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의 허구성

지난주 수요일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인사들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몰려들었다. 아일랜드 정부측과 긴급 구제금융협상을 위해서였다. 금년 5월 그리스 재정위기의 불을 진화한 이래 평온을 찾은 듯하던 유럽 자본시장이 아일랜드발 불안감의 확산으로 아일랜드 국채 시장금리의 급등은 물론이고 조만간 새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다른 유럽국가들의 국채발행을 어렵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10년 만기 국채의 시장유통 금리가 9%를 육박했는데 이는 독일의 그것보다 6.5%가 높은 수준으로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새로 국채를 발행하려면 시장은 당연히 아일랜드의 이 높은 금리를 참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제금융을 제공하겠다는 측은 부실은행 정리와 재정적자 충당에 각각 300억 및 600억유로를 가져다 쓰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받는 측은 "우리는 이 돈을 요구한 적도 없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우긴다.

아일랜드가 유로 통화권의 일원으로서 유럽 전역의 시장불안을 개선하는 데 필요하다는 주변국의 요청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그러나 패트릭 도노한 아일랜드 중앙은행 총재는 "그 돈은 보여만 주고 사용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돈을 빌리면서도 끝까지 그것이 예비용에 불과함을 강조하는 아일랜드의 사정이 무엇일까? 거슬러 올라가면 800년 이상을 독립을 위해 싸웠던 역사를 무시할 수 없다. 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치욕으로 받아들이며 그 돈이 수반할 조건들을 또한 경계하는 것이다.

"빌리더라도 쓰지는 않는다"

이미 노사정 합의를 거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이런 저런 간섭을 받기 싫은 것이다. 특히, 예상되는 조건 중에는 12.5%의 법인소득세를 인상해야 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경제 주권의 침해로 볼 만하다. 아일랜드의 낮은 법인세율은 세계적 기업인 인텔 구글 파이저(Pfizer) 등을 유치한 일등공신 중의 하나다.

세계의 자본시장이 아일랜드를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앵글로 아이리시은행의 구조조정과 관련된다. 이 은행은 1990년에서 2007년에 걸친 아일랜드의 호황기에 건설 및 부동산 관련업체에 편중대출을 했다가 2008년 부동산 거품의 붕괴와 함께 무너져 작년 초 국유화된 은행이다. 정부가 그 동안 이 은행에 쏟아부은 공적자금만 300억유로가 넘는다.

이 은행이 발행한 후순위채권(後順位債券; Junior debt) 약 20억유로(한화 약 3조원)가 시장에 남아 있다. 이것의 채무조정을 위한 첫 채권단 회의가 지난 금요일 런던에서 소집되었다. 채권 액면의 20%를 정부가 보증하는 새로운 채권으로 교환하는 안이 상정되는데 채권 잔액의 3분의 2이상에 해당하는 채권 보유자들이 참석하고 참석 의결권의 4분의 3 이상이 동의하면 통과된다.

독일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왔던 손실분담의 원칙, 즉 부득이 금융기관을 구제(bail out)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사용해야 한다면 채권 보유자들도 원금의 일부를 포기(bail in)해서 납세자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 법인이 법원 판결을 거쳐 청산 절차를 밟지 않고도 채권 보유자의 권리를 축출할 수 있는 전례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에 이어 아일랜드 사태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첫째는 호황의 저주다. 호황이 지속될 때는 반드시 불황의 싹이 잉태된다. 따라서 잘 나갈 때 적절한 통제를 하지 않으면 후일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말이다.

'소비가 미덕'이란 말의 허구성

둘째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의 허구성이다. 물건을 사주는 소비자의 존재는 필수적이지만 부자가 되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면 돈을 안 쓰고 모아야 함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은 나에게가 아니고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일 터이다.

중국은 위안화 절상과 금리인상, 그리고 최근에는 생필품 가격통제까지 하며 긴축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의 양적완화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보다. 아일랜드인은 감성이 풍부한 국민이다. 실제로 IMF의 돈을 보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서 이번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대단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결의가 가상해 보인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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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내일신문에도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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