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상 4.3기간' 해석 두고 갑론을박...4.3중앙위, 실무위 결정 번복

지난 2022년 7월 20일 제주도청 본관 4층 탐라홀에서 열린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소리<br>
지난 2022년 7월 20일 제주도청 본관 4층 탐라홀에서 열린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의소리

1956년 당시 들판에 방치돼 있던 폭발물에 의해 숨진 10세, 13세 어린이들이 60여년의 세월이 지나 제주4.3희생자로 최종 결정됐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중앙위원회)는 지난 2022년 7월 제주에서 열린 30차 회의에서 심사보류됐던 2명의 대상자에 대한 재심의 결과, 최종 희생자로 결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지난 3일까지 각 위원들로부터 서면으로 의견을 받았고, 지난 11일 4.3중앙위원회 당연직 위원장인 한덕수 국무총리의 결재를 거쳐 12일 각 위원들에게 심의 결과가 회신됐다.

이 사례는 발족 후 22년만에 처음으로 제주에서 열린 4.3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심사 보류된 건이다. 당시 회의에선 7차 희생자 및 유족신고자에 대한 심사를 거쳐 88명의 희생자, 4027명의 유족이 추가 인정됐지만, 2명의 대상자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사건은 1956년 5월 서귀포시 남원리 목장지대에서 당시 나이 13세 故 김동만 군, 10세 故 김창수 군이 폭발물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방목한 소를 데리러 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들판을 거닐던 어린이들은 우연히 발견한 쇠붙이가 폭발물임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운명을 달리한 것으로 기록됐다. 

폭발지점에서 20~30m 가량 떨어진 곳에서도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참혹한 사건이었다. 워낙 충격적이었기에 마을에서도 75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대부분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이 사건이 4.3특별법에 명시된 4.3사건 기간을 넘어섰다는 점이었다. 4.3특별법은 4.3을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 4.3중앙위원회 제주 회의에서는 피해자의 사망 시점이 4.3특별법 규정 기간 외에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4.3희생자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김종민 4.3중앙위원은 이 사건이 4.3 당시 설치된 폭발물에 의해 사망한 사례이기 때문에 4.3희생자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강하게 제기했다.

앞서 4.3당시 폭발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표선국민학교 학생 15명이 집단으로 사망하는 사고로 인해 희생자 결정이 이뤄진 바 있고, 서귀포국민학교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 사망자는 희생자로, 부상자는 후유장애자로 인정된 사례도 있다는 주장이다. 

남원리 폭발사고는 4.3특별법 상의 4.3 기간 외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형태의 사건이었다. 불과 1~2년 시간 차를 두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상반된 해석을 내리는 것은 기계적인 기준 적용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4.3 당시 고문이나 폭발사고로 부상을 당하고 지병을 앓다가 4.3사건 기간이 끝난 이후에 사망해도 희생자로 인정된 사례도 참고가 됐다.

결국, 최초 4.3실무위원회 차원에서 '불인정' 결정을 내렸던 것이 번복돼 재조사가 실시됐고, 행정안전부도 당시 군부대 설치 여부를 비롯해 복수의 마을 주민 진술을 토대로 희생자로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고인의 유가족인 현승만씨는 "망자의 부모님은 충격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동생은 아직 살아계신다"며 "형님의 희생자 결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희생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목 놓아 우셨다"고 말했다.

현씨는 "너무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이 컸지만, 4.3중앙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제대로 다뤄주고 통과시켜준데 대해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며 "늦게나마 국가에서 인정을 해주니 소원을 풀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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