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예술칼럼 Peace Art Column] (102) 리춘펑

제주도는 평화의 섬입니다. 항쟁과 학살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이 그렇듯이 비극적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2.28 이래 40년간 독재체제를 겪어온 타이완도, 우산혁명으로 알려진 홍콩도 예술을 통해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예술’이 역사와 함께 현실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네 지역 예술가들이 연대해 평화예술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평화예술운동에 대한 창작과 비평, 이론과 실천의 공진화(共進化)도 매우 중요합니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가 네 나라 예술가들의 활동을 ‘평화예술칼럼(Peace Art Column)’을 통해 매주 소개합니다. 필자 국적에 따른 언어가 제각각 달라 영어 일어 중국어 번역 원고도 함께 게재합니다. [편집자 글]


타링 패디의 작품 ‘인민정의’는 논란이 불거진 후 완전히 철거되었다.(©Bammapper / Creative Commons BY-SA-3.0 de) 사진=리춘펑
타링 패디의 작품 ‘인민정의’는 논란이 불거진 후 완전히 철거되었다.(©Bammapper / Creative Commons BY-SA-3.0 de) 사진=리춘펑

독일 카셀에서 5년에 한 번 개최되는 '도쿠멘타'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시회 중 하나다. 올해 '도쿠멘타'에서는 인도네시아 아티스트 콜렉티브 '타링 패디'의 작품이 '반유대주의'라는 비난을 받으며 소동이 빚어졌다. 논쟁 초기 아티스트들은 작품을 검은 천으로 덮어 '대화의 불가능성을 애도하는 기념물'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이 더욱 비판을 받으면서 마침내 작품은 완전히 철거됐다. 큐레이터 팀과 작가는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전시회 디렉터는 압력에 굴복해 사임했다.

지난 칼럼( ‘인민의 정의’의 혼란: 다중 해석 )에서 지적했듯이 이 이른바 반유대적이라는 비난은 사실 탈문맥적인 오독에 의해 야기되고 있다. 작품의 시각적 표현과 정치적 메시지를 주의 깊게 음미하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오독이 의도적인 것인지 아닌지를 떠나 일련의 논쟁을 거친 오늘날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은 맥락에 맞는 대화가 생겨나는 것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선 무시할 수 없는 맥락이란 이 전시회의 원래 컨셉이다. 실제로 올해 ‘도쿠멘타15'는 몇 가지 브레이크 스루(break through)를 달성했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아시아/인도네시아에서 큐레이터 팀 루앙루파를 초빙해 룽펑(인도네시아어로 공공 곡창이라는 뜻)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루앙루파는 14개 단체에 권한을 이양하는 탈중심형 접근법으로 많은 이벤트(아마도 수백 개)를 펼쳐 독특한 연결고리와 자발성의 힘을 보여줬다.

한편, 이 전시는 구미의 그것과는 벗어난 시점을 나타냄으로써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 비미국측국가)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블랙 아카이브 작품 흑인의 과거와 현재: 짜여진 단합의 역사가 네덜란드의 노예무역이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묘사 자료를 전시한 것처럼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포함하는 것도 있다. ‘알제리 여성투쟁 아카이브’는 1962년 독립운동 이후 이 지역의 여성 레지스탕스 실천을 소개하고 1988년에 발행한 팜플렛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그린 일러스트가 실려 있다.

또한 위와 같은 물의를 빚은 일련의 역사적 아카이브에 더해 우간다 빈민가에서 저예산 영화를 제작하는 와카리우드와 점토로 사람들을 연결함으로써 소통과 공유, 협업의 다양한 방법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인도네시아의 자티왕이아트팩토리(JaF)처럼 예술적 집단주의와 사회 참여를 중시하는 실천자들도 소개되고 있다.

위의 두 주제의 틀에서 보더라도 타링 패디는 전람회에 적합하다. 이들의 작품은 인도네시아와 세계의 불우이웃의 투쟁을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집단 참여 과정에 초점을 맞춰 개인주의를 넘어 창조적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양한 차이와 역사의 뒤엉킨 자리에서는 부조화된 긴장과 대립이 불가피하다. 이런 대립이 탈중심적 큐레이션의 결과이자 전시회의 약점이었다는 시각도 있지만, 달리 보면 이 설정은 사람들이 평소의 인식을 바꾸게 하고 무엇이 예술이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제도적 권력에 도전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차이를 시각소비를 위한 장면으로서가 아니라 이해와 맥락에 기반한 대화로 작품에 들어가려 한다면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히 경계해야 할 것은 감정적 라벨링이나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선입견이다. 실제로 압도적인 비난이나 선별을 해 버림으로써 대화나 차이에서 배우는 것이 방해받고 사람들을 미리 설정된 (보수적인) 입장으로 이끌 가능성은 있다.

일례로 이스라엘 대사관이 이 작품을 괴벨스식 정치적 프로파간다라고 비판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논의를 폐쇄하고 공식·주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반향판‘을 지칭한다면, 이스라엘 대사관이 사용한 표현은 바로 정치적 프로파간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치예술' 아티스트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일정한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고, 그 시점을 '지각 가능한 형태'로 변환해 감상자를 사물에 대한 재검토로 이끄는 어딘가 '반정치 컬렉션'적인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술의 어떤 모습의 또 다른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타링 패디의 작품은 미적인 정치적 올바름(예를 들어 사회적 리얼리즘 양식)뿐만 아니라 작품을 통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려 한다. 논란이 일었을 때 아티스트들은 거기서 도망치지 않고 현장에 머물며 관객들과 대화를 이어갔다. 이 행위는 문제를 되묻는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이며, '정치예술'의 최선의 시연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건은 고도로 정치화되고 감정적인 라벨링에 의해 문맥에 따른 논의 가능성이 크게 손상되었다. 즉 이번 논의는 '도쿠멘타'를 크게 후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재 정치에 직면했을 때의 예술적·문맥적 독해의 무력함을 반영한 것이다. 향후, 같은 사태가 빈발할 가능성이 있는데,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이것은 함께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일 것이다.


#리춘펑

리춘펑(李俊峰, LEE Chun-Fung)은 홍콩에 거주하는 예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공동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는 <Can We Live Together?>(2014) 등과 같은 큐레이터 프로젝트를 비롯해 <Cycling to the Square>(2010~), <Pitt Street Riot>(2014) 등의 프로젝트에서 참여적인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홍콩의 풀뿌리 동네인 야우마테이(Yau Ma Tei)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예술 공간인 우퍼텐(Woofer Ten, 2009-2015)을 포함한 여러 예술 이니셔티브의 공동 창립자였다. 한편, 그는 동아시아 멀티미팅(Multiple Meeting, 2012-2013)과 <Art/Activist-in-Residence>(2011-2015)와 같은 프로젝트와 함께 지역 간 예술/활동가 교류에 힘쓰고 있다. 


The Turmoil of "People's Justice" II:  The Goal of Political Art
《人民正義》的風波(下):政治藝術的目標

圖1:在爭議爆發後「稻米獠牙」(Taring Padi) 的作品《人民正義》被完全拆除。Fig. 1: After the controversy broke out, Taring Padi's work "People’s Justice" was completely dismantled.(© Baummapper / Creative Commons BY-SA-3.0 de)
図1:タリン・パディの作品《人民正義》は、論争が勃発した後、完全に撤去された。

「人民正義」の波紋 Ⅱ : ポリティカル・アートの目指すもの
リー・チュンフォン

ドイツのカッセルで5年に一度開催される「ドクメンタ」は、現代美術の重要な展覧会の一つである。今年の「ドクメンタ」では、インドネシアのアーティスト・コレクティヴ「タリン・パディ」の作品が「反ユダヤ主義」だと非難され、騒動となった。論争当初、アーティストたちは作品を黒い布で覆い、「対話の不可能性を悼むモニュメント」と表現したが、これがさらに批判を集め、ついに作品は完全に撤去された。キュレーター・チームと作家は公式に謝罪し、展覧会ディレクターは圧力に屈して辞任した。

前回のコラムで指摘したように、このいわゆる「反ユダヤ」的という非難は、実は脱文脈的な「誤読」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ている。作品の視覚的表現と政治的メッセージを注意深く吟味すれば、ユダヤ人への憎悪を助長するような明確な意図は見受けられないのだ。この「誤読」が不用意なものか意図的なものかは別として、一連の論争を経た今日、探求する価値があるのは、文脈に即した対話が生まれることを妨げるのは何かということだ。

まず、無視できない文脈とは、この展覧会のそもそものコンセプトである。実際、今年の「ドクメンタ15」は、いくつかのブレークスルーを達成した。たとえば、初めてアジア/インドネシアからキュレーター・チーム「ルアンルパ」を招聘し、「ルンプン」(インドネシア語で公共の穀倉という意味)というコンセプトを導入した。ルアンルパは14の団体に権限を委譲する「脱中心型」のアプローチで、多くのイベント(おそらく数百もの)を展開し、ユニークなつながりと自発性の力を示した。

一方で本展は、欧米のそれとは外れた視点を示すことによってグローバル・サウスの議論を継続している。アムステルダムの「ブラック・アーカイヴズ」の作品《黑人の過去と現在:織りなされた団結の歴史》が、オランダの奴隷貿易や黒人に対する人種差別的描写の資料を展示したように、植民地主義に対する批判的考察を含むものもある。《アルジェリアにおける女性の闘いのアーカイブズ》は、1962年の独立運動以降の同地における女性のレジスタンスの実践を紹介し、1988年発行のパンフレットには「イスラエル・パレスチナ紛争」を描いたイラストが掲載されている。

また、上記のような物議を醸した一連の歴史的アーカイヴに加え、ウガンダのスラム街で低予算映画を制作する「ワカリウッド」や、粘土で人々をつなぐことでコミュニケーションや共有、コラボレーションのさまざまな方法への想像力を示すインドネシアの「ジャティワンギ・アート・ファクトリー(JaF)」のように、芸術的集団主義や社会参加を重視する実践者たちも紹介されている。

上記の2つのテーマの枠組みから見ても、タリン・パディは展覧会にふさわしい。彼らの作品は、インドネシアや世界の恵まれない人々の闘いを鋭く表現しているだけでなく、同様に重要なのは、集団参加のプロセスに焦点を当て、個人主義を超えた創造的芸術の新たな可能性を切り開いていることだ。

しかし、多様な差異や歴史のもつれが交錯する場では、不調和な緊張や対立が避けられない。こうした対立が「脱中心的」キュレーションの結果であり展覧会の弱点だったという考え方もあるが、別の見方をすれば、この設定は人々に普段の認識を変えさせ、何が芸術であるべきかを規定する制度的権力に挑戦させるものだ。もちろん、人々がこうした違いを視覚消費のためのシーンとしてではなく、理解と文脈に基づいた対話をもって作品に入っていこうとすれば、の話だが。

今振り返ると、明らかに警戒すべきは、感情的なラベリングや、相手の意図に対する先入観である。実際、圧倒的な非難や選別をしてしまうことで、対話や違いから学ぶことが妨げられ、人々をあらかじめ設定された(保守的な)立場に導く可能性はある。

一例として、イスラエル大使館がこの作品を 「ゲッペルス流の政治的プロパガンダ」と批判していることが挙げられる。しかし、いわゆる「政治的プロパガンダ」が、議論を閉鎖し、公式/主流イデオロギーを強化することを目的とした反響板を指すのであれば、イスラエル大使館が用いた表現はまさに「政治的プロパガンダ」と言えるだろう。それと対照的に、「ポリティカル・アート」は、アーティストに社会問題に対する一定の理解と分析を求め、その視点を「知覚可能な形」に変換し、鑑賞者を物事の再検討に導くという、どこか「反ポリティカル・コレクトネス」的なものである。

この事件は、芸術のあるべき姿のもうひとつの想像力を提供しているに過ぎない。タリン・パディの作品は、美的な「政治的な正しくなさ」(例えば社会的リアリズム様式)だけでなく、作品を通じて意識的あるいは無意識的に議論を引き起こそうとする。議論が起こったとき、アーティストたちはそこから逃げることなく、現場にとどまり、観客との対話を続けた。この行為は、問題を問い直す可能性を生み出すものであり、「ポリティカル・アート」の最良のデモンストレーションである。

残念ながらこの事件は、高度に政治化され、感情的なラベリングによって、コンテクストに沿った議論の可能性が大きく損なわれた。つまり、今回の議論は「ドクメンタ」を大きく後退させただけでなく、リアル・ポリティクスに直面した時の芸術的/文脈的な読解の無力さを反映したのだ。今後、同様の事態が頻発する可能性があるが、それにどう対処していくのか。これは、一緒に考えるに値する問題だろう。

※ 영어, 중국어 원고는 추후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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