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간첩조작사건-기자의 눈] 제주4.3부터 간첩조작, 광주5.18-6월항쟁까지

억울하다고 하지만 이유가 있으니 수감됐겠거니 생각한다. 국가가 아무런 잘못 없는 국민을 교도소에 잡아 가둬둘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 등 간첩혐의로 수감생활을 한 피해자들을 보는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다.

상식을 벗어난 군사 독재정권은 국가 권력을 입맛대로 휘둘렀고, 표적이 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국면 전환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반공’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독재 권력은 일본과의 연결고리가 많은 제주로 활을 겨눴다.

제주에서 붙잡힌 간첩이 대한민국 간첩의 3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대략 제주도 인구가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인 점을 감안하며 엄청난 숫자다.

하지만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이 같은 일은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언론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수사기관은 자정 능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재판부 역시 증거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재판을 진행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사실의 인정은 반드시 증거에 의해야 한다는 ‘증거재판주의’ 원칙은  그야말로 허명의 문서나 다름 없었다. 

ⓒ제주의소리
힘으로 권력을 움켜쥔 군사독재정권은 정치적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민간인을 간첩으로 몰아넣고 반공 분위기를 조성, 여론의 관심을 돌렸다. 무고한 피해자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제대로 된 변호조차 받지 못한 채 유죄판결을 받았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확인된 사건만 20건, 피해자만 53명에 달한다. [제주의소리]는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제주출신 간첩 조작사건 피해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바탕으로 억울한 그들의 사연을 매주 한 차례, 10회에 걸쳐 소개했다. 사진 왼쪽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하는 옛 남영동 대공분실, 가운데는 영화 1987, 오른쪽은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이다. 사진출처=ⓒ오마이뉴스 이희훈, 네이버 영화 갈무리.

 악랄하고 추악한 국가폭력…‘빨갱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공안당국은 무차별적으로 죄 없는 국민을 잡아들였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들까지 공산주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딱지를 붙인 뒤 영장 없이 체포, 감금하고 고문을 가해 기소했다. 

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을 따른다는 ‘용공’을 빌미로 행해진 국가폭력은 독재 권력유지 수단의 뼈대가 됐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문당한 청년을 변호하기 위해 인권변호사가 된 인물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 역시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 사례다. 

1981년 9월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사건’은 당시 사회과학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등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 기소한 사건이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불온서적을 읽고, 토론했다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아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보다 앞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5.18민주화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무력으로 국권을 찬탈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시국성토대회가 이어지며 민주화운동 불길이 거세지자 이를 공산주의 선동으로 규정, 공수부대를 투입해 곤봉과 총검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는 금남로를 메운 시민들을 향해 M16 자동소총을 집단 발포하기에 이른다. 국민과 국토를 지킬 목적으로 사용해야 할 무기가 자국민을 죽이는 데 사용한 것이다. 시신들은 상무관에 쌓여 갔지만, 독재정권의 보도검열로 이 같은 사실은 감춰졌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된 87년 6월항쟁 역시 민주인사를 좌경인사로 매도, 모진 고문을 가해 죄 없는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故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화점이 됐다. 

고문으로 인한 사망 사실을 숨기기 위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한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발표는 전기와 물고문에 의한 살인임이 드러났고, 이후 연세대 재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는 거세졌다. 

이 시기 악명높은 권력유지 기구이자 국가폭력의 상징인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가해진 고문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살아서 나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삶을 살긴 어려웠다. 

광주 망월공원묘지에 안장된 故 이한열 열사 묘지. ⓒ제주의소리
광주 망월공원묘지에 안장된 故 이한열 열사 묘지.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자료사진<br>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빨갱이 누명 쓴 도민들, 국가폭력 제주를 빼놓을 수 없다

제주도에서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받은 간첩조작사건 피해자가 있다. 이장형은 일거리를 찾아 일본을 다녀온 뒤 1984년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에게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불법 구금돼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피해자 김양진 역시 제주에서 붙잡힌 뒤 서울로 끌려가 경찰 대공분실로 추정되는 민간 회사 간판이 걸린 곳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허위자백했다. 공안당국은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고문을 가해 간첩임을 자백토록 했고, 죄인을 만들어냈다.

서울에 남영동 대공분실이 있었다면 제주에는 ‘한라기업사’가 존재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보안사는 제주에서 ‘한라기업사’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쳤다.

당시 도민사회에서는 사라봉 근처 ‘한라기업사에 다녀오면 반병신이 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 다녀온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이 자행한 이 같은 국가폭력에 앞서 제주도에서는 국가폭력으로 수만 명이 희생된 ‘제주4.3’이라는 야만의 역사가 존재한다. 4.3 당시 도민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있다. 

부모형제, 자식, 친구, 이웃 등 내 바로 옆 사람이 피의 광풍에 휩쓸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되거나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됐다. 4.3의 억울함을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던 제주도민에게 군사독재정권은 또다시 이념의 탈과 누명을 씌워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넣었다. 

4.3과 같은 시기 벌어진 예비검속 양민학살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4.3을 좌익 활동으로 규정했던 당시 이승만 정부는 무고한 민간인을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는 적으로 간주해 주정공장 수용소로 잡아들인 뒤 학살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참전해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것은 제주인이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은 재심 청구를 위한 ‘진실규명 신청서’를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하는 등 진실을 찾아 나선 상태다.&nbsp;사진=김종민.&nbsp;ⓒ제주의소리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들은 재심 청구를 위한 ‘진실규명 신청서’를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하는 등 진실을 찾아 나선 상태다. 사진=김종민.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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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와 (사)제주민주화운동사료연구소는 ‘제주도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등의 인권증진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라 실태조사에 나섰고 기존 조사에 더해 새로운 피해자들을 발굴했다. ⓒ제주의소리

 끝없는 국가폭력과 고통, 독재 권력유지 수단 전락한 ‘국민’

독재정권은 국가권력을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사용했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니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없는 죄도 만들어내면서까지 . 

故박종철, 故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87년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는 불법 구금된 대학생이 고문을 받다 죽자 이를 은폐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부검 없이 시체를 화장하기 위해 당직 검사에게 ‘시체·유골 화장 동의서’에 도장 찍을 것을 요구하는 경찰은 검사가 의구심을 품자 “대공 업무”라며 그냥 찍으라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장면은 당시 독재정권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대공 업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당성을 확보, 죄 없는 청년을 죽여놓고도 모든 부정을 은폐하려고 했던 추악한 권력의 민낯이다.

당시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삶은 피폐해졌고, 지금도 꿈속에선 고문의 기억이 되풀이된다. 재심 등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예회복을 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제주간첩조작사건 피해실태 조사보고서가 나오면서 어두웠던 과거 억울한 이들의 사연이 세상에 조금씩 드러났다.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지 못한 억울한 피해자들이 아직도 많고 이야기를 꺼내놓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함께 알려졌다. 

독재권력의 표적이 돼 없는 죄를 자신의 입으로 만들어 실토해야만 했던 그들. 이유 없이 잡혀가 고문을 당한 억울함에도 숨어 살아야만 했던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오명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현재의 우리가 더 관심을 갖고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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