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의 '다른 내일'] (2) 영웅은 없다. 다양하고 똑똑한 우리가 있다.

변화와 혁신을 넘어 전환이 필요한 시대이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없다. 다른 내일을 위해서는 다른 생각, 다른 전략, 다른 시스템, 다른 실행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혁신을 실천하고 있는 김종현 대표와 함께 제주의 ‘다른 내일’을 독자와 함께 모색해 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격주로 만나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92년 장마, 종로에서

내가 다닌 1990년대의 대학가는 혼돈의 시기였다. 1993년, 가수 정태춘 씨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시인은 ‘절망으로 무너진' 사람들의 패배감과 상실감을 노래했다.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뤄냈지만, 87년 대선에 이어, 92년 대선에서도 민주 진영은 패배했다. 대학가에는 깊은 상실감이 드리워졌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는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대안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 사상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89년 동유럽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으며, 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었다. 세계사적 흐름은 사회주의 사상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과학적인 대안, 뛰어난 지도자, 대중을 이끄는 전위 조직이라는 학생운동의 행동 원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 자켓과 노래 가사 일부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앨범 자켓과 노래 가사 일부

영웅은 없다. 

대학 시절, 어느 선배가 내게 들려준 ‘영웅은 없다’라는 말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영웅은 없으며, 우리 스스로가 생활 속에서 직접 길을 찾아야 한다. 졸업 후 내가 포털업계에 종사하게 된 것도, 지역 혁신, 사회적 경제, 지역 순환형 경제, 청년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이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개미들의 군집 최적화 현상’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미리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해답에 이르는 과정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고차원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답도, 영웅도 없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됐다.

뇌는 없지만, 지능이 있는 것 마냥 행동하는 점균류

지난번 개미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개미보다 훨씬 하등한 생물인 점균류(Slime Mold)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점균류는 단세포 생물로, 먹이가 풍부할 때는 혼자 이동하며 생활한다. 반면, 환경조건이 나빠지면 다수의 개체가 연결돼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하며 먹이를 공유하는 변형체를 이룬다. 단세포 생물과 무리 생활을 오가며 생존하는 것이다.

강연 플랫폼인 TED에는 헤더 바넷 (heather Barnett)이라는 예술가가 점균류의 한 종류인 황색망사점균(Physarum polycephalum, 제주에서도 발견된다)의 독특한 행동방식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있다. (동영상 보기 : https://m.site.naver.com/1dVly )

헤더 바넷의 TED 영상에 나오는 점균류 실험
헤더 바넷의 TED 영상에 나오는 점균류 실험

어떤 실험에서는 미로 모양의 배양판 속에 점균을 배양하고, 미로의 시작점과 끝 지점에 새로운 먹이를 뒀다. 시간이 흐르자 최단거리 길에만 점균들이 남았다. 마치 지능이 있어 미로 속 정답을 찾아낸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큰 배양판 중심부에 많은 양의 먹이를 두고, 주변부에 적은 양의 먹이들을 여럿 두었다. 배양판 중심부의 점균들이 확장하며, 먹이와 먹이 사이에 네트워크들을 형성하였다. 사실 이 먹이들의 위치는 도쿄의 철도역 위치들을 모방한 것이었는데, 점균들이 만들어 낸 네트워크는 도쿄의 철도 노선도와 거의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지능

점균 세포들의 이런 움직임은 아크래신(Acrasin)이라는 화학물질에 반응하면서 발생한다. 1962년 하버드대의 샤퍼(Shafer) 교수는 점균 세포들 사이에 존재하는 대장세포가 먼저 아크래신을 방출하면 나머지 세포들이 이에 반응한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어떤 연구에서도 대장세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모두가 똑같은 세포들이었다. 1969년 켈러 (keller)와 제겔 (Segel)은 똑같은 점균 세포들이 단순한 상호작용만으로 복잡한 질서들이 만들어 내는 과정을 응용수학으로 증명했다. 대장세포는 현실에 없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초기 과학자들은 개미나 점균류의 활동에 대한 연구에서, 그 안에 체계적인 설계자나 리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왕 개미의 지시에 따라 일개미가 개미집을 짓고, 먹이 활동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알들을 돌본다고 여겼다. 그러나 모든 개미들은 전체를 알지 못한다. 여왕개미는 격리되어 그저 알을 낳을 뿐, 지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개미들은 주변 개미들과 상호 작용을 통해 그 순간 할 일을 정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점균류나 개미 군집은 놀라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마치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거나 뛰어난 리더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계의 많은 군집들의 지능 활동은 리더에 의한 하향식 활동이 아니다. 협력에 의한 상향식 활동인 것이다.

복잡한 자연과 인간의 활동을 해석하려는 시도, 복잡적응계 이론

록펠러 재단의 연구자인 워런 위버(Warren Weaver)는 1948년 논문 ‘과학의 복잡성’을 통해 복잡계를 개념화하였다. 그는 과학이 다루는 세 가지 영역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단순성 (simplicity)이다. 적은 변수들 사이의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다룬다. 인류는 과학의 발달로 많은 변수들의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수만 개의 부품이 작동하는 우주선 같은 복잡한 기계도 만들어 낸다. 이에 따라 후대 과학자들은 단순성을 진짜 단순계 (really simple systems)와 복합계 (또는 혼잡계, complicated systems)로 세분화하였다.

두 번째는 비조직적 복잡성 (unorganized complexity)이다. 수십억 가지의 변수들이 무작위로 활동하는 영역이다. 예를 들어 인간 개개인의 질병은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생명보험회사는 보험을 설계하고 이익을 낼 수 있다. 과학자들이 통계와 확률 이론을 통해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질병은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 개별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비조직적’이라고 표현한다(물론 세부적으로는 전염병 등 상호 작용이 발생하는 영역이 있다). 

세 번째는 조직적 복잡성 (organized complexity)영역이다. 이 영역이 복잡계라고도 불린다. 무질서한 세상에서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영역이다. 다양한 구성요소나 변수들이 작은 단위에서 상호작용하면서 패턴을 만들고, 전체 차원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영역이다. 향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프리고진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라는 책을 통해 복잡성의 과학을 제시하였다. 후대의 과학자들은 조직적 복잡성의 영역을 두 가지로 세분화했다. 하나는 물리적인 상호작용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비적응적 결정론적 복잡계(complex determisistic nonadapitive)’이다. 강의 흐름, 구름의 움직임, 지진 발생 현상이 그 사례이다. 다른 하나는 행위자가 자율성을 가지고, 과거를 학습하면서,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복잡적응계(complex adaptive system)’이다.  개미 군집, 인체, 생물의 진화, 도시, 경제활동 등 생태계와 인간 사회의 활동들이 그 사례이다. 

복잡계 과학에서 다루는 시스템 분류표
복잡계 과학에서 다루는 시스템 분류표

복합계 사고 VS 복잡적응계 사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복합계적인 사고를 하는 경향이 많다. 구성요소들을 분석해 미래를 예측하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전문가와 리더가 있다고 기대한다. 계획이 명확하기에 관료제 같이 전문적인 부서를 두고, 기계적인 분업을 통해 일사분란한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잡적응계에서는 이런 방식이 유효하지 않다. 복잡적응계에서는 자율적인 주체들의 다양한 상호작용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질서가 만들어진다. 다수의 이해관계자들로 인해 기계적인 분업은 어렵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는 개인의 번영과 집단의 번영을 함께 추구한다. 시너지(synergy)라는 개념도 복잡적응계에서 나온 개념이다. 복잡적응계는 자유로운 인간의 사회 활동을 이해하는데 매우 의미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유연하게 대규모로 협력하는 인류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하라리는 7만년 전 하찮은 존재였던 인류가 어떻게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는가를 탐구한다. 생존 능력은 침팬지가, 지적 능력은 네안데르탈인이 인류보다 더 뛰어나다. 그럼에도 인류는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유발하라리는 그 해답을 인류가 가진 의사소통 능력과 상상력이 빚어낸 믿음에서 찾는다. 

포유류는 150여 마리 이상의 집단을 이루기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는 수십억의 인구가 의사소통을 통해 대규모로 협력하고 있다. 개미나 벌 등의 곤충류와 미세한 점균류도 대규모 협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능적인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다. 인류는 세상을 해석하고, 새로운 변화를 기획할 수 있기에 유연하다. 인류만이 유연하면서도 대규모의 협력이 가능한 존재이다.

다양하고 똑똑하며 협력하는 우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인간은 대규모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믿음’을 만들어 낸다. 한 때는 종교를 통해 신의 섭리로 세상을 이해했다. 절대군주들은 자신이 곧 국가라고 선언했다. 과학자들은 수학과 물리학의 법칙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데카르트와 헤겔은 인류가 가진 절대 이성을 신뢰했다. 니체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개인인 초인에게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진 계급과 국가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자유주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과 보이지 않는 손이 답이라 생각한다. 각각의 믿음은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고,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믿음들은 오류 투성이었고,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더욱이 복잡하게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적절하지도 않다.

복잡적응계는 조금은 겸손되고, 조금은 더 현실적이며, 희망 가득한 믿음을 제시한다. 부족한 개인들이 다양성과 협력으로 조금 더 영리한 우리가 된다. 그 우리는 정답은 아니어도 꽤 쓸 만한 해법들을 찾아낸다. 복잡적응계의 원리들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에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으나, 해결의 실마리는 제시할 것이다.


# 글쓴이 김종현은?

김종현의 이력은 다채롭다. 다채롭지만 맥락이 있다. 제주의 미래가치에 기여하는 것이 소명이라는 그답게, 그의 행보에는 ‘제주의 더 나은 내일’이라는 일관성이 엿보인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천주교 사제가 꿈이던 그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인터넷포털 ‘Daum’에 입사해 검색 비즈니스팀장을 지내다 2003년 Daum의 제주 이전 실무 책임자가 돼 고향으로 돌아왔고,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로 이직, 넥슨 관계사들의 제주 이전과 사회공헌을 담당하였다.
사회적기업 섬이다(閃異多)를 창업, ‘닐모리동동’, ‘우유부단’, ‘제주관덕정분식’ 등 제주가치에 기반한 창의적인 로컬푸드 브랜드들을 만들었다. 이후 청년들의 혁신 역량을 강화하고 취업과 창업을 지원하는 ‘제주더큰내일센터’를 기획, 초대 센터장으로 근무하였다.
현재 그는 사회적기업 섬이다의 대표이사로, 도시재생 로컬크리에이터, 청년활동 등 다양한 혁신 산업생태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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