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 때는 서운함이, 밀물 때는 풍요로움이 가슴 언저리에 다가오곤 했다썰물 때도, 밀물 때도 바다는 출렁거림을 멈추지 않았다아버지를 태운 낡은 어선이 바다 한가운데로미끄러지듯 나아갈 때마다어머니는 오랫동안 손을 흔든 뒤먼 바다 쪽으로 길고 긴 소망의 줄을 던졌다저녁이 되면, 우리는 마당 한 구석에 놓인평상에 앉아, 아직 돌아오지 않은아버지를 기다리며 금성라디오를 들었다무더운 여름날을 견디던 나는 겨우 열 한 살이었다- 김병택 전문-바다를 마당에 두고 살아온 한 평생이 불현듯 무너지고 난 뒤,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
물 한 컵 삼각 김밥 하루를 계량하며고된 일과 비정규직 선 채로 마감하는퇴근은 또 다른 출근 허둥대는 시간 출구제약회사 설명회 늦은 밤 자리한 채휘어지는 판매액에 굽어지는 가장의 무게희망을 배낭에 담고 간이 의자에 기댄다고지혈 녹이는 알약 경동맥을 뚫는다고졸리는 눈 비비며 필기하는 공책 속에미래가 환해져 올까 낯가림 없이 찾아올까- 하순희 전문- * N잡러: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는 신조어하나의 직장이 그 누구의 평생 직업이 되어주지 못하고, 거기서 얻는 소득이 충분한 생계비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은 이미 오래
긴 밤을 헤쳐 나오며 글썽이던 눈물이다풀잎의 구전에 의하면한때 공기층을 떠도는 바람이었다가투명한 액체로 진화했단다그 몸뚱이 같다면세상은 빛으로 가득하겠지만그냥 뜻 없이 맑은 거라고그것은 금방 사라질 한 때라고또 덧없음에 비유하지 마라여린 풀잎들을 다독거리며치열하게 살아온손가락 깨물어 쓴 풀잎 위 하얀 혈서-이윤승 전문- 이슬이 새벽 한 때 그 영롱함을 위하여 견디어 온 바람의 시간은 얼마였던가. 구전되던 이야기가 한 곳에 머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신의 유전자를 바꾸어 왔던가.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서도 정작 남들에게
빙점을 치르고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저들부채꼴 탑을 쌓는 나목들 관습에 따라제몫의 하늘을 섬기는 잔뼈들이 보인다한 곳에 이르기 위해 길 아홉을 버려야 하는뼈뿐인 잡목 숲은 그대 영혼의 사원이었네 선채로 참선을 마친 팔다리가 눈부셔눈을 뜨지 않았어도 이월은 참 귀가 밝아겨울과 봄 사이 뽀얀 빛이 감도는,“바스락” 은밀한 처소에 한 쌍 새를 앉힌다. -고정국 [이월의 숲] 전문-쌓인 눈이 녹으려면 아직은 먼 이월, 군더더기거나, 혹은 달콤한 그 무엇, 그런 것들을 뺀 삶의 모습으로 겨울나무들이 눈밭에 발을 담그고 서 있다. 보는 것만으
내 스마트폰 여는 길은 새발자국 쫓는 걸까몽골 건너 조선족, 태국 베트남 필리핀까지펼쳐든 지도를 따라 새을乙자 그려본다그렇게 그려보는 설날 아침 우리 이모지구촌 촌장이라며 너스레 세배를 받네통역관 없어도 좋을 다섯 나라 며느리들빙떡을 둘둘 말다 옆구리 툭 터졌네그것을 테이프로 살짝 붙인 몽골 며느리차례상 조상님네도 얼핏 한 눈 팔아줄까날아라 우리 이모 설빔 훌훌 나비처럼청주 한 잔에도 빙빙 도는 사돈 나라‘고시레’ 지붕을 향해 흩뿌린다 한 모금 안부- 송인영, [설날아침] 전문-이모의 설날 아침은 사돈들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로 시작
부유富裕나부유浮游보다바닥을신뢰한 나는가진 건 쥐뿔도 없는 바람 속을 떠돌다깡그리내려놓았다,남들이 밟는 자리아파트별 줄 세우는 세상 그쯤 다다르자먼 하늘 기웃대던 꿈들 그만 접고 누워죄 없는 땅바닥들에 송곳처럼 파고들었다허나 거긴실핏줄 참 우련한 삶이 뒹굴고비좁은 가난이 뭉텅, 갈빛으로 여위고바닥은서로 몸을 포개깊어지다따뜻했다-고은희 [바닥] 전문-내 발 밑에 천길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허공을 부유浮游 한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몸을 싣고, 햇빛이 비치면 따뜻한 공기의 힘을 빌어 몸을 띄운다. 그 높이에서 아래로만 내려다보는
첫서리 내린 마당 누구의 발작처럼어디서 날아왔나 등 붉은 감잎 한 장고향집 노을이 되어 사뿐히 누워있네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같이와와와 소리치면 금방 뚝 떨어질 듯우주 속 소행성 하나 발그라니 물이 든다. 굽 높은 그릇 위에 향기 놓은 전신 공양가만히 귀 기울면 실핏줄 삭는 소리말갛게 고인 저 투명 문득 훔쳐 갖고 싶다-유재영 [홍시를 두고] 전문-깊은 것들이 좋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밑바닥을 찾아 몸을 거꾸로 세우고 자맥질 쳐 보는 것,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까지 버티다 순간 솟구
그가나를 보았을 때나는꽃을 향해 있고내가 그를 보았을 때그는꽃을 향해 있었지사랑도타이밍이란다상사화가 피었다김선 [사랑도 타이밍] -전문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 나와 만났던 그 무수한 사람들과는 전생에 어느 만큼의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아무런 감정도, 미련도, 기억조차 남기지 않고 헤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전생에 나는 무엇이었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옷깃만을 스치면서 지나가는 것일까. 바람이었을까. 혹, 물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나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가을볕에 익으면 상처도 떨어질까속에서 좌표 없이 흔들리는 그대 체취세상사 모자라거나 넘치거나 모를 일믿으려면 다 믿을 걸주려면 다 내줄 걸바람에 속사포로 부서지는 넋두리세상에 우리 사랑이 그뿐이더냐,빌어먹을늦가을 찬 서리에 나머지로 서 있는담쟁이 한 줄기가 별빛 향해 뻗는 손애인아나는 중독이다하늘인들 못 갈까- 이명숙 [파이 π] 전문단순함을 사랑한 적이 있다. 쨍한 햇빛에 제 본색을 드러내는 빨강 노랑 꽃들, 경계선 확실하게 그은 바다와 하늘, 단호하게 돌아선 그 사람의 뒷모습도 내가 사랑하는 한 부분이었던 때. 소나기 갑자기 내
아무래도 아버지가 한 번 다녀가신 거다한 생애 원망들을 누가 와서 지웠을까몇 방울 꼬순 기억만 뒤적뒤적 볶고 있다헌 냄비 바닥에서 까맣게 탄 날들도털고 또 떨어내며 남은 깨를 볶으시네그리운 노을 언저리 또 한 해가 저무네- 강영미 전문-예술가의 의무에 대해서 생각한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독창성이라거나 전위적이라거나, 혹은 ‘낯설게 하기’라는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다. 문학 작품을 읽는 목적 중 하나는 작품 속에 구현된 세계의 간접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독자들
2017년 3월부터 약 1년여간 [제주의소리]에 '살며詩 한 편'을 연재했던 김연미 시인이 돌아왔습니다. '살며詩 한 편'은 김 시인이 직접 고른 시를 만나고, 여기에 담긴 통찰을 일상의 언어로 접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코너입니다. 시와 사진, 김 시인의 글이 어우러지는 '살며詩 한 편'은 2주에 한 번 토요일에 찾아옵니다. 김 시인의 글로 여러분의 주말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소도시 밭이던 땅에 세워진 팻말 하나‘출입금지 경작금지 아파트 짓습니다’어쩌나, 배추흰나비 밭담 훌쩍 넘는다바뀐 세상 못 읽는 건 나
2017년 3월부터 약 1년여간 [제주의소리]에 '살며詩 한 편'을 연재했던 김연미 시인이 돌아왔습니다. '살며詩 한 편'은 김 시인이 직접 고른 시를 만나고, 여기에 담긴 통찰을 일상의 언어로 접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코너입니다. 시와 사진, 김 시인의 글이 어우러지는 '살며詩 한 편'은 2주에 한 번 토요일에 찾아옵니다. 김 시인의 글로 여러분의 주말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간절한 게 참 많은 세상에 산다, 우린곧추선 기도 위에 돌멩이 얹으려다아니야, 손을 거둔다 욕심 하나 버린다-김영숙
[살며詩 한 편] (31) 비누/ 이우걸 이 비누를 마지막으로 쓰고 김씨는 오늘 죽었다. 헐벗은 노동의 하늘을 보살피던 영혼의 거울과 같은 조그마한 비누 하나. 도시는 원인모를 후두염에 걸려 있고 김 씨가 쫒기며 걷던 자산동 언덕길 위엔 쓰다 둔 그 비누만 한 달이 하나 떠 있다. -이우걸 님의 전문 한 때, 글을 쓰던 이유가 분명 했던 시절이 있었다. 시, 소설, 혹은 수필, 장르를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전하고자 했던 내용이 시에 적절하다면 시를 썼고, 소설처럼 극적 요소가 필요하다면 소설적 구성을 빌어다 ...
[살며詩 한 편] (30) 꽃밥 / 이승은 참꽃 떨어져서 흘러드는 잠수교 밑 떠도는 불빛들이 한사코 따라와서 강물이 너울거리며 꽃을 먹네, 늦저녁 손위에 손을 얹듯 포개지는 물이랑에 참꽃 떨어져서 차려지는 성찬인가 시장기 돌던 불빛이 꽃밥으로 배부르다 - 이승은의 전문 생각지도 않았던 사물 하나, 혹은 장면 하나가 생각의 물꼬를 과거의 기억으로 끌어갈 때가 있다. 그 매개체는 그와 전혀 상관없는 기억의 한 페이지에 머무르게도 하고, 그 때 그 시간을 떠나 여지껏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기억을 어제인 듯 되살려 놓기...
[살며詩 한 편] (29) 빈 손을 위하여 / 박시교 또 한 번 쓰러지기 위해 나는 일어선다 나뭇잎 죄다 떨군 겨울나무의 의지처럼 시작은 언제나 그렇게 힘겹고 쓸쓸했다 등불을 밝히듯이 모든 사유들을 닦지만 남루한 모습은 끝내 지울 수가 없구나 지나온 우수의 길 위로 불 지피는 저녁놀 아름답다, 삶의 처연한 상처까지도 아름답다 곧이어 어둠의 깊은 장막은 내려질 것이고 마침내 그 무대 뒤에서 혼절할 한 사람. -박시교, 전문 생의 굴곡을 어느 정도 돌아온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어...
[살며詩 한 편] (28) 탈피 / 이애자 그제보다 어제보다 아침보다 마르는 저녁 수순대로 밟아가는 어머니의 시시각각 그 수순 받아들이는 침묵들이 무섭다 들숨에 귀 세우고 날숨에 손을 얹어 스무 해 신부전증 피문어 같은 혈관 더 이상 바늘 한 구멍 들이려고 않는데 휘 휘 어둠이 날미역 같은 머리를 푼다 다 닿아서야 고통과의 화해를 하시나 만조를 건너는 어머니 낯빛 고요하시다 -이애자, 전문- 주변에 죽음의 그림자가 맴도는 나이, 지금 우리가 그런 때인가 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자리가 비워지고, 어머니 아버지 목소리...
[살며詩 한 편] (27) 골목길 에세이 / 성국희 허기진 새벽 보다 은유가 더 고픈 시간 신발 신고 읽어보는 골목길 이야기 하나 찢어진 어느 갈피엔 젖은 꽃잎 말라간다 남편 입 안 가득 밴 실직의 알싸한 맛 달달한 꿀물 한 잔, 마른 길을 적셔놓고 섬 하나 통째 우려내 세상 속도 푸는 그녀 좁은 길 배불리는 하루해를 불러와서 헛헛한 어깨들의 무표정을 밝힐 때면 촉 세운 바람의 행간, 해피엔딩 갈무린다 - 성국희, 전문- 골목의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드라마 속 80년대 후반의 골목과, 90년대 서울 생활에서의...
[살며詩 한 편] (26) 쇠처럼 살라는데 / 손증호 아내는 나더러 쇠처럼 살라는데 그 쇠가 무슨 쇠냐 타령조로 읊어보면 무조건 복종하는 충직한 돌쇠에다 땀 흘려 일할 때는 억척스런 마당쇠, 닫힌 마음 철컥 여는 만능열쇠로 살라다가 제 잘못엔 입 꽉 다문 자물쇠로 또 살라네. 모진 풍파 끄떡없이 무쇠처럼 겪어내고 자본주의 경쟁시대 구두쇠로 견뎌내도 둥글둥글 굴렁쇠에 밤에는 변강쇠, 이 쇠 저 쇠 다 좋다며 닦달하는 요즘 세상 나는야 쇠귀에 경 읽기 어화둥둥 모르쇠 -손증호 전문- 시인의 어투에 맞추어 타령조...
[살며詩 한 편] (25) 종이컵- 다큐와 르포 사이 2/ 임채성 내가 뭘 어쨌다고 내게 침을 뱉느냐고? 내 아무리 일회용의 비천한 삶이지만 맡은 일 단 한 번이라도 가벼이 여긴 적 있었냐고? 산에서 바다에서 길에서 들녘에서 식당에서 호텔에서 밤하늘 비행기에서, 커피면 커피 맹물이면 맹물 소주와 막걸리에 그 잘난 와인까지 내 언제 낯가리는 것 보았냐고? 그도 모자라 초장 된장 고추장에 담뱃재에 오줌까지 죄다 받아 줬거늘, 이제 와서 고맙다는 공치사는 고사하고 우악스런 손아귀로 목줄을 조이다가 지르밟고 걷어차서 내쫒는 포악질까지...
(24) 여 / 박옥위 아직 물속입니다. 이명 앓는 돌 뿌리 당신이 오시기엔 아직은 젖은 시간 물결에 살이 닳도록 아직 바다입니다 솟구치다 갈앉는 내 맘의 무간지옥 울음 만평 파도자락에 부침하는 이 자리 절절한 귀앓이 하나 여태 여기 있습니다 -박옥위, 전문 ‘여’는 섬이 되지 못한 암초를 일컫는 말이다. 평소에는 바다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면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섬.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평소에는 바위섬이었다가 밀물이 되면 바다에 잠기는... 어느 방향에서 설명을 하든, 잠기고 드러나기를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