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인 ‘김애리샤’가 새 시집 ‘치마의 원주율’(걷는사람)을 펴냈다.
이 책은 저자의 두 번째 시집이자 걷는사람의 27번째 시인전이다. ▲종이를 구기면 채송화가 피어납니다 ▲그녀 등에 새겨진 물고기의 뼈를 본다 ▲아버지가 와서 내 손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 ▲난 진화하지 못해서 예쁜 동물 등 60여편이 실렸다.
없는 당신
김애리샤없는 당신은 백목련 나무처럼
불쑥불쑥 발작하듯 꽃을 피워내목련꽃처럼 튀어나오는 당신의 하얀 발
서늘하게 내 발등에 포개지는 밤
나는 없는 당신이 살던 집의 유리창들을
모두 깨 버리고 싶어져당신이 부르던 나의 이름이
자꾸만 엇박자로 미끄러지며
후드득 발등을 관통해없는 당신이 아예 없어지는 건 무섭지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밤창밖에 우두커니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는 보름달 속에선
목련나무 가지 같은 당신 손가락들이
꽃잎을 밀어내고 있어달 속에서 떨어지는 꽃잎들이
깨진 유리 가루처럼 반짝거리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나는
그 먼 풍경들을 바라만 볼 뿐없는 당신이
뜬소문처럼 나를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어
아빠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항문에서 찌그러진 달덩이가 굴러 나왔다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는 달덩이
아빠는 점점 가늘어졌다아빠 속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살이 올라
달덩이 흉내를 내며 아무렇게나 빛났다
가난도 아빠를 파먹고 무성하게 자랐었는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일수록 부지런히 자란다아빠가 헝겊 인형이라면 배를 가르고
가증스런 빛들로 가득 찬 아빠의 장기들을
과일칼로 세심하게 도려내고 싶었다
그 속엔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생 아빠에게 달라붙어 있던 허울 좋은 친절들과
가족들에게만 엄격했던 회초리들과 엿 같았던 고집들을
파내는 일, 아빠 똥구멍에서 병든 달덩이를 채굴하는 일
한때 생명의 기원이었을 아빠의 쭈글쭈글한 고환 아래가
축축하지 않도록 새삼스럽게 잘 닦아 주는 일아빠는 하루에 여덟 번씩 기저귀를 갈았다
아빠가 가벼워질수록 내가 무거워져서 행복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중에서
출판사는 “신간에는 첫 시집 ‘히라이스’에서 보여준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이어진다. 부모의 부재로 홀로 견뎌야 했던 시간들, 그것은 가난이나 죽음이 불편한 시선처럼 존재하는 삶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는 ‘없음’의 상실감을 안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치열하게 녹아있다”고 소개했다.
더불어 “이를테면 과거의 비극적인 삶에서 파편화된 고통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도 내치지도 않으며, 시인은 자신을 거칠고 강하게 몰아붙인다. 아직은 좀 더 떠돌겠다는 듯 온몸으로 생을 감내하겠다는 듯”이라고 소개했다.
시인은 책머리에서 "누군가와 같이 부르던 노래를 / 혼자 불러야 할 때가 온다면 // 그것이 바로 /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 살아서도 죽어서도 //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준 / 엄마, 아빠 / 당신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를 / 혼자 부를 수밖에 없는 지금 // 나는 만질 수 없는 당신들의 / 지나간 시간을 뜯어 먹으며 / 당신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 나는 나 때문에 고아가 되었다"라고 감정을 전했다.
시인은 강화도에서 태어나 지금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 시를 읽는 것만 좋아하다가 동인 활동을 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주도 풍경을 사랑하며, 그리고 그 풍경 너머의 또 다른 풍경을 시로 형상화하려고 한다. 그것은 풍경이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해안도로와 오름을 좋아한다. 퇴근을 하면 일부러 먼 곳을 돌아 집으로 가곤 한다. 시가 지도가 돼 주지는 않겠지만 나침반이 돼 주기를 바라며 시의 길을 가고 있다.
167쪽, 걷는사람, 1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