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자석과 돌궐 석인상] ① 머리말, 몽골, 그리고 돌궐 / 민병훈

국립제주박물관이 2월 18일까지 기획전 ‘제주 동자석’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뿐만 아니라 몽골-돌궐 시대 석인상과 비교해 동자석 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국립청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을 지낸 민병훈 연구자가 ‘제주 동자석과 돌궐 석인상’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① 머리말, 몽골, 그리고 돌궐
② 돌궐, 몽골 석인상의 특징
③ 맺는말-제주의 석인상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가장 가까운 위로, 제주 동자석 그리고 영월 나한상) 전시실의 제주 동자석(2023.11.05) / 이하 사진=민병훈<br>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가장 가까운 위로, 제주 동자석 그리고 영월 나한상) 전시실의 제주 동자석(2023.11.05) / 이하 사진=민병훈

1. 머리말

요즈음 국립제주박물관 기획전시실과 뜰에서는 제주문화를 상징하는 동자석(童子石)과 불교의 깨달음의 상징인 나한상(羅漢像)이 반갑게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의 창령사(蒼嶺寺) 터에서 출토된 석조 나한상들은 깨달음을 얻은 고승(高僧)의 수척한 풍모가 여유로운 표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어, 관람객들에게 안도감과 성자(聖者)의 경지를 느끼게 해준다. 아마도 제주의 무덤 입구에 서 있는 동자석이 마치 망자를 위로하는 듯한 앳된 동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에서, 두 석상의 공통점을 찾고자 한 듯하다.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에 전시중인 특이한 형태의 제주 동자석(2023.11.03)<br>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에 전시중인 특이한 형태의 제주 동자석(2023.11.03)
국립제주박물관의 정원에 상설전시되어 있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제주 동자석(2023.11.05)<br>
국립제주박물관의 정원에 상설전시되어 있는 고 이건희 회장 기증 제주 동자석(2023.11.05)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가장 가까운 위로, 제주 동자석, 그리고 영월 나한상) 전시실의 석조 나한상( 2023.11.03)<br>
국립제주박물관의 특별전(가장 가까운 위로, 제주 동자석, 그리고 영월 나한상) 전시실의 석조 나한상( 2023.11.03)

그런데 제주의 무덤 입구에서 피장자를 지키고 있는 동자석의 독특한 형상과 손에 든 다양한 지물(持物) 등은 국내의 타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만의 특이한 지역적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들 동자석은 무덤 전면의 좌우에 배치된 유구(遺構)의 일부였지만, 근대화의 개발 과정에서 농지의 확대와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려 파괴되거나 돌담의 자재 등으로 재이용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동자석이 서울 등 타지로 반출되어, 공·사립 박물관 등의 실내외에 다수 전시되어 있는 실정이다.

서울 목인박물관 목석원의 제주 동자석(2023.08.15)<br>
서울 목인박물관 목석원의 제주 동자석(2023.08.15)
서울 우리 옛돌 박물관의 제주 동자석(2023.08.15)<br>
서울 우리 옛돌 박물관의 제주 동자석(2023.08.15)

제주 동자석은 그 상징성과 지명도에 비해 이제까지 일부 제주 문화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국에 분산되어 있는 이들 동자석의 사진촬영 작업과 출판 등은 시도된 바 있지만, 아직 그 기원이나 도상 등이 지니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 중앙 유라시아 지역의 초원지대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석인상과의 역사·문화적 관련성에 대한 기초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본고에서는 제주 동자석의 형상과 지물(持物) 등의 특징을 몽골시대의 석인상 그리고 그 기원을 이루고 있는 돌궐시대의 다양한 석인의 도상과의 비교검토를 통해 그 형성과 몽골을 통한 유전(流轉) 그리고 지역문화로서의 토착화의 양상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2. 몽골의 대두와 동서교역의 중요성

칭기즈칸을 군주로 하는 몽골왕국은 중국 중원지방의 평정과 함께 13세기 초에는 서역(西域) 지방의 「천산(天山) 위구르 왕국(王國)」을 비롯해 당시 동방 이슬람 세계의 맹주를 자처하던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샤 제국」, 실크로드의 핵심지대인 사마르칸트 등 소그디아나 지역을 공략해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소위 「팍스 타타리카」(Pax Tatarica) 또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즉 ‘몽골에 의한 평화’라고 불리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의 탄생을 초래하였다.

칭기즈칸의 사후 그 영토는 네 한국(汗國)으로 나뉘게 되지만, 전체적으로 몽골인에 의한 유라시아 지배는 14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실크로드 전 노선이 몽골이라는 하나의 국가 지배하에 놓이게 됨에 따라, 동서의 교역과 문화교류가 일층 활성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칭기즈칸이 이처럼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걸친 대원정을 전개한 직접적 원인은 호라즘 샤 제국에 파견한 대상단(大商團)의 학살 사건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대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경제적 원천으로서의 통상로 확보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며, 몽골제국에서 색목인(色目人)이 우대를 받았던 사회적 배경 역시 이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북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일어난 유목제국은 국가조직을 고도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경제력이 결여된 사회구조이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역에 의해 부를 축적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오아시스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이를 그 경제적 수혈원(輸血源)으로 삼는 상호 의존적 관계 유지와 통상로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몽골 제국의 팽창 과정에서 서·중앙아시아는 물론 동아시아의 고려(高麗)나 일본(日本)에까지 몽골의 군대가 침략하였던 것 역시 그 배경에는 이와 같은 국제 통상로의 확보와 물자 보급이라는 측면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3. 돌궐(突厥)의 중앙아시아 지배와 석인상(石人像)의 탄생

그런데 북아시아의 초원제국과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과의 관계를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돌궐시대의 실크로드 교역에 있어서의 양 세력의 상호 의존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몽골 지역과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돌궐제국은 여타 유목제국과 달리 오아시스 국가에게 그들의 변발 양식과 혼인제도까지 강요할 정도의 문화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돌궐인의 상장의례(喪葬儀禮) 가운데, 자신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 피를 흘리며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중국측 사서의 내용이, 중국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의 벽화나 신강(新疆) 쿠차의 키질 벽화, 그리고 중원 지방의 소그드인 리더의 묘실(墓室) 조각에서 확인되는 것 역시 이러한 정황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 신강(新疆) 쿠차의 키질석굴(제224굴 &nbsp;Maya洞)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돌궐인의 애도하는 모습(Wikipedia)<br>
중국 신강(新疆) 쿠차의 키질석굴(제224굴  Maya洞)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돌궐인의 애도하는 모습(Wikipedia)
소그드인 리더의 죽음을 애도하며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 피를 흘리는 돌궐인의 모습(Miho Museum, 2022.11.10)<br>
소그드인 리더의 죽음을 애도하며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 피를 흘리는 돌궐인의 모습(Miho Museum, 2022.11.10)

돌궐인들은 사마르칸트와 같은 실크로드의 거점도시를 이어나가는 동서교역의 진행 과정에서, 그들의 강력한 무력과 조직력을 제공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교역상의 위험 요소를 제거해주는 한편, 오아시스 국가들은 실크로드 국제교역을 통해 확보한 이익의 일부를 돌궐에 제공함으로써 유목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중앙아시아 역사세계의 이러한 구조적 특징이 문화유산에 반영되어 오늘에 전해지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구(舊) 성적(城跡) 내부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다. 1965년에 도로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벽화에는 실크로드 교역으로 번영하였던 소그드 왕과 돌궐 호위무사 그리고 한국인을 포함한 주변 국가 사절 등의 모습이 파란 라피스 라줄리(Lapis-lazuli, 청금석靑金石) 바탕색 위에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프라시압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한국인 사절과 돌궐 무사상(모사본, 국립중앙박물관)<br>
아프라시압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한국인 사절과 돌궐 무사상(모사본, 국립중앙박물관)
아프라시압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한국인 사절과 돌궐 무사상(아프라시압 박물관, 2015.11.13)<br>
아프라시압 벽화에 묘사되어 있는 한국인 사절과 돌궐 무사상(아프라시압 박물관, 2015.11.13)

이 벽화는 고대 한국의 대외 인적교류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공사 중에 없어진 벽화 상부의 왕의 모습 아래에는 각국으로부터 도래한 여러 사절과 그들을 안내하고 궁정을 수호하는 수십 인에 달하는 돌궐 무사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즉 이 그림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 이외에도,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들이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교역으로 거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북아시아 유목세력의 비호가 작용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후 중국의 실크로드 상의 거점도시 즉 고원(固原)이나 서안(西安), 태원(太原) 등에 거주하고 있었던 실크로드의 국제상인 소그드인 리더 살보(薩寶)의 묘실 조각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로써 중국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수당대(隋唐代)에 걸쳐 대활약했던 소그드인의 국제교역의 배후에는 돌궐을 비롯한 유목세력과의 상호 의존적인 협력관계가 작용하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서안(西安) 거주 소그드인 리더 안가묘(安伽墓) 조각에 묘사되어 있는 소그드인(人)과 돌궐 무사(西安北周安伽墓. 文物出版社, 2003)<br>
서안(西安) 거주 소그드인 리더 안가묘(安伽墓) 조각에 묘사되어 있는 소그드인(人)과 돌궐 무사(西安北周安伽墓. 文物出版社, 2003)
서안(西安) 거주 소그드인 리더 안가묘(安伽墓) 조각에 묘사되어 있는 소그드인(人)과 돌궐 무사(西安北周安伽墓. 文物出版社, 2003)<br>
서안(西安) 거주 소그드인 리더 안가묘(安伽墓) 조각에 묘사되어 있는 소그드인(人)과 돌궐 무사(西安北周安伽墓. 文物出版社, 2003)

이와 같이 실크로드 국제교역에 있어 오아시스 국가에 의한 원격지 교역의 조력자로서의 돌궐은 유목세계의 상징적 존재였으며, 그들의 강력한 기마궁사술(騎馬弓射術)에 의한 비교할 바 없이 뛰어난 무력과 조직력은 현실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세계의 안녕을 기원함에 있어서도 이용될 정도였다. 즉 돌궐시대에 그 지배영역이었던 지금의 몽골고원 중서부, 카자흐스탄 초원지대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의 초원지대에는 돌궐 석인상이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실크로드 교역에서 무력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돌궐인의 용맹한 형용이, 중앙아시아 지역과 몽골 지역 등 중앙 유라시아 지역 전반에 걸쳐 왕실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키는 석인상으로서 시대를 초월하여 전승되어 간 것이다.


민병훈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관장,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한국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초원과 오아시스 문화, 중앙아시아』 (통천문화사, 2005), 『실크로드와 경주』 (통천문화사, 2014), 『유라시아의 십이지 문화』 (진인진, 2019), 공저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소나무, 2000), 번역서로는 長澤和俊著 『東西文化의 交流』(1991), 나가사와 가즈토시著 『돈황의 역사와 문화』(2010), V.I. 사리아니디著 『박트리아의 黃金秘寶』(2016) 등 중앙아시아사와 실크로드 문화 교류사에 관한 논고 50여 편이 있다.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