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자석과 돌궐 석인상] ② 돌궐, 몽골 석인상의 특징 / 민병훈

국립제주박물관이 2월 18일까지 기획전 ‘제주 동자석’을 진행하고 있다. 제주뿐만 아니라 몽골-돌궐 시대 석인상과 비교해 동자석 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국립청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을 지낸 민병훈 연구자가 ‘제주 동자석과 돌궐 석인상’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① 머리말, 몽골, 그리고 돌궐
② 돌궐, 몽골 석인상의 특징
③ 맺는말-제주의 석인상


4. 돌궐(突厥) 석인상의 형상 특징과 분포

13세기에 형성된 몽골제국으로부터 70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6세기 중엽에 몽골고원을 제패하고 중앙 유라시아 지역으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한 유목국가 돌궐은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돌궐 석인상은 높이 50cm에서 2m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것이 현재 상술한 국가군의 국립박물관 등의 실내외에 전시되어 있다. 석인은 일반적으로 눈·코·입·수염 등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으며, 눈썹과 코를 연결하여 표현하고, 콧수염을 기른 모습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팔뚝부터 손끝까지 표현하여, 용기를 쥐거나 허리의 칼에 손을 얹고 있다.

돌궐문자로 기록된 빌게 카간 비문(오르혼 계곡, 몽골)_Wikipedia / 이하 사진=민병훈

석인의 외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오른손으로 가슴 앞에서 용기를 쥐고 있는 것이며, 둘째는 양손으로 배 앞에서 용기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첫 번째의 경우 용기를 옆으로 움켜쥐는 방식, 둥근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어 쥐는 방식, 엄지와 둘째 손가락으로 잔을 아래에서 쥐는 방식, 바닥이 둥근 용기를 엄지와 나머지 네 손가락을 크게 벌려 그 사이에 얹는 듯이 쥐는 방식으로 나뉜다.

가슴 앞에서 용기를 쥐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발라사군 유적의 석인상(2012.04.08)
양손으로 배앞에서 용기를 쥐고 있는 뚜바의 석인상(중앙아시아의 유목민 뚜바인의 삶과 문화. 국립민속박물관, 2005)

그리고 석인에는 의복과 모자, 두발의 형태에서도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복식은 흔히 「카프탄」(Kaftan)이라고 불리는 긴 소매의 가운과 같은 형태의 것을 걸치고 있으며, 삼각형으로 접힌 옷깃과 「좌임(左衽)」의 앞트임 모습이다.

돌궐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는 중국의 정사(正史)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돌궐전(突厥傳)에는 돌궐인의 두발 형태를 묶지 않고 길게 풀어헤친 「피발(被髮)」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중앙 유라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돌궐 석인상의 외형상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자, 관(冠)을 쓴 모습의 중국 석상과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이다. 단, 풀어헤친 피발이라 할지라도 후술(後述)하는 서돌궐(西突厥) 니리 카간의 석인상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출토 석인상의 경우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은 모습이 많지만, 서안(西安) 출토의 소그드인 리더 안가묘(安伽墓)나 태원(太原)의 우홍묘(虞弘墓)에 묘사되어 있는 돌궐인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표현한 경우도 많다. 

또한 석인의 허리에는 허리띠가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경우에 따라 유목민의 생활에 필요한 장신구가 달려 있는 것도 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북부 투바 지역의 석인상에는 단검 등 여러 기구를 착용하기 위한 허리띠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돌궐의 빌게 카간(Bilge Qaghan, 재위: 716-734)이나 내몽고의 돌궐 귀족묘 등에서도 금제 장신구가 부착된 혁제 허리띠가 출토된 바 있다. 

뚜바 출토 석인상의 허리띠(8-9세기)_スキタイ黃金美術展(日本放送協會, NHKプロモーション, 1992)
내몽고 출토 수렵문양 장식 돌궐 혁제 허리띠(草原文化-游牧民族的廣闊舞臺. 上海遠東出版社, 商務印書館 香港, 1998)
돌궐 혁제 허리띠의 수렵문양 장식(草原文化-游牧民族的廣闊舞臺. 上海遠東出版社, 商務印書館 香港, 1998)

상술한 바와 같이 돌궐시대에 조영된 석인상이 중앙 유라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을 나타내는 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기마술이 지니는 뛰어난 기동력에서 비롯된 문화전파의 신속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확인되어 학술적으로 보고된 석인은 총 1500기에 이르고 있으며, 카자흐스탄 526기, 키르기스스탄 약 100기, 우즈베키스탄 약 20기, 투르크메니스탄 2기, 중국 신장(新疆) 182기, 러시아령 알타이 256기, 투바 공화국 약 100기, 몽골공화국) 약 500기, 중국 내몽고 11기의 사례가 알려져 있다.

카자흐스탄의 석인상(카자흐스탄 국립중앙박물관, 1998)
키르기스스탄 발라사군 유적의 야외 석인상 박물관(2012.04.08)
키르기즈 비슈켁 국립역사박물관 야외의 석인상(2012.04.07)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돌궐 석인상(2023.10.27)
중국 新疆 博爾塔拉蒙古自治州 米里其克木乎爾 突厥石人(南石人高1.56, 北石人高1.9m)_中國新疆文物古迹大觀(新疆美術撮影出版社, 1999)
중앙아시아 알타이 지역의 돌궐 석인상(高128.3, 93.4cm)_알타이문명전(거손, 1995)
몽골의 돌궐 석인상(아르항가이 아이막, 7세기, 고74cm)_國交樹立20周年記念 草原の自然と人間 大モンゴル展(讀賣新聞社, 1992)

5. 돌궐(突厥) 석인상의 제작 목적과 출토 환경

돌궐시대에 제작된 석인상이나 그 후 몽골시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조영된 돌궐계 석인상은 대개 방형의 돌담 유구의 동측 또는 동남측에 서 있다. 묘역을 나타내는 돌담이란 얇고 넓은 판석을 2-5미터에 달하는 각 변마다 여러 개씩 이어서 지면에 묻어 놓은 것으로 대개 10-30cm 정도가 지면에 노출되어 있다.

돌궐 석인상이 출토된 묘역과 묘실의 구조(키르기스스탄 비슈켁 국립역사박물관, 2012.04.07)
중국 新疆 博爾塔拉蒙古自治州 阿敦喬魯 石柵古墓(新疆文化遺産 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 文物出版社, 2015)

그리고 돌담으로부터 동측을 향하여 돌이 일열로 세워져 있다. 이들 열석(列石)은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 길이는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에 달하기도 하여, 많은 것은 500개를 넘는 것도 있다. 이들 열석에 대해 『주서(周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사자(死者)가 있으면, 그 시신을 천막 내부에 두고, 자손 및 여러 친속 남녀가 각자 양마(羊馬)를 죽여 천막 앞에 늘어놓고 제사를 지낸다. 천막 주위를 일곱 차례 말을 달려 돌며, 천막 입구에 올 때마다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며 운다. 피와 눈물이 함께 흐르지만, 이같이 하기를 일곱 차례를 하고 그만둔다.

날을 골라 망자(亡者)가 탔던 말이나 일상에서 사용하였던 물건을 사체(死體)와 함께 태운다. 그리고 남은 재를 거두어 때를 기다렸다가 묻는다. 춘하(春夏)에 죽으면 초목(草木)이 시들어 낙엽이 지는 것을 기다리고, 추동(秋冬)에 죽으면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구멍을 파고 묻는다. 장례 날에는 친척들이 제사를 지내고 말을 달리게 하거나 얼굴에 상처를 내는 것은 죽었을 때 행하는 의례와 마찬가지다.

장례가 끝나면 묘소에 돌을 세우고 묘표(墓標)도 만든다. 그 돌의 숫자는 생전(生前)에 죽인 적(敵)의 수에 따라 세운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양마(羊馬)의 머리를 모두 묘표(墓標)의 위에 걸어둔다. 그리고 이날은 남녀 모두 잘 차려입고 장례 장소에 모인다.」〔『주서(周書)』 권(卷)50 이역하(異域下) 돌궐전(突厥傳)〕  

그리고 남북조(南北朝)를 통일한 수(隋, 581-618)의 역사를 기술한 『수서(隋書)』에는 위의 『주서(周書)』 돌궐전 기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날을 골라 시신을 마상(馬上)에 두고 태운다. 그 남은 재를 거두어 묻는다. 묘표(墓標)로서 나무를 세우고 묘(墓)를 만들어 묘실(墓室)을 그 안에 만든 후 사자(死者)의 초상(肖像) 및 생전의 전투 진용 모습을 그린다. 생전(生前)에 적(敵) 한 사람을 죽였으면 돌 하나를 세우며, 그 수가 백천(百千)에 이르는 자도 있다.」 〔『수서(隋書)』 권(卷)84 북적(北狄) 돌궐전(突厥傳)〕

돌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을 전하고 있는 이들 중국측 정사(正史) 사료(史料) 내용과 출토사례에 대한 비교검토 결과, 근자에는 이들 묘역에 세워진 석인(石人)이 피장자의 생전의 초상이라는 점 그리고 동측으로 늘어선 열석은 그가 생전에 전투에서 살해한 적의 수를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석인이 잔으로 여겨지는 용기를 쥐고 있는 것 역시 피장자가 전투에 승리해 축배의 잔을 들고 있는 생전의 늠름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돌궐 석인상이 사자(死者)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은 중국 신강(新疆)의 내천산(內天山) 지역 소소현(昭蘇縣)의 초원지대에서 발견된 서돌궐(西突厥) 니리 카간(Niri Qaghan, 재위: 587-599)의 석인상에서 그 문자 기록과 함께 확인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몽골고원을 지배했던 돌궐제국은 583년에 수(隋)에 의한 이간책으로 제6대 이슈바라 카간(Ishbara Qaghan, 재위: 581-587)으로부터 아파 카간(Apa Qaghan)이 독립해 서돌궐(西突厥)을 세운 후 알타이 산맥을 경계로 657년까지 존속하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중국 新疆 昭蘇縣에 있는 돌궐의 니리 카간 석인상(新疆文化遺産 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 文物出版社, 2015)<br>
중국 新疆 昭蘇縣에 있는 돌궐의 니리 카간 석인상(新疆文化遺産 全國重点文物保護單位. 文物出版社, 2015)
니리 카간 석인상의 측면상<br>
니리 카간 석인상의 측면상
니리 카간 석인상의 후면상<br>
니리 카간 석인상의 후면상
니리 카간 석인상의 허리 부분에 새겨진 소그드文(Yahoo Japan)<br>
니리 카간 석인상의 허리 부분에 새겨진 소그드文(Yahoo Japan)
7세기 초의 동서 돌궐(『増補版 標準世界史地図』 吉川弘文館, 2022年)

이 니리 카간 석인상은 2.3m 높이의 적색 화강암제이며, 왕관을 쓰고 후두부에는 여섯 가닥으로 묶은 변발이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다. 콧수염의 부조 표현과 함께 오른손 엄지와 둘째 손가락으로 술잔의 바닥을 쥐고 있는 모습이며, 왼손은 허리띠에서 늘어뜨린 칼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 그리고 동체 허리 아래 부분에 20行의 소그드 문자 명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 제6-7행에 무칸 카간(Muqan Qaghan, 재위: 553-572)의 손자인 니리 카간이 토끼의 해(595)에 대(大) 카간으로 즉위하였으며, 별도의 행에는 그 몰년이 604년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서돌궐에서는 이미 6세기 후반에 석인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6. 몽골의 석인상

몽골 지역의 석인상은 이제까지 약 500여기가 발견되었으며, 1980년대까지는 이들 모두를 돌궐 시대의 것으로 여겼으나, 이후 동(東)몽골 지역 석인상 조사를 통해 몽골 동부와 서·중부지방의 석인상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편 몽골제국 등장 이전의 위구르 시대(744-840)에 몽골 서북지역에서 투바에 걸쳐 조영된 석인상은 양손으로 배 앞에서 용기를 지닌 석인상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돌궐 석인상과는 달리 돌담이나 열석을 동반하지 않고 단독으로 서 있으며, 강변이나 길옆의 흙더미 위에 서 있는 경우도 있다. 즉 매장의례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지역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개념이 더욱 강조된 듯하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몽골의 돌궐 무덤(제사유적)에서 발견된 석인상은 약 400여기가 알려져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잔을 든 모습의 석인상은 무덤의 주인이며, 무릎을 꿇은 모습의 석인은 지배자의 신하를, 그리고 서 있는 모습의 석인은 주로 허리띠에 무기를 찬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긴 코와 콧수염, T자형으로 연결된 눈썹과 코, 여러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 등의 형상은 상술한 아프라시압 벽화의 돌궐 무사상이나 중국 신강(新疆)의 쿠차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소조(塑造) 돌궐인 두상의 형상과 일치하고 있다.

중국 新疆 쿠차 지역에서 발견된 피발 모습의 돌궐인 塑像(6-7세기, Hermitage Museum. 2016.09.14)<br>
중국 新疆 쿠차 지역에서 발견된 피발 모습의 돌궐인 塑像(6-7세기, Hermitage Museum. 2016.09.14)

그런데 동(東)몽골 지역에서 발견된 60여기의 몽골시대 석인상은 대부분 한쪽 손에 잔을 쥐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며, 남성의 경우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채 몽골 전통 복장인 델(Deel)을 착용한 모습이다. 그 대부분은 파손되었으나, 현재 몽골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르노드 아이막 마타드 솜 출토의 「숑흐 타반 톨고이 석인상」은 의자에 앉아 둥근 잔을 쥐고 오른손은 의자 팔걸이에 얹어놓은 모습이다.

몽골제국 시대의 귀족 석인상(Yahoo Japan)<br>
몽골제국 시대의 귀족 석인상(Yahoo Japan)

석인상이 소재한 지역의 주민들은 이를 「허럭」 즉 초상이라 부르고 있어 몽골제국 시대의 석인상은 조상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여겨지며, 석인상의 위치 또한 유구의 남측에 배치되어 있어, 돌담과 제사를 모시는 사당 사이에 서 있는 돌궐 석인상의 전통을 답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몽골제국 시대에 조영된 석인상 역시 사자(死者)의 초상을 새기는 돌궐시대의 유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잔을 든 모습이나 결발(結髮)의 형태 등 역시 마찬가지지만, 석인상의 복장과 좌상(坐像)이라는 점에서 돌궐시대의 그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됨을 알 수 있다.


민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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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청주박물관 관장,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 한국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초원과 오아시스 문화, 중앙아시아』 (통천문화사, 2005), 『실크로드와 경주』 (통천문화사, 2014), 『유라시아의 십이지 문화』 (진인진, 2019), 공저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소나무, 2000), 번역서로는 長澤和俊著 『東西文化의 交流』(1991), 나가사와 가즈토시著 『돈황의 역사와 문화』(2010), V.I. 사리아니디著 『박트리아의 黃金秘寶』(2016) 등 중앙아시아사와 실크로드 문화 교류사에 관한 논고 50여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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