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정작 지워야할 것은 박진경의 왜곡된 비문

제주도내 시민사회가 박진경 추도비에 설치했다가 당국의 행정대집행으로 철거된 쇠창살과 안내판(왼쪽), 오른쪽은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 
제주도내 시민사회가 박진경 추도비에 설치했다가 당국의 행정대집행으로 철거된 쇠창살과 안내판(왼쪽), 오른쪽은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 

 ‘반역자 드레퓌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초지일관 혐의를 부인하는 것 밖에는. 온 사회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세 마녀사냥이 이랬을 것이다. 드레퓌스가 입었던 군복 단추와 계급장을 뜯어내는 군적 박탈 행사엔 구름 관중이 모여들었다.  

약 100년 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과도 닮은 점이 있다. 반역죄의 근거는 필체의 유사성(?) 뿐이었다.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는데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진범을 조용히 처리하되, 사건을 들추지 말라는 군 사령관의 지시가 내려졌다. 

‘인류의 양심’ 에밀 졸라가 반전을 이끌었다.  

조국을 사랑한 죄 밖에 없는 드레퓌스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기 까지는 12년이 걸렸다. 적국에 넘겼다는 기밀문서 따위는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필체가 아니었다. 그가 유대인이라는게 광란을 부채질했는지 모른다. 당시 프랑스에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해 있었다.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그렇게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이 불기 시작하자 아무도 막아서지 못했다.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었다.  

이윽고 시민들은 서로를 간첩일지 모른다고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공산주의와 무관함을 증명하기 위해 매카시에 동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매카시는 브레이크 없는 벤츠의 운전자였다. 공산주의 도미노 이론이 유행할 때라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폭주를 계속할 수 있었다. 운전자가 매카시가 아니었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매카시즘과 그 아류들이 무서운 건 지성이 기댈 언덕이 없다는 점이다. 

세계사적으로 20세기의 서막을 연 드레퓌스 사건과 냉전시대의 개막과 함께 불어닥친 매카시즘. 새삼 두 사건을 소환한 것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때문이다. 

정확히는, 홍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지우려는 듯한 정부 당국의 행보가 두 사건 당시의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 

육사 내 흉상 철거부터 국방부 앞 흉상 이전, 해군 함명 변경, 대전현충원 앞 도로명 폐지까지 전방적위적으로 추진 또는 검토되고 있다. 그 일사불란함이 섬뜩하다. 

일부에선 1921년 독립군이 대거 희생된 ‘자유시 참변’의 책임론을 거론하지만 객관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전두환, 김영삼 정부 때 홍 장군을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로 기록했다는 보도가 최근 나왔다. 

역대 정부는 하나같이 홍 장군을 항일 무장독립투쟁의 최고 지도자로 꼽으며 추앙해마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홍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시도했다. 해군 잠수함에 ‘홍범도함’ 이름을 붙인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2년 전 장군의 귀환 당시 전투기 조종사의 깍듯한 예우에 전율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하필이면 서거 80주년이 되는 해, 봉오동·청산리대첩의 영웅은 조국에 묻힌지 2년만에 부관참시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특히 113주년 경술국치일인 8월29일, 흉상 철거 논란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그 전날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 만찬에 참석해 ‘이념’을 강조했다. 

일련의 ‘홍범도 지우기’ 시도는, 개인적으로는 박진경 추도비와 관련한 아픈 기억을 되살려냈다.  

불과 1년여 전이었다. 4.3당시 초토화 작전의 불을 당긴 박진경의 추도비 철거를 둘러싸고 공방이 오갈 때였다. 단죄는 커녕 비문이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취지의 칼럼을 썼다가 피소되었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시민사회가 단죄의 의미로 추도비를 쇠창살로 에워싸고 안내판(‘이것은 역사의 감옥이다’)을 설치했으나 제주도 보훈당국은 고발, 철거로 응수했다. 

이후 시민사회가 들고나온 카드는 도의회 청원이었다. 역사적 진실을 올바로 전달할 수 있도록 안내판이라도 제대로 설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올해 4월21일 본회의에서 청원을 채택한 도의회는 몇몇 의견을 달아 제주도로 넘겼으나 제주도의 태도가 미온적이다. 

이미 10년 전 정부가 확정한 보고서에 학살 책임과 관련한 박진경의 행적이 상세히 나와있는데도 한참 뜸을 들이다가 뒤늦게 ‘구체적이고 객관적 사실 파악’을 운운함으로써 4.3해결 의지를 의심받고 있다.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守道爲民)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정작 지워야 할 것은 홍범도 장군의 영웅 행적이 아니라 박진경의 왜곡된 비문이다. 강경 진압에 등을 돌린 부하의 총탄에 쓰러진 이에게 ‘장렬’ ‘산화’는 글자에 대한 모독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모종의 선풍이 일렁이는 요즘, 일찍이 4.3해결에 앞장섰던 오영훈 도지사의 적극적 대처를 기대해본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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