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 (4) 조총련 ‘공작금’ 수수 혐의 故 김경유의 아들 김병두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소개한다. / 편집자 글 |
조카들이 내 형님의 일본 병원에서 돈을 벌어 제주로 돌아온 뒤 고향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했을 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하지만 군사 독재정권은 입맛을 충족시켜줄 매력적인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고, 간첩혐의로 모두 엮어 이들을 붙잡은 뒤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끝내 이들은 ‘일본에 있을 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가입했다가 귀국 후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허위자백을 하게 됐다.
내용을 전달받은 언론은 ‘간첩 7명 타진(打盡), 대남공작자금 조달 등 암약’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1967년 10월 28일의 일이다.
우연히도 이 시기는 같은 해 6월 8일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저지른 부정을 규탄하는 대규모 ‘6.8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있었던 때다.
같은 해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정족수 2/3을 채우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개-대리투표, 무더기표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이 같은 부정이 저질러지자 곧바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6.8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일어났고 정권은 학교를 강제 휴업토록 지시하는 한편, 유럽까지 연계된 간첩조작사건인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1967년 7월 8일 터뜨렸다.
이로부터 석 달여 뒤인 1967년 10월 28일 독재정권은 전남과 제주지역에 은밀히 대남공작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하는 ‘고정간첩’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우연이라기엔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고정간첩은 일정한 지역에서 간첩행위를 하도록 임무를 부여받고 합법적으로 보장된 신분을 갖춘 채 활동하는 간첩을 뜻한다.
# 어느 날 끌려가 ‘고정간첩’이 된 아버지와 4촌-6촌 형님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김병두(72) 씨는 어느 날 검정색 지프차가 집으로 와 아버지 김경유(1919년생)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봤다. 평소 아버지를 모시러 오는 사람이 많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며칠 뒤 신문에 아버지는 ‘고정간첩’으로 대서특필됐다.
아버지 이름이 신문에 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김 씨는 친구의 말을 듣고 교무실로 달려가 선생님이 보던 신문을 빌려 본 뒤 아버지가 ‘간첩’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 씨의 4촌, 6촌 형님이었던 김봉두와 김영진은 둘째아버지 김만유의 일본 병원에서 청소나 관리업무를 하며 병원 운영에 관한 일을 배웠고, 모슬포에 ‘광제의원’을 차려 월급 주는 의사를 고용해 운영했다.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김만유는 일제강점기 반제국주의 격문을 작성, 배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이후 일본에서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된 그는 조총련의 도움을 받아 도쿄에 ‘니시아라이 병원’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조총련은 4.3 당시 국가가 국민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 중 일부가 가입하기도 했다. 이념을 떠나 은행과 학교를 운영했기 때문에 삶의 일부였다는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진술도 있다.
공안당국은 이점을 노려 김씨 아버지와 4촌, 6촌 형님들에게 공작교육을 위해 합법을 가장한 활동을 하고 대남공작을 위한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구속했다. 공안당국의 시나리오대로 간첩이 탄생한 순간이다.
형님들은 조총련계 김만유에게 공작금을 받아 병원을 세운 게 됐고, 아버지는 일본에 넘어간 사실도 없지만, 공작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간첩이 됐다. 공안당국은 사건을 키우기 위해 전혀 연관성 없는 전남지역 피해자들까지 엮어 7명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
# ‘간첩의 집’ 오명에 날아온 돌멩이…연좌제 피해는 평생 고통
크고 긴 대나무 낚싯대 안에 ‘고정간첩의 필름이 들어있다’는 신문 기사가 나왔다. 광제의원 역시 일본에 있는 조총련 김만유가 준 돈으로 지었다고 했다. 군사 독재정권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 있었다.
김씨는 아버지와 4촌, 6촌 형들에게 어떤 고문을 받았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힘들었다” 정도였다. 허위로 자백할 만큼 모진 고문을 받았음에도 입을 닫고 살아야 했을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대답이었다.
아버지가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동네 사람들 일부는 ‘간첩의 집’이라며 김씨 집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거나 입구에서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또 김씨 누나와 형은 연좌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큰누나는 교육과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못했고 KBS 탤런트 시험에 합격한 큰형은 ‘간첩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단역만 맡았다. 큰형인 김영두는 스트레스로 과음한 탓인지 41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 제주에 큰 병원 차리려던 김만유 “얼굴 빨갛지 않은데 왜 빨갱이냐”
김씨는 일본에서 꽤 큰 병원을 운영하던 둘째아버지 김만유가 돈을 많이 벌어 고향 제주도에 병원을 세우려고 했었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자선병원을 세우려고 했다는 것이다.
둘째아버지로부터 병원 땅을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김씨가 4만여 평에 가까운 땅을 봐뒀지만, 전두환부터 시작해 노태우, 김영삼에 이르기까지 허가받지 못했다. 결국 김만유는 북한 평양에 병원을 세웠고, 나중에 정부 요청을 받았지만 때는 늦었다.
김씨는 안기부 요원에게 교육을 받고 1986년에 처음으로 일본에 가 둘째아버지 김만유를 만났다. 당시 안기부는 김만유를 전향시키고 돈을 많이 가져오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돈을 받은 거짓 혐의로 간첩이 됐기에 김씨는 거절했다.
우여곡절 끝에 김만유를 만난 김씨는 맥주를 함께 마셨고 이내 질문을 받게 됐다. “조카야! 내 얼굴이 빨갛냐?”는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술을 마신 것 때문에 물어보는 건가 생각한 김씨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김만유가 말한 그다음 말에서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얼굴이 붉지도 않은데 왜 한국에서는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고향 제주에 병원을 차리려다 거절당해 북한에 병원을 세운 가슴 아픈 속내를 밝힌 것이었다.
“조총련 사람의 아이들은 한국말을 잘하는데 민단 사람들은 한국말을 못 한다. 일본에서 조총련이 없으면 한국의 뿌리가 없는 것과 같다. 사상적으로 조총련, 북한을 지지하거나 간첩 활동을 한 적이 없는데 왜 한국에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 어떠해야 할까.
관련기사
- 일본 여행 중 친척 만났다고 ‘간첩?’…평생 억울함 풀지 못한 사연
- 판사실 재판에 간첩미수 ‘사형’ 구형..1주일 잠 안 재우고 “했지? 예” 상황 끝
- 독재 권력의 달콤한 수단 ‘주홍글씨’…제주는 왜 ‘간첩’이 많았나?
- 일본 여행 다녀왔는데 “이북 몇 번 오갔냐”…생뚱맞은 추궁 ‘끝없는 조작’
- ‘악’ 비명 가득했던 제주 한라기업사…“나를 평양서 수류탄 제조 배운 간첩이라고”
- 일주일만 송두리째 망가진 삶, ‘간첩조작 고문’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 “日 가자” 배 탔더니 어느새 북한, 가까스로 탈출하니 ‘간첩’ 둔갑
- “네 가족도 고문” 협박에 간첩 허위자백,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무기징역’
- 재심 무죄 받아야만 피해자?…아쉬움 많은 ‘제주간첩조작사건’ 지원 조례
- 끝이 없는 국가폭력 만행…독재 권력유지 수단 전락한 ‘국민’
- 강병삼 제주시장, 국가폭력 만행 ‘간첩조작’ 피해자 찾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