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평화재단 2023 제주4.3평화포럼...서중석 “하나로 뭉쳤던 도민들, 강렬히 분단 반대”

“왜 울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제거하여주어야만 우름(울음)을 완전히 끄칠 것이다. 선동만으로 전 도민이 다 총대 앞에 가슴을 내어밀 것인가. 제주도 사건은 그대로 조선의 축도”

- 해방 시기 잡지 ‘신천지’ 1948년 7월호 조덕송의 ‘유혈의 제주도’ 가운데

좌우가 함께 힘을 모으고, 미군정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했던 해방 직후 제주지역 공동체. 하지만 무리한 공출과 질병, 포악한 서북청년회와 일본제국 부역 경찰을 앞세운 당시 공권력은 제주도민들의 평화를 깨뜨렸다. 무엇보다 지난한 식민지 생활을 겪은 많은 제주도민들이 “자주독립 민주국가”라는 새 시대를 간절히 꿈꿨다는 점에서, 70여년 전 제주도민들의 의지는 더욱 빛난다.

제주4.3평화재단은 23~24일 제주썬호텔에서 ‘2023 제13회 제주4.3평화포럼’을 개최한다. 올해 포럼 주제는 ‘역사학의 시선으로 본 해방 3년, 그리고 4.3’으로 정했다. 포럼의 문은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명예교수가 기조강연으로 열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제주4.3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원로 역사학자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까지 3년간의 시간을 큰 틀에서 살폈다. 그는 “제주4.3은 해방 후 정치 상황이나 미군정의 실정, 극우 경찰·청년단의 횡포와 관련해서 당시 남한의 축소판이었다”고 강조했다.

서중석 명예교수.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서중석 명예교수.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자주적·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아

서중석 명예교수는 “중도좌파의 여운형과 중도우파의 안재홍은 해방된 그날부터 건국사업에 착수해 곧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시켰다”며 “민족의 자주 역량이 있었기에 때문에 가능했던 건준은 곧장 전국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해 자주적으로 치안을 맡았고. 각종 현존시설, 기계, 기구, 자재 자본 등을 파손시키거나 일본으로 빼가는 것을 막고, 그것을 인수·보존해 새 국가 건설에 활용코자 했다. 행정의 일도 보았다”고 설명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이런 활동이 전개되지 못했더라면, 미국이 주장한 대로 한국은 자주 독립 능력이 부족해 신탁통치를 받아 마땅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건준은 중앙조직이던 지방조직이던 좌우가 연합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며 “해방을 맞아 한국인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의 기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를 누렸다”고 강조했다.

건준에 이어 조직된 인민공화국이 좌파 일색이었음에도 일정 영향력을 가진 이유는 “해방이 의미하는 전민족적 독립 요구의 기운을 탔기 때문”이라며 당시 제주를 포함해 전 국민의 희망이 매우 컸음을 강조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당시 미군정의 일부 인사가 지적한 대로, 주한미군이 한국인들의 사실상의 자치 기관을 인정하고 그것과 협력해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또 초기 미 국무부의 친일파 배제 충고를 받아들였더라면 남한의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민중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제주에서는 중등학교 10개교, 초등학교 44개교가 설립됐다. 뜨거운 교육열이었다. 4.3 봉기의 주도 인물인 김달삼, 이덕구, 김용관, 고칠종 등도 교직에 있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육지와 달리 제주도 미군정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인정해 장기간(1947년 초까지) 공존했던 것은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주민들과 굳게 결합해 해방의 기쁨과 요구를 잘 대변할 수 있게 했고,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 주도했지만 일제시기에 면장이나 면사무소 일을 봤더 사람도 속해 있었다. 1947년 7월 1일 미 육군 사령부 군정청에 보낸 ‘브라운 대령 보고’ 문서에는 “(제주도) 주민 6000~7000명이 남로당에 실제 가입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 주민 가운데 대부분은 남로당의 배경이나 목적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상을 잘 이해하거나 이런 단체에 가입하려는 열망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기술한다.

제주4.3평화포럼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제주4.3평화포럼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경찰의 탄압, 극우단체의 횡포, 경제적 핍박

“금반 사건의 직접 원인이 청년단체(서북청년회)와 일부 악질 경찰관의 악행에 있다는 것이 분명한 이상, 도민의 거의 전부가 참가할 것은 과거의 전통으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그 원인을 조성한 것이 외부(육지)에서 들어온 자들에 의한 것이 분명하여진 이상 더 말할 것 없다.”

- 잡지 ‘신천지’ 1948년 8월호 홍한표의 글


“내가 판단한 (4.3)폭동의 원인은 제주도에 이주하여 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들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 9연대장 김익렬의 유고 ‘4.3의 진실’ 가운데

해방 이후 조선 반도의 상황은 희망과 달리 녹록치 않았다. 1946년 10월 항쟁은 1948년 4.3 봉기와 “배경이나 원인에는 비슷한 점도 있다”는 분석이다. 10월 항쟁은 경북의 거의 전 지역, 경남의 절반, 전남·북, 충남·북, 강원, 서울의 일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군정경찰은 인민위원회 등 민중 조직을 탄압하고 분쇄하는 선봉이었고, 곡물 수집(공출)에도 많은 횡포를 부렸다. 군정 관리들은 경찰 다음으로 민중들의 불만의 표적이었다”면서 “미곡수집령을 위반하면 일제시기보다도 더 심한 엄벌에 처한다고 위협했던 영천군수 이태수는 10월초 영천봉기 때 생화장당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더해 공식적으로만 제주지역 사망자 369명을 기록한 콜레라 유행, ‘복시환사건’으로 대표되는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까지 더해지면서 불만은 더욱 커졌고, 역사의 시계는 1947년 3월 1일로 향한다. 

삼일절 시위와 3.10민관총파업, 그리고 탄압

서중석 명예교수는 3.1절 시위와 발포사건을 두고 “미군정의 대응은 제주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쪽으로 몰고 갔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3.1발포사건을 정당방위라고 강변하고, 3월 14일 제주도에 내려와 제주도사람들은 사상이 불손하기 때문에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의 연설을 했다. 미군 또한 제주도 주민들을 불온시 했다”고 피력했다.

‘주한미군사’에 보면 “(3.10민관총파업 이후 제주로 온) 응원경찰대가 지나칠 정도로 잔혹하게 테러행위를 벌인 것은 유죄”라고 기술할 정도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1947년 3.10 민관총파업 직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육지경찰과 서북청년회원, 유해진 제주지사 등의 비리와 부패, 관권 남용, 탄압과 횡포, 고문, 재산 약탈, 강간 등은 평화의 섬 제주도를 불안과 갈등의 연옥으로 바꾸어놓았고, 섬주민과 육지인들의 대립으로 나아가게 했다. 반해방과 해방의 구도는 육지인=억압 수탈자와 제주도민=피억압 수탈민중의 구도로 중첩돼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원들이 대거 체포, 검거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결국 강경파가 온건파를 누르고 무장봉기를 결심한다.

포럼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포럼 현장 모습. ⓒ제주의소리 한형진 기자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해방 후 3년 간의 흐름 속에 중요한 점을 짚었다. 바로 제주도민, 전국민의 ‘통일독립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이다.

1948년 5.10단독선거에 대해 당시 한국여론협회는 4월 12일 서울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선거인 등록을 한 사람은 934명(74%)인데, 자발적으로 등록한 사람은 10%도 못미치는 84명에 불과했다. 오히려 850명은 선거인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답변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4.28 구억리 평화회의에서 무장대사령관 김달삼이 김익렬 9연대장에게 주장한 5가지 중 첫 번째가 ‘단선단정 수립 반대!’였다. 조선통신 특파원 조덕송의 글에는 무장대 측의 6가지 요구사항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유엔조위(유엔임시조선위원회) 즉시 철퇴’,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통일정부 수립 절대 추진’이 들어있었다”고 사례를 들었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장구한 오랜 역사를 하나의 국가로, 그것도 중앙집권적 국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분단은 한반도의 허리가 싹둑 잘려 두동강나는 것으로 인식됐고, 반드시 하나의 통일국가여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명명백백한 진리(명제)로 받아들여졌다”며 “더구나 제주도는 해방을 뜻깊게 맞았고, 3.1시위와 민관총파업을 통해 도민이 하나가 된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더 강렬히 분단을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당시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은 같은 대정면 출신 김달삼 등 젊은이들의 무모함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면서도 “5.10 단선이라는 위기감이 당 입장으로도 앞서서 4.3투쟁을 일으키게 한 주원인이었다”며 “애국 청년 학생들은 5.10단선에 의한 통일조국 건설의 최후 기회 상실을 개탄하며 절치부심! 불타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킬 방도가 없어 무력 탄압에는 무력 대항 뿐! 오직 궐기할 시기의 도래만을 고대하는 형편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한편, 올해 제주4.3평화포럼은 24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3개 세션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간다. 24일 일정은 ▲미국의 대한정책과 8.15 ▲북한 질서의 구축과 소련 ▲해방 직후 자주적 국가수립운동 ▲해방 직후 좌익정치세력의 형성과 활동 ▲분단, 여순사건과 숙군 ▲북한의 4.3인식 등의 주제에 대해 논한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