예를 벗고자 참전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1950년 10월까지 제주에서는 육군 1만명과 해병대 3천명, 총 1만3천명이 참전하였다(강용삼 <제주백년>, 1984년)고 알려졌다. 그 중에는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름 없는 용사들도 부지기수다. 최근 15년간 제주도참전용사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정수현 작가의 활약과 주장은 공감을 이끌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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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_70주년(3)_2020년 7월 3일자 동영상 캡쳐] ⓒ제주의소리

제주도가 전수조사를 통해 참전했던 제주 용사들이 몇 명인지 발굴해야 한다. 그분들의 값진 희생을 빛바랜 역사의 한 조각으로 둘 순 없지 않느냐. 더 늦기 전에, 참전용사가 그래도 살아 계신 동안에 제주도 차원에서 전수조사를 해줬으면 한다. 

정수현_[70주년(3)_2020년 7월 3일자] 

도민들은 육지로, 피난민들은 제주로

한편, 한국전쟁기(1950년 6월~1953년 7월) 제주도 용사들이 제주항을 출항하여 전장으로 대거 향할 때, 육지로부터는 전쟁 피난민과 전쟁고아들이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전쟁 발발 직후 입도 피난민 수가 1만여 명을 시작으로 이듬해 5월에는 제주도 인구 절반이 넘는 15만명이 입도하였다. 주한 유엔 당국은 몰려든 피난민들을 제주성내(산지천 일대)를 비롯하여 북제주군과 남제주군 관내 지정 마을로 분산시켜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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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제주시 산지천변 피난민 주거 모습과 생활상(대정현역사자료전시관 소장 사진).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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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모슬포 하모리 신영물 빨래터. 여인들이 훈련병들의 빨래를 돕고 있다. 김웅철(2006년)《강병대(육군 제1훈련소)-그리고 모슬포》수록.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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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기 모슬포 중턱에서 본 훈련소 막사. 김웅철(2006년)《강병대(육군 제1훈련소)-그리고 모슬포》수록.ⓒ제주의소리

1951년 3월에 제1육군 훈련소가 모슬포에 창설되면서는 참전을 앞둔 3만여 명의 훈련병들이 대거 들어왔다. 1952년 4월과 6월에는 제주시 다끄네 정뜨르비행장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동쪽 일대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면서 중공군포로들이 이송되었다. 1952년 12월 말 모슬포수용소(camp3)와 제주시수용소(camp8)에 각각 14,217명과 5,887명 등 총 20,104명이 수용되었다.

※포로 관련 해서는 전갑생 기사 [한국전쟁과 제주-평화를 긷다③_제주의소리 2021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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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유엔군 3모슬포포로수용소 전경(RG 111-C, Box 1, NAⅡ).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archives 2 자료. 제공=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센터 선임연구원. ⓒ제주의소리

제주 4·3과 한국전쟁을 계기로 제주도는 레드 아일랜드, 후방기지, 피난지, 작은 고아의 섬, 포로수용소 등을 상징하는 섬으로 변신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미개의 보고(寶庫), 일본군 전초기지,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절해고도(絶海孤島), 유배지, 표류지, 반란의 땅, 말(馬) 생산지 등으로 불렸던 ‘제주도’에 정치적·사회적 차별 별칭이 더해진 셈이다. 

모슬포, 대한민국을 지켜낸 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012년) 저자 유홍준은 한국전쟁기 모슬포를 ‘천막도시’에 비유하고 있다.

모슬포 육군제1훈련소는 조용하던 이 섬마을을 10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천막도시로 탈바꿈시켰다.(중략) 수많은 피난민과 훈련병 가족이 연일 몰려들어 모슬포를 중심으로 대정면에서 상주하는 인구가 무려 7만 명을 넘었다. 제1훈련소에 이어 모슬포에는 군 야전병원인 98병원이 들어서고, 육군 제29사단이 창설되었으며 임시로 대정초등학교에 공군사관학교를 이전해왔다. 때문에 대정초등학교 교정에는 공군사관학교 훈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와 함께 공군도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을 모슬포공항이라 부르면서 정부 고위인사는 물론 외국 귀빈과 장성급들의 이동과 급한 물자 수송을 담당했고, 이때부터 미 공군이 모슬포비행장에 부대를 배치하여 미군까지도 모슬포에 주둔하게 됐다. 게다가 거제도포로수용소가 포화상태가 되자 이곳 모슬포에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세 군데나 들어섰다고 한다. (유홍준:392쪽)

제주도는 일찍부터 외부인들의 시선과 패권 다툼에 끊임없이 노출되던 섬이었다. 특히 대정읍 모슬포는 제주근현대사의 중심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근대항구로 부상한 모슬포항은 일본인이 최초로 이주한 곳이기도 하다. 모슬포항을 중심으로 선박의 출입이 빈번하면서 상업이 왕성하고 통조림, 자개단추 마무리 공장, 기타 밀짚모자 등의 공업도 번성하면서 지역자원이 도외로 대량 빠져나갔다. 상공업 시설이 난립하면서 어촌 전통마을경관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며 공동체 와해의 위기를 일찍 겪기도 하였다.

모슬포가 역사의 무대에서 다시 주목받는 지점은 1940년대 태평양전쟁기 일제가 제주도 전체를 요새화하는 과정에서였다. 이 시기 제주도 일원엔 일본군들이 도민들을 동원해서 조성해 놓은 거대 군사시설들이 산재해 있다. 이것들은 이후 ‘근대등록문화재’로 지정된다. 도내 군사시설로 근대등록문화재가 된 곳은 총 13곳으로, 모슬포항 동쪽 상모리에만 8곳이나 된다. 그만큼 이 지역은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해방 후 제주4·3을 거쳐 6·25 전쟁을 맞이하면서부터는 모슬포 일대 일본군 전초기지는 한국전쟁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였다. 다시 모슬포는 냉전시대 한국 국방부 및 미국 정부의 공식기록으로 작성되어 보관될 정도로 중요지점이 된 것이다.

제주 땅, 결코 작은 땅 아닙니다. 우리 한반도의, 특히 남쪽의 수립된 대한민국을 끝까지 지켜낸 땅이 왜 작습니까? 안 작아요. 1129일의 오랜 전쟁. 

이걸 아주 중요한 자리에서 지켜낸 곳이 바로 제주도. 그 제주도에서도 특히 모슬포였다 말이죠. 낙동강 전선이 상당히 위험할 때까지 거기서 존속하다가 제주도에 훈련소를 크게 만들어야겠다 해서 훈련시설 만든 게 바로 육군제1훈련소, 통칭 강병대입니다. 군인들이 와서 여기 야영한다고 하면 징발되는 겁니다. 농사 못 지어요. 당장에 훈련받는 군인들인데 어떻게 합니까. 그것(징발됐던 땅)들을 다 복구하는 데 제주도민들 손해 많이 봤고 많이 아팠죠. 항상 얻어터지고 두들겨 맞는 데가 바로 대정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뭐 (땅도 다) 내놓는 거죠.

저도 모슬포, 대정읍민의 한 사람으로서 뭐 내세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람들이 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동네. 착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여기가 바로 대정이라 말이죠.. 진짜 이름 없는 별이 되어 가지고 하늘에서 우리나라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던 분들. 여기 장정으로 끌려와서 입대하고 훈련받다 돌아가신 분들. 그런 분들 노고를 아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지 않을까.

양신하_[70주년(2)_2020년 6월 25일자]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

전쟁의 시선에서 제주도·모슬포를 재조명할 기회가 되었다. 제주 출신으로 육지 참전 군인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건 전투에 임하였고, 전쟁의 후방기지 제주도는 평화와 인권의 최후의 보루로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전쟁으로 말미암아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전사자들이 속출하였다. 그 시신마저 거두지 못해 평생 한이 맺혀 사는 유족들이 있으며, 전후 전쟁의 트라우마 속에 가까스로 생존하는 용사들이 있다. 

전쟁기간 제주도는 제주도대로 급작스런 '인종과 계급의 용광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존을 위한 이권(利權) 투쟁이 이질적인 공동체 사이에서 속출하였고, 그 결과 인정 사회는 불신과 갈등 사회로 변질되어 갔다. 외지인들은 도민들을 공공연히 ‘빨갱이’로 매도했듯이, 도민들 사이에서는 외지인을 두고 ‘육지 것’이라 표현하며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집단 심리도 이 시기에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뿐인가 설령 지역을 극복하였다 하더라도 이념적으로 여전히 좌파·우파로 나뉘어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은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기 중공군 포로들로 하여금 ‘반공포로’와 ‘악질포로’로 양분함으로써 치명적인 차별과 편견의 벽에 스스로 갇히고 말았듯이.

이렇게 갇혀버린 사상·태도·심리·표현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청산하지 못하고 대물림해 오고 있는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의 그림자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부(負)의 유산이란 식민통치나 전쟁경험을 통해 집단적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각인된 기억저장소 또는 갈등의 장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인류가 낳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에 부합한가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세계유산에는 식민통치나 전쟁을 경험한 나라 중에서 아픔의 역사를 담고 있는 부(負)의 유산을 등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 유산은 인류가 범한 비참한 사건을 전함으로써 그러한 비극을 두 번 다시 일으키지 않기 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1979년 등재), 일본 히로시마 원폭돔(1996년 등재), 하시마(군함도, 2015년 등재)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하시마(군함도)의 경우, 일본 정부가 메이지시대 산업유산 측면을 일방적으로 부각하는 반면,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왜곡했다는 사실이 최근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의 조사로 재확인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부(負)의 유산은 국가공동체 내 철저한 자기성찰과 청산 의지,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평화와 인권을 유무형의 형태로 존중할 때라야 ‘부(負, Negative)’자가 빠진 진정한 세계유산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쟁과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남북한 공동등재를 추진중에 있다. 비무장지대 일대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요새이자 전쟁박물관이다. 국적을 달리한 19개국 젊은이들의 피와 넋이 묻힌 곳이며 전쟁 후에도 동서냉전의 상징으로 평화를 희구하는 인류에게 다시는 이런 전쟁을 치러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부(負)의 유산에 부합하다는 취지라고 문화재청은 밝히고 있다.

‘냉전시대 제주도’ 그 부(負)의 유산 너머 평화의 길로 가려는 모색과 실천이 필요하다. 민관협업으로 [한국전쟁과 제주]를 주제로 관련 장소, 인물, 이야기, 지도, 사진, 공문서 등을 발굴하고 수집할 필요가 있다. 유적지 전수조사 샘플 작성도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 모슬포는 마을 자체가 ‘살아있는 6·25박물관’으로 전쟁서사를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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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제1훈련소 정훈부 옛 동지들의 훈련소 옛 터 방문. 김웅철(2006년)《강병대(육군 제1훈련소)-그리고 모슬포》수록. ⓒ제주의소리

인근에 80만평에 이르는 알뜨르비행장, 지하벙커, 해안 동굴진지, 예비검속 학살터, 포로수용소 잔재, 전사자 추모비, 제29사단 발상지비(일명 주먹탑) 등이 남아 있다. 한일병탄 이래 불과 40년이란 시간 동안 이처럼 한 지역에 아시아·태평양전쟁, 제주4·3, 6·25전쟁 유적 등 부(負)의 유산이 집중한 곳도 드물 것이다. 이 일대가 관광이라는 활용적 측면에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성지로 주목되고 회자되는 이유다. 다만 근현대의 비극이 압축된 역사적 현장에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탈역사 영어 제목 안내판이며 지향점 부재 해설문은 공공의 차원에서 제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부(負)의 유산’일수록  비전 제시, 가치 공유, 활용 방안 등에 있어서 아전인수식 축소화 또는 확대화는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고영자(미학자·번역가)

▲ 고영자 박사.

- (사) 제주기록문화연구소-하간 대표
- 문학박사(미학·예술학)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 제주특별자치도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
-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회 위원(전)

일본근대사상(서사이론), 동시대예술론, 문화매체론, 제주미학(이미지 변천사), 제주 문화자원 기록화(아카이빙) 방면으로 연구 활동을 하는 한편, 개화기~근대기 외국어(영·불·일)로 된 제주기록물 발굴 및 번역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번역서: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 《新제주순력담》(2016년), 韓東亀 편저 《제주도: 삼다의 통곡사》(2017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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